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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텔에서 한 달 살기
2. 프랑스 소설처럼 3. 하우스키핑 4. 야간 근무 5. 초대받지 못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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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은 찬물로 세수하고 거울을 보면 문득,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관심이나 위로를 구하기 위한 푸념이기보다 인생의 기쁨과 고통의 정점들을 이 정도면 충분히 겪었다는 받아들임이었다. 남은 인생에서 이미 겪은 것보다 더 성취하거나 바닥을 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파도는 대개 이 정도로 잔잔할 것이다.
--- p.31 우리 모두가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저마다의 ‘때’를 통과하고 용도 폐기당할 운명이라면 그 누구도 한물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아닌가. --- p.36 “내가 원하는 것과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게 다를 순 있지. 그런데 때로는 사람들이 바라는 걸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어.” 두리는 의식의 흐름대로 그 말을 내뱉고서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원하는 것과 사람들이 바라는 것 사이에서 평생 내적 갈등을 일으키며, 사람들이 바라는 걸 하는 게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안 해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얘기가 아닌가. --- p.42 “배부른 소리는 아니지. 원래 사람은 잘나가고 있을 때 더 불안하고 두려운 거야.” --- p.44 한 남자가 505호 앞에 가만히 멈춰 섰다. --- p.55 회사 일은 세월과 경력이 쌓일수록 더 확실해지고 선명해지는데, 어째서 여자의 마음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더욱 알기가 어려워지는 것일까 자신이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바로 알려주지 않는 것, 자체가 여자가 남자에게 내리는 벌이라는 것을 남자는 알 턱이 없었다. --- p.70 “그러니까 소설 속 한 장면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거야.” --- p.71 호텔에서 일하면서 정현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분비물에 매번 새롭게 놀라곤 했다. 인간의 체액이 얼마나 다양한 색깔과 점도를 지니는지, 체모는 또 얼마나 다양한 두께와 길이, 곱슬거리는 정도가 다른지. --- p.83 이해…… 사람들은 항시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때로는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에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 p.105 한편, 열 살 연상이라는 나이 차는 무척 불가사의했는데, 동주는 상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자신이 실제보다 나이가 더 많고 지적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기도 하면서, 때로는 그와 반대로 실제보다 훨씬 어리고 유치한 애송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p.133 “너는 나로부터 도망가야 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나로부터 너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야.” --- p.134 “네가 아무리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여도 때때로 비치는 치기 어림이나 젊음의 무지는 어쩔 수가 없구나.” (중략) “제가 시시하다는 말인가요” “시시하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냥 어떨 땐…… 젊은 애들은 젊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너무 당당해서 오만해 보여.” --- p.135 “야, 대체 내가 몇 번을 얘기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거래야. 인간이란 종은 뭔가를 내줬으면 반드시 뭔가를 바라는 법이지. 조건 없는 호의란 존재하지 않아.” --- p.176 “저는 그분들과 가까이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일을 할 때는, 특히 돈을 다루는 일을 할 때는 가급적 선입견과 감정을 없애는 훈련이 사전에 되어 있어야 합니다. 돈 자체는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으니까요.” --- p.185 |
「호텔에서 한 달 살기」
뜻하지 않은 생리불순으로 고생하는 영화감독 두리는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사에 제출하지만 담당 프로듀서는 그것을 검토하는 대신 다른 히트작 감독의 신작 드라마 각본 각색을 맡기며 그라프 호텔에서 한 달 머물면서 작업하게 한다. 처음엔 마뜩지 않아 했던 두리는 독특한 분위기의 그라프 호텔을 점점 마음에 들어 하며 그곳에서의 일상에 적응해나간다. 그럼에도 종종 자신의 한물감을 냉정하게 진단하거나 ‘지금 나는 여기에서 뭘 하고 있나’ 아득해지며 혼란스럽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데뷔시킨 배우 수호의 급작스러운 호텔 방문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던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프랑스 소설처럼」 ‘남자’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대낮에 외근을 빙자하여 그라프 호텔 505호에 ‘여자’를 만나러 온다. 영업 부진 탓에 생긴 특급 호텔의 ‘대실’ 상품을 이용하러. 오후의 정사 중, ‘여자’는 간통죄가 폐지되기 직전에 자발적으로 죗값을 치르기를 선택한 P과장님의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남자’에게 들려준다. 낮 대실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남자’가 먼저 호텔을 나와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는데 ‘여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퇴근길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스포일러 : ‘남자’와 ‘여자’는 부부이고 ‘여자’는 생일 선물로 자신이 좋아하는 프랑스 소설에서 읽은 대낮의 정사 장면을 재현해보고 싶다고 ‘남자’에게 요청한 것) 그 프랑스 소설은 바로 2022 노벨문학상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다. 「하우스키핑」 그라프 호텔의 하우스키핑 메이드 일을 천직처럼 생각하는 정현은 오늘도 정해진 순서대로 꼿꼿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나가던 중, 우연히 손님으로 투숙한 대학 동기 상원을 만난다. 상원은 과 동기 단톡방으로 정현을 초대하고, 정현은 잊고 싶었던 과거가(정현은 성인 ADHD 진단을 받고 힘겹게 사회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차례차례 다시 소환되어 괴로워하지만 유일한 취미인 작가 덕질로 도피한다. 