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공포 우리들 눈동자가 하는 일 어딘가에, 어떤 사람 리뷰|체호프는 왜 사할린에 갔을까 - 장정일(소설가) |
|
요제프 : 눈을 감는다고 보이지 않고, 귀를 막는다고 들리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체호프 : (그 자세 그대로) 저들은 죄가 없습니다, 신부님. 요제프 : 저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손과 입이 있지요. 체호프 : 보는 것이, 듣는 일이, 먹는 것이, 움켜쥐는 것이 어째서 죄여야 합니까, 신부님? 요제프 : 나는 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체호프 :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죄입니까? 요제프 :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죄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인간의 것입니다. 체호프 :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공포」중에서 송연 : 앞 못 보는 연기는 어떻게 할 거야? 선글라스 쓸 거야? 정안 : 연출이 질색해. 그냥 맨눈으로 하재. 송연 : 소극장이잖아. 시선 처리 잘해야 할 텐데. 객석에 아는 사람이라도 와서 눈 마주치면 죽음일걸? 정안 : (피식 웃으며) 급하면 손가락으로 눈이라도 찌르지 뭐. 송연 : 그거 뭐지? 바닥 더듬는 지팡이. 정안 : 로드. 송연 : 그건 사용하고? 정안 : 오늘 가서 연출하고 이야기해보려고. 송연 : 어머니를, 아니 상자를 들고 다니는 남자잖아. 그럼 로드 쓰기는 힘들지 않아? 정안 : 모르겠다. (한숨을 내쉰 후) 그려놓은 그림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무조건 편하게만 하라고 하니. 송연 : 한물갔다고 했잖아, 그 사람. 감 떨어진 지 한참 됐어. 정안 : 그래도 사람은 나쁘지 않잖아. 의리도 있고. 송연 : 의리로 공연하자고 하는 놈들이 최악이야. 몰라서 그래. 정안 :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 이 양반하고 마지막 작품 같이 했지? [세 자매]였나? 송연 : 에휴, 내가 미쳤지. 술자리에서 진지한 얼굴로 캐스팅하는 인간들 정말 싫어. 정안 : (피식 웃으며) 지도 그래놓고선. 송연 : 내가 당신을 닮는 건지, 당신이 날 닮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들 눈동자가 하는 일」중에서 순화 : (사이, 희미하게 웃으며) 이곳에서 알게 된 꼬마애가 하나 있어.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여자아이인데, 어제는 저녁밥을 먹고 그 아이랑 여기 의자에 앉아서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벚꽃을 바라보며 별 이야기를 다 했어. (사이) 그 꼬마애가 이모는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밉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나는 미운 사람 없다고 하니까, 자기는 이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밉대.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살면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죽고 난 후 다시 태어났을 때 또 만나게 된다고, ……어느 동화책에 적혀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는 엄마를 미워하기로 했다면서……. (사이) 이모도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빨리 미워하라고. (사이) 그러고는 한참 망설이다가 나에게 지옥이 있을 것 같냐고 묻더라. (사이)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지옥이 있을 것 같냐고. (사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사이) 뜸 들이다 결국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줬어. (사이) “성은아. 사람은, 사람은 모두 늙어가잖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영영 헤어지고. ……그런데, 그런데 왜 지옥이 더 필요하겠니. 그거면 이미 충분한데.” ---「어딘가에, 어떤 사람」중에서 |
|
체호프의 대표 장막들이 ‘도착-출발’이라는 구성을 갖고 있듯이 이 작품 또한 모델 인물인 체호프의 도착으로 시작해서 실린의 출발로 끝난다. 이와 같은 구성은 체호프의 단편소설 「공포」의 구성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특징은 체호프의 대표적인 극작술(‘도착-출발’) 속에 통합시키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상호 연관은 이 작품에서 2년 만에 실린의 농장을 찾아온 체호프를 『갈매기』의 트리고린에, 그를 사랑하는 동시에 저주하는 마리를 니나에, 마리의 남편 실린을 같은 작품 속의 트레플료프에 대입하는 것이다. 그럴 때 고재귀에 의해 창작된 이 희곡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던 『갈매기』의 대안적 결말 내지 후속편이 된다. 체호프의 희곡을 꿰고 있는 독자라면 고재귀의 작품에서 이보다 더 많은 상호 연관성을 찾아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한 상호 연관의 합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우연이 생겨날 수 있다면, 거대한 사막에 늘어놓은 보잉 777X의 잘게 분해된 부품이 단 한 차례의 모래폭풍에 의해 곧 이륙할 수 있는 보잉 777X로 재조립되는 기적도 가능할 것이다. 구슬을 꿰는 사람이 없다면 구슬은 구슬일 뿐 목걸이가 되지 못한다. - 장정일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