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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미술 동인 두렁 컬로퀴엄을 열다 [김종길] 023
[01] [라원식] 두렁의 기억, 그리고 역사 033 [02] [김노마] 삶의 태도를 바꾸는 혁명 101 [03] [김명심] 노동 해방의 예술로 129 [04] [김봉준] 우리가 함께 만났던 두렁이라는 숙제는, 헤어진 이후 온 삶으로 풀어야 했다 177 [05] [김주형] 역사의 낭만과 현장에의 복무 261 [06] [김진수] 운동의 생활에서 삶 속의 운동으로 305 [07] [박홍규] 물에서 건져 놓고 보니 다들 동학 농민군이었네 그려 349 [08] [성효숙] 노동의 건강한 아름다움 349 [09] [양은희] 흙으로 빚은 아이 얼굴처럼 461 [10] [이기연] 동그라미 아홉 개를 질기게 붙들었다 503 [11] [이억배] 거대한 블랙홀의 시대에 예술가로 뛰어들기 557 [12] [이은홍] 나의 삶과 두렁의 운동성 607 [13] [이정임] 교육 현장에서 펼쳐지는 두렁의 정신 657 [14] [이춘호] 생활 속의 미술이라는 꿈과 그 뒤안 679 [15] [장진영] 중심성을 벗어나 확산하려는 진행형의 태도 717 [16] [정정엽] 나의 작업실 변천사 757 |
양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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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광대다, 무변광대(無邊廣大)다. 광대는 변이 없어야 된다. 무변광대는 8대 천민(賤民)의 계승자다. 우리는 천민이다. 상민도 아니고, 양반도 아니고 가장 비천한 천민의 예술을 배워 몸으로 내리는 천민들이고, 천즉천(賤卽天)이다. 가장 천한 이들이 곧 하늘이다.” 이것이 저희 탈춤패들이 가지고 있던 ‘탈 정신’이었습니다.
---「라원식, 063」중에서 미술계 내의 공간에 올 수 없는 사람들, 오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삶의 현장으로 저희가 직접 가서 함께하고 싶었던 바람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나누어 누리기 위해 판화라든지,슬라이드 쇼라든지, 여러 명이 크게 그려 놓고 같이 보는 벽화, 걸개 그림 등 두 렁 식의 전달 방식이 이런 마음 가운데에서 등장합니다. ---「라원식, 072」중에서 1984년과 1985년을 넘어가게 되면 [...] 종교 단체는 물론이고 다양한 부문별 사회 단체들 중에 두렁과 걸치지 않은 곳이 없을 거예요. 전국적으로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 지식인, 여성, 어린이 운동 단체와도 걸쳐서 들어갔습니다. 특히 두렁은 예술이나 종교 쪽 에 계신 분들의 도움도 참 많이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라원식, 099」중에서 ‘두렁’이라는 집단의 성격이 그랬던 것 같아요. 어떤 틀이 없는 동인이었고, 그 대신에 틀이 없기 때문에 변화도 쉽게 받아들였던 거죠. 우리는 어떤 틀에 딱 맞추도록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성이 많았고, 그 안에서 각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만한 타당성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특정 선배 몇몇의 입김으로 움직이는 동인이 아니라 굉장히 자유로운 집단이었어요. ---「김노마, 115」중에서 지금도 『청춘』에 연재한 [우리는 한아름] 만화에 애착을 느끼는 게, [...] 소위 운 동권 선배들의 입김이 없었던 거지요. [...] 재미도 있으면서 노동 운동이 생활과 맞물릴 때 어떤 갈등이 생기는지, 어떻게 자연스럽게 생활에 스며들 수 있는지를 많이 고민하며 그렸던 작품입니다. 계속 연재되었다면 민중 미술에서 또 다른 고민의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쉽기도 합니다. ---「김노마, 118」중에서 조금씩 혼란이 왔어요. ‘예술가로서 노동자를 위한 정론지이자 문학지를 만든다는 것은 의미 있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문학지 성격보다는 정론지 성격이 강해지고 탄압이 들어오면서 [...] 