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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밤, 들 가운데서
설유진
제철소 202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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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공연 top100 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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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이런 밤, 들 가운데서
오아시스
어슬렁
나의 사랑하는 너
초인종

공연 리뷰|자유와 사, 랑사이, 어디쯤 거기에 - 마정화(번역자, 드라마터지)

저자 소개 1

서른 무렵에 스태프로 일하며 연극을 처음 만났다. 2014년 서울연극제 희곡공모전에 「씨름」이 당선되면서 극작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907(구공칠)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 현재의 감각에 솔직한 작업을 하려 노력한다. 언제나 고민하는 것은 자유와 사랑이다. 책에 수록된 희곡 외에도 「벽」 「코끼리 무덤」 「9월」 「제4의 벽」 「홍평국전」 「때때때」 「포스트 러브」 등을 썼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96쪽 | 358g | 125*188*20mm
ISBN13
9791188343881

책 속으로

은영 가끔 너무 무서운 꿈을 꾼다 그랬어. 꿈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한번은 꿈에서 사람을 죽였대. 근데 사람들은 걔가 죽인 줄도 모르더래. 그래도 일단 도망을 갔대. 죽은 사람 가족들이 슬퍼하더래. 미친 듯이.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울더래. 자기 때문에. 그게 다 보이더래. 꿈이니까. 돌이킬 수가 없더라고, 그게 미치게 하는 거라고.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가 없더라고.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가 없더래. 아무도 걔가 죽인 줄 모르는데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야. 사람을 죽여버렸다고. 자기가. 꿈에서. 뭔가 잘못돼서 사람이 죽은 거지. 자기 때문인 건 확실하다고, 하여간 몇 날 며칠을 도망가는데 멀리도 못 갔대. 동네 주위만 뺑뺑 돌았대. 경찰도 누구도 쫓지도 않는데 도망을 갔다고. 꿈이니까. 가족도 보이고, 친구도 보이고, 다 보이는데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고. 죽어버릴까 하다가도 못 죽었다고, 무서워서. 남은 죽여놓고, 자기는 죽지도 못하고.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기 때문에 누가 죽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돌이키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길 미치게 하더래.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 꿈이니까. 쫓기지 않는데 도망갈 방법이 없더라고. 미치도록 답답하더래. 느낌이 꼭 외로움이랑 닮았대. 엄청나게 지독한 외로움.
소연 고독?
은영 고독은 아니래. 고독은 젠체하는 것 같다고. 고독 말고 외로움. 지독한 외로움. 지독하게 외롭더래. 꿈에서, 사실이 아니라면, 제발 꿈이라면 좋겠다 하다가 문득, 꿈에서 깨어났는데. 무슨 영화 주인공처럼 “안 돼!” 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앉아서도 한참을 이게 다 꿈이었다는 걸 믿지 못하겠더라는 거야. 와, 씨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이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 눈물이 쏟아지더래.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 꿈인데. 엄청나게 지독한 외로움이, 생생히, 지독하게 외롭더래.
--- 「이런 밤, 들 가운데서」에서

부하1 이모가 돌아가셨어요.
감독 네?
부하1 이모가 돌아가셨다고요.

사이

부하1 우리 이모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죠. 이모는 멋진 사람이었어요. 입시미술이 아니라 정말 그냥 미술을 가르쳤어요. 아이들이 미술학원에 와서 친구들이랑 놀기도 하고, 숙제도 하고, 그림을 그리다가 집으로 가는 거예요. 온종일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다음 시간에 학원으로 와요. 별거 없어요. 그런데 입시 때가 되면 아이들은 이모의 미술학원을 떠나요. 입시학원을 다니죠. 미술학원엔 또 새로운 아이들이 와요. 이모는 늙어가요. 그러다 어느 날 유방암에 걸리셨어요.

사이

부하1 하지만 이모는 삶에 대한 뜨거운 의지로 유방암을 이겨냈어요.

사이

부하1 그런데 이번엔 간암에 걸리신 거예요.

사이

부하1 쏜살같이 지나갔어요. 내가 언제고 만나러 갈 때까지 이모가 살아 계실 줄 알았어요. 진짜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이모는 죽지 않을 줄 알았어요. 이모는 늙어가는데, 그것도 몰랐어요.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죠? 시간이 무한정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이모처럼 좀 더 멋진 사람이 됐을 때 짠 하고 나타나야지 했어요. 근데 이모가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장에 갔어요. 영정 사진 속 이모는 어릴 때 봤던 멋진 그 모습 그대로였어요. 그리고 이모를 봤는데, 모르는 사람 같았어요.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봤어요.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이모랑 나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돼버렸어요.

