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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김연수 창본 흥보가사람마다 오장육보로되 놀보는 오장칠보볼기 이것 두었다가 어디다 쓰리오이놈아! 네놈 주자고 개 굶기랴가난 박대 안 하기는 보잘것없는 제비뿐떨어 붓고 나면 도로 수북, 떨어 붓고 나면 도로 가득당기어라 톱질이야, 좋을시고 좋을시고초막집 간데없고 꿈속같이 신선 되니제비 다리를 분지르면 박씨를 물어 와?저 박빛 누런 것은 분명히 금송장보다 징한 능천낭 주머니놀보 기가 막혀도 줄줄이 박을 타고극진한 위로에 사람 마음 되찾네경판 25장본 흥부전심술궂은 놀부, 흥부를 내쫓다호된 구박에 설운지고매품도 못 파는 신세은혜 갚는 박씨를 얻다슬근슬근 톱질이야제비 원수 갚는 박씨둥덩둥덩 생난장난데없는 상전 떼기왈짜들의 입담 한판박타기는 계속되고놀부의 최후해설 《흥부전》을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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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렁 실건 톱질 타고 내닫는한바탕 난장이 펼쳐진다처절한 가난도, 지독한 심술도덥석 집어 웃음 속에 풍덩!『흥부전』에서 볼 수 있는 의외의 대목 중 하나는 놀부에게 쫓겨나기 전 흥부의 모습이다. 놀부의 말을 빌리면 그는 글만 읽으며 자랐다. 동네에서 외상술을 마시고 노름을 즐기면서 자식만 줄줄이 낳았다. 그에 비해 놀부는 매일 일하며 집안 살림을 일으키고 재산을 장만해 냈다. 21세기 청소년에게 놀부의 부와 흥부의 가난은 그들의 인성과 별개의 문제로 보일지 모른다.하지만 흥부는 곧 현실과 마주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사회적 기준이 신분과 윤리에서 돈으로 이동하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인식한다. 사계절을 잠시도 놀지 않고 온갖 품을 팔며 매를 대신 맞아 주는 일까지 맡는다. 다만 이렇게 애써도 끼니가 간데없는 형편에 처한다. 흥부가 가난한 건 결코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래서 『흥부전』은 흥부의 빈곤을 작품 전반부 내내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죽도록 일해도 죽느니만 못한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가난에 찌든 흥부를 세밀하게 드러내는 일은 그 자체로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고발이 되기 때문이다.아무리 성실하고 선해도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아무리 악해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현실은 부조리하다. 부자가 된 흥부와 거지가 된 놀부는 이 선악과 빈부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 낸 결말이다. 뜨거운 로맨스도 화끈한 영웅담도 신비한 귀신 이야기도 아니지만, 『흥부전』이 지금까지 읽히는 고전인 이유다.풍요로운 삶에 대한 꿈, 양반 지주의 억압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장면으로 변주되며 뻗어 나간다. 생쥐가 쌀알을 얻으려고 밤낮 보름을 다니다 다리에 종기가 날 만큼 가난했던 흥부네 집에는 평생 써도 줄지 않는 쌀이 생긴다. 놀부에게 붙잡혀 개천 물에 빠졌던 봉사는 박에서 무리를 지어 나와 놀부의 재산을 탈탈 털어 간다. 흥부 박은 초막집을 꽉꽉 얽어 비바람을 막아 주지만, 놀부 박은 쭉쭉 자라 온 동네 지붕을 무너뜨려 놀부가 수천 냥을 물게 한다.『흥부전』이 주는 즐거움은 처절한 가난도 지독한 심술도 웃음으로 풀어내는 찰진 입담을 통해 극대화된다. 매품을 그만두라며 오열하는 아내 앞에서 흥부는 “아, 대관절 볼기 이것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오? 아 이렇게 궁한 판에 매품이나 팔아먹제” 하며 능청을 떤다. 놀부의 악행은 ‘옹기 가게 돌팔매질, 비단 가게 물총질, 소리하는 데 잔소리하기, 풍류하는 데 나발 불기’ 등 재치 있는 말솜씨로 그려져 실소를 자아낸다. 박에서 나온 이들에게 돈을 뜯기던 놀부가 기가 막혀 “나온 걸음에 잘들 놀아 보아라!” 악을 쓰자, 놀이패가 아랑곳없이 “해금 소리는 고개고개, 퉁소 소리는 띠루디” “징, 꽹과리, 북장구를 신명 내어 짓뚜드리”며 소동을 벌이는 대목에서는 폭소가 절로 난다.서해문집 『흥부전』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한 가지 재미는 서로 다른 이본들의 특징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김연수 창본 ‘흥보가’는 남산만큼 쌓인 하얀 쌀밥, 화려한 청홍 비단, 용과 봉황을 새긴 장롱, 은요강과 순금 대야 등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날기 공부 마친 흥부 제비가 강남에서 은혜 갚는 박씨를 물고 돌아오는 장면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한편 경판 25장본 ‘흥부전’은 ‘놀부전’으로 보일 정도로 놀부를 응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놀부의 돈을 뺏을 뿐만 아니라 덜미를 잡고 뺨을 치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두들기기까지 한다. 결말 또한 상대적으로 양반 취향이 많이 반영된 김연수 창본과 달리 냉소적이다. 놀부의 반성도, 흥부와의 화해도 없다. 『흥부전』은 오랜 기간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구비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흥겨운 운율과 통쾌한 익살, 생동감 넘치는 의성어와 의태어, 풍성한 토속어와 사투리, 심술과 빈곤의 해학이 가득한 한바탕 난장을 즐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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