그 해 3월 박노해 시인이 구속되었는데, 얼마 안 지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날 저는 머물러 있던 안가에서 잠깐 외출하느라, 단 몇 분 차이로 구속을 피할 수 있었죠. ---「김명심, 155」중에서 ‘세월호’ 사건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충격적이고 집단적 우울증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은 다들 아실 거예요. 이 사건은 저에게도 무거운 책임과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면서 몇 점의 스케치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저희 집 남매가 다니는 ‘이우학교’ 어머니들을 만나서 지역 문화제에 쓸 걸개 그림을 같이 만들어 보자고 의지가 모아졌어요. ---「김명심, 171」중에서 『농사꾼 타령』 말풍선의 글들을 보면 지금도 아주 맛깔스러워요. 해학적이고, 이야기 자체가 아주 단단합니다. 그 만화집 안에 담긴 이야기들, 토지 문제를 다룬 [메뚜기 아저씨]나 농산물 가격 문제를 다룬 [울어버린 순이 아버지], [밑지는 농사 ] 등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농촌 현실을 담고 있어요. 그런 『농사꾼 타령』이 ‘기독교농민회’에서 발간되고 경찰이 만화가를 잡으러 다닌다고 하니, 저는 또 도망을 쳤죠. ---「김봉준, 199」중에서 두렁의 작업이 복고주의로 보일 수도 있죠. ‘현장’을 강조하느라 정치나 사회 문화라고 하는 기성 시스템과는 동떨어져 루저로 활동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오늘날 제도권 안에서 생산되고 배출되는 문화 예술 활동을 따져 보자고요. 민중들 스스로가 그것을 자기 문화라고 생각하고 향유하고 있나요? 저는 그런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옛날부터 많이 느꼈어요. ---「김봉준, 209」중에서 걸개 그림을 해 보면 한 사람 눈보다 여러 사람 눈이, 한 사람 손보다 여러 사 람 손이 모아질 때 훨씬 재미있고 풍부한 그림으로 만들어져요. 그렇게 함께하 는 개입 방식이 얼마든지 열려 있는데 근대 미술 교육의 전통에서는 개인 중심 으로만 보다 보니까 자꾸 그런 방식을 배제시키죠. [...] ‘작가’라고 하면 개인 작품을 만든다고만 여기던 친구들은 두렁에서 서서히 떨어져 나가더라고요. 처음에는 이화여자대학교나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사라지고 홍익대학교 탈반 · 풍물반 · 연극반 친구들이 주가 되어 있더라고요. ---「김봉준, 219 」중에서 예술의 모색으로서 두렁이 걸어 온 길은, 일생을 걸어야 갈 수 있는 기나긴 길이었으니 당연히 미완의 길이었습니다. 삶 전체를 존재 이전하며 민중적 삶으로 거듭나며 삶에서 깨우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찾고 싶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농민 · 노동자 · 빈민 · 일하는 여성 등 그들 얼굴들을 잊을 수 없어요. [...] 두렁의 길은 자기 삶을 투신해서 가는 길입니다. 각자 자신의 일상 속에서 성찰하고 길을 찾아야 할 문제입니다. 도시 안에서 그저 소시민으로 모여서 미술 동인의 이름으로 함께 활동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김봉준, 260 」중에서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주동을 했던 여학생이 잡혀갈 때 면도칼을 꺼내서 자기 왼손의 동맥을 끊는 행동을 했습니다. 시위를 주동했으니 잡히면 자기는 죽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랬어요.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저한테 상당히 큰 영향을 준 듯합니다. 그 때의 기분, 그런 정서들이 알게 모르게 밑바닥 자의식으로 깔려서 두렁 창립이라든가 창립 이후의 여러 활동 속에서도 계속 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래디컬한 표현으로 발현되니까요. ---「김주형, 275」중에서 처음에는 공포로 파업의 문을 열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지나가고 안정기가 오고, 대치 상황이 계속 이어지게 되면 지루함이 파업하는 사람들을 덮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세대도 아닌 십대들에게 지루함이라는 것은 가장 큰 적이거든요. 