사이

부하1 공룡들이 아무 잘못 없이 다 죽어갔다고 했죠? 우리 이모는요? 이모가 무슨 잘못을 했어요? 이모에게 살 자격이 없나요, 감독님?
감독 아뇨.
부하1 난 이모를 죽일 수 없어요.
--- 「오아시스」에서


자연 이거, 조소는 왜 배우시는 거예요?
영미 아…… 뭐…… 그냥…… 궁금해서?
자연 전 사는 게 하도 재미가 없어서 이것저것 배우는 중이에요.
영미 저만큼 재미없을까요?
자연 아…… 그건 모르는 거죠!
영미 알았어요. 뭐 뭐 배우셨어요?
자연 목공이랑…… 불어랑…… 수영이랑 피아노랑…… 자전거 동호회도 나가봤고…… 농구랑…… 소설 쓰기…….
영미 정말 다양하게 해보셨네요.
자연 자꾸 심심해요, 헛헛하고. 8년째 같은 회사, 재미없는 회사 다니는 장점이라면…… 일에 열정이 없으니깐 일에 매이질 않는 거. 연초면 일 안 할 때 뭐 할지 계획을 엄청 열심히 세워요. 1년 계획을 쫙 세우는 거죠. 여름휴가 때는 어디로 여행을 가야겠다, 달력을 하루씩 지우면서 휴가만 기다리는 거예요. 연말에 계획대로 다 한 걸 보면 뿌듯하고 그래요.
--- 「어슬렁」에서

지원 우리 같은 학교로 배정되면 좋겠다.
선주 응.
지원 농구부랑 문예창작부 있는 학교로.
선주 고등학교 가면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을걸?
지원 그럴까? 그럼 우리 뭐 하고 노냐. 넌 시를 쓰고 난 농구를 해야 하는데.
선주 넌 이 언니 따라서 공부나 해. 맨날 자느라 진도 못 따라가지 말고. 앞으로 3년은 우리 인생이 걸린 3년이야.
지원 쫄지 마! 물론, 난 천재니까!
선주 어우, 그놈의 슬램덩크!
지원 쫄지 마! 정대만!
선주 난 또 왜 정대만이야.
지원 내가 강백호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는 캐릭턴데?
선주 난 농구 좋아하지도 않는데.
지원 그럼…… 채소연 시켜줄까?
선주 슬램덩크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넌 왜 맨날 남자야…….
지원 채소연은 농구 안 하잖아.
선주 채소연은…….
지원 슬램덩크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 난 천재니까!
--- 「나의 사랑하는 너」에서

수아 비행기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오는데 말이야. 휴대폰만 보고 낄낄대면서, 누군 먼저 가겠다고, 먼저 타겠다고, 먼저 내리겠다고 밀쳐대는 거야.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이리 툭 저리 툭, 그렇게 스물세 명.
생각 스물셋?
수아 그날 나한테 부딪힌 사람들이 스물세 명이었어.
생각 지독하네. 그걸 셌어?
수아 그러게. 근데 더 지독한 건 뭔 줄 알아?
생각 뭐?
수아 아무도 사과를 안 해.
생각 누가?
수아 사람들. 그 스물세 명 중에 단 한 명도 나한테, 미안해요, 실례합니다, 괜찮으세요, 하는 사람이 없어. 내가 안 보이나 봐. 난 가방까지 떨어트렸는데, 모르나 봐.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다 제 갈 길 가는 거야. 꼭…….
생각 안개 속을 다니듯이?
수아 바쁘게 움직이는 발아래에서 겨우 가방을 줍는데, 성질이 확 나는데…….
생각 가서 한 방 먹여줬어?
수아 그랬어야 했는데. 그때부턴 나도 내 갈 길만 갔어. 이번엔 내가 스물세 명한테 부딪히면서. 나도 한 번도 미안하다고 안 했어. 내가 왜? 나도 못 들었는데.

수아, 의자를 끌고 나간다.