휴일이 지나 출근하니 그라프 호텔이 연말부로 문을 닫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패닉 상태에 빠진다. 자기만의 안전한 세계를 빼앗길 위험에 놓인 정현은 심리적 도피처가 되어주는 작가한테 SNS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위로는커녕 차단을 당한다. 「야간 근무」 작가인 ‘나’는 출장 온 친구를 만나러 그라프 호텔에 갔다가 도어맨으로 일하는 20대 청년 ‘동주’를 우연히 오랜만에 만난다. ‘동주’는 ‘나’에게 그간에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술관에서 안내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장애를 가진 30대 기혼 여성 ‘상아’와 나눈 서툰 사랑과 서툰 진심에 대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증명하려고 애쓴 그들의 무모한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고 깊은 밤 야간 근무 중 호텔 반대편의 울창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열병의 상흔을 삭이는 ‘동주’의 안녕을 ‘나’는 기원한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 개그맨 선배 ‘영일’의 기업 회장들 접대 술자리에 급작스레 불려나간 개그맨 ‘상우’는 그곳에서 차분하고 세련된 투자자문회사 대표 ‘이준’을 알게 된다. 이준은 따로 상우를 그라프 호텔의 피아노바에 초대하며 편안하게 만나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상우는 자신과는 다른 ‘지성’의 세계에 사는 이준을 동경하게 된다. 한편, 상우는 기업인-연예인 간의 계산적인 관계에 대해 알게 되며 그에 비하면 고향 친구들과의 이해타산 없는 오랜 우정의 순수함을 소중하게 느낀다. 하지만 어느 날, 고향 친구 정환이 느닷없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마음이 어지러운 가운데 영일에게 불려간 다른 술자리에서 이준이 기업 회장들의 비자금을 탈취해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
어떻게 ‘나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어른들의 소설
ㅤ 인간 본성의 모호하고 복잡한 부분을 섬세하게 성찰해온 작가 임경선은 변화와 선택, 발견의 순간에 맞닥뜨린 2040세대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낸다. 「호텔에서 한 달 살기」 한 달 동안 호텔에 머물며 원치 않게 다른 사람이 쓴 각본을 각색하게 된 영화감독 두리는 자신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있음을 자각한다. 초연해보려고 애쓰지만 종종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며 당혹해하는 그는 뜻밖의 방문객을 통해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프랑스 소설처럼」 영업 부진으로 낮 시간 대실 상품을 내놓은 호텔에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남자’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문득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허상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하우스키핑」 자발적 선택으로 메이드가 된 고학력자 정현에게 호텔이 연말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정현은 호텔이라는 자기만의 안전한 세계를 빼앗길 것 같은 위기감 속에 뜻밖의 인물에게 도움을 청한다. 「야간 근무」 한여름 밤의 꿈같은 사랑 뒤 이별의 상처를 삭이는 호텔 도어맨 동주는 알고 지내던 작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증명하려고 애쓴 자신의 무모한 모험에 대해 들려준다. 후회해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저지르고 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초대받지 못한 사람」 그라프 호텔의 아름다운 피아노바에서 돈과 인간관계의 함수를 알아가는 개그맨 상우는 낯선 세계를 향한 동경과 익숙한 인간관계의 아늑함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상황을 겪으며 그 속에서 어떻게 ‘나’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소중했던 그 무엇을 잃어가면서, 혹은 변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목격하면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떻게 견디고 살아냈을까. 무심하고 건조하지만, 그 아래로 소용돌이치는 마음의 격정과 아릿함은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고독하면서도 여운 짙은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매혹의 장소, 호텔 작가 임경선은 어린 시절부터 외국 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호텔’이라는 공간과 친숙하게 되었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유럽 어느 도시의 남루한 호스텔부터 대도시의 특급 호텔, 주인의 개성이 녹아 있는 베드앤브랙퍼스트(B&B)와 게스트 하우스, 온천 료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숙박 시설을 경험한 그는 이를 토대로 좋아하는 숙소의 다양한 특성들을 집약한 ‘그라프 호텔’을 탄생시켰다. 오랜 시간의 풍파를 견디면서 누적된 역사가 있고, 고집스러운 취향이 있고, 효율보다는 멋과 여유가 있고, 매뉴얼대로 움직이기보다 인간적인 환대가 있고, 무엇보다도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수영장이 있는 호텔. 서울 남산 자락에서 40년 역사(1983년 개관)를 뒤로 하고 밀레니엄 힐튼 서울 호텔이 올해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마치고 김종성 건축가가 혼신을 다해 설계한 호텔 건물이 철거된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이번 신작 단편소설집을 집필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작가의 이십대부터 사십대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추억을 보낸 장소를 영영 떠나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9년 아버지와 단둘이 마지막 어버이날 식사를 함께 한 장소도 국내 호텔 최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던 이곳의 [일 폰테]였다. 한편, 웨스틴조선호텔 홍보실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도 호텔을 그에게 특별한 장소로 만들었다. 24시간 365일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는 곳,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 모든 부서 직원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 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안겨주는 비일상적인 곳 - 호텔은 먼 훗날 노스탤지어로 남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