생각 독해.
--- 「초인종」에서

우리말 희곡에 쓰이는 ‘사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상태나 감정보다 시간과 관계의 어떤 틈. 공간성. 벌어진 틈은 그릇이 되어 만든 이의 손을 떠난다. 사이를 제대로 적어넣을 때 그리고 무대에서 사이가 무너질 듯이 쌓일 때 느껴지는 전율이 있다. 현실의 나는 해내지 못하는 그런 극적인 순간. 이 책에 실린 희곡들은 편당 80분에서 100분가량을 공연했다. 그런데도 어떤 극은 말이 많고 어떤 극은 말이 적다. 모두 ‘사이’가 하는 일이다. 그간 연극으로, 내가 쓴 것을 나의 속도로 전해 왔다. 이제 이렇게 남의 손에 남기게 되었으니, 이번 희곡집은 독자들이 자신의 속도로 읽어볼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_설유진
--- 서문 중에서

연극은 실패한 소통과 절망, 그리고 그때 물어보지 못했던 안타까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9년 동안 열심히 날아다녔던 자유와 사랑이는 죽었고, 할머니와의 어색한 인사는 반복되지만 보람찬 변화는 생기지 않고, 개찰구에서 우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려주지 못한 마음만 계속 남아 있을 뿐이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이태원 참사의 추모 기도회를 가는 마음만 남을 뿐이다. 나쁜 일은 없어지지 않고, 그 죄책감은 외로움으로만 남는다. 〈이런 밤, 들 가운데서〉는 그 모든 일을 바라보기밖에 할 수 없었던 외로움과 죄책감을 이야기하려는 불완전한 시도이다.
_마정화(번역자, 드라마터지)

--- 리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제철소가 펴내는 국내 희곡집 시리즈 [리:플레이] 여섯 번째 책으로, 제12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 작가 설유진의 첫 희곡집이다. 극작, 연출, 각색 등 연극의 여러 영역을 활발히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다섯 편을 묶었다.

책의 표제작인 「이런 밤, 들 가운데서」는 2023년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참사를 지나는 마음을 세밀하게 더듬으며 그 이후에도 이어지는 다정한 마음들, 특히 자유와 사랑의 가치를 담았다”라는 평과 함께 제2회 이영만연극상 작품상을 받으며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런 밤, 들 가운데서」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서울동물원의 마스코트인 뻐꾸기 ‘자유’와 앵무새 ‘사랑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9년 뒤 시인의 친구는 계간지 『자유와 사랑』의 자유기고 코너 ‘21세기의 시’에서 오자 하나를 발견한다. 친구들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새를 찾고, 술을 마시고, 그 누군가가 바라본 세상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마지막에 가서야 하나의 정경을 보여준다.

또 다른 수록작 「오아시스」는 가까운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우리가 사는 동안 만나는 것들, 다시 만나고 싶은 것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희곡이다. 고도화된 사회 속에서 무력감에 시달리는 우리가 자기만의 오아시스를 찾았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 있다. 팬데믹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0년 봄, 조소 학원에서 수강생으로 만난 영미와 자연의 느슨한 대화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응시하게 하는 「어슬렁」, 이미 지나간 시간과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시간 사이의 충돌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여성의 이야기로 풀어낸 「나의 사랑하는 너」 등도 설유진의 작품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희곡들이다.

배우 옥자연의 말처럼 희곡집 『이런 밤, 들 가운데서』에 실린 다섯 편의 희곡은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습관과 방식, 이를테면 ‘태도’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타인을 새롭게 맞이하는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동시에 그것은 ‘설유진’이라는 고유한 창작자를 가진 우리 연극계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추천평

설유진의 글은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매번 새로운 감각으로 이야기한다. 고유하고 독특한 인물들, 일반적이지 않은 리듬의 대화, 아주 일상적이거나 아주 시적인 대사들, 이리저리로 마구 뻗치고 또 되돌아오는, 아주 개인적이고 아주 사회적인 사랑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독자의 일반적인 기대로부터 끊임없이 일탈하고, 낯선 기대를 품게 한 다음 예상치 못하게 충족시킨다. 이야기 내내 무수히 발끝에 놓이는 지연과 멈춤, 당혹과 기다림, 비약과 도약은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습관과 방식, 이를테면 ‘태도’에 균열을 낸다. 작은 균열의 사건들이 차곡차곡 쌓여 도달하는 것은 나의 태도를 보류하고 타인을 새롭게 맞이하는 가능성 ― 감히 말하건대, “낙원”이다. 장소이기 이전에 행위로서의 낙원. 깊은 연민과 사랑의 행위. “무서운 꿈”도 함께 꾸는 것. “열지 마시오”라고 쓰인 문을 열고 나가는 것. 여기 다섯 개의 희곡이 우리를 탁 트인 곳으로, “자유와 사랑”이 춤추는 곳으로 데려간다. “진취적이고 긍정적”으로 그리고 “혁명적으로”. - 옥자연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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