지루함을 못 이겨서 파업 현장을 이탈하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어요. 파업 지도부에서는 이탈할 사람들을 막는 게 아주 큰 과제였습니다. 그때 가장 큰 몫을 한 축이 문화패들이었죠. 문화패들은 파업 현장에 들어가서 연극 공연을 한다든가 탈춤 강습 · 미술 강습 같은 것을 했습니다. ---「김주형, 287」중에서 노동자들이 살던 허름한 집을 닭장집이라고 불렀어요. 닭장처럼 문만 달려 있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거 형태였어요. 후배들과 셋이 그 닭장집을 얻어서 생활했어요. 맨 처음 이전하자마자 들은 이야기는, 우리가 거주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처럼 이전한 여성 활동가들이 남성 노동자들에게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였어요. ‘남성 노동자들이 다 전태일이 아니구나….’ ---「김진수, 319」중에서 나중에 제가 안타까워 보였는지 한 명이 자취방으로 찾아왔어요. ‘언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언니 ‘학출’인지’라고 하더라고요. 노동자들은 다 알면서 그냥 빤히 바라만 본 거예요. 저 사람이 뭔가 해 주지 않을까? 절대 자신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하려고 하지 는 않는 상태였습니다. 노조 활동의 실패 후 패배 의식이 너무 강했던 거죠. 일 년 채 못 돼서 건강이 완전히 망가져서 현장을 나오게 됩니다. ---「김진수, 329」중에서 유인물, 삐라가 휙 날라 오는 거야. 순간 땅바닥에 내려가는 것 확 잡아 가지고 주머니에다가 넣었어. 하아. 숨이 가빠오는 거야. 뭔지를 아니까. 이게 불온 유인물이다, 라는 생각. 거기선 읽어 보지도 않고 집에 와 가지고, 그야말로 컴컴하게 해 놓고 봤어.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야.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는 데다가 뿌렸다는 거야. 아… 그걸 보고 막 울었어요. 이런 기가 막힌 세상을 내가 처음으로 대하는 순간이었어. ---「박홍규, 361」중에서 오죽했으면 노총각들 신부감 찾는다고 ‘전국농촌총각대책위원회’ 만들었어요. 이때 사무국장이 강기갑(姜基甲, b.1953)이었어. 거기 간사 형수하고 만나 가지고 결혼을 해 버렸어. ‘농촌총각대책위원회’에서 농촌 총각들 올라와 가지고 시위했지. 그 스티커가 도시 지하철마다 붙었어. 지하철마다, 버스마다, 정류장마다 겁나게…. 히트를 쳤지. ---「박홍규, 385」중에서 프락치들이 얼마나 심했냐면 때로 뒤를 밟는다는 눈치를 채지 못하게 사람을 바꿔요 , 아저씨가 쫓아오다가 아줌마로 바뀌는 거죠. 치 안 본부 한번 끌려갔다 온 이후에는, 집 앞에 검은 지프차만 있어도, 자라 본 가슴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 너무너무 놀라고 막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요. ---「성효숙, 425」중에서 그 폭력이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전에 제가 치안 본부에 끌려갔을 때 옆방에서 들려오던 그 신음 소리, 무조건 때리고 보는 거지요. 그렇게 무지막지한 현실을 거치면서 제가 얼마나 낭만적인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이런 현실을 바꿔나가려면 더 철저해져야 하고 굉장히 강해져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어요. ---「성효숙, 443」중에서 매일같이 노조가 생기고, 동만 트면 연대하러 나가야 했어요. 그런데 4공단 집회 모습 사진을 보면 전투 경찰들이 멀뚱히 있잖아요. 그만큼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힘이 대단히 커졌고 거리 집회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힘이 느껴지던 시기였어요. 하루하루가 긴박하게 돌아갔고요. 부평 4공단 전체가 해방구가 된, 그런 분위기였어요. ---「성효숙, 449」중에서 대학 2학년을 마쳤는데 미술을 계속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하고 괴로운 거예요. 어느 게 내 길인지 고민하면서 휴학을 했어요. 휴학을 하고 애오개에서 다양한 영역의 문화 운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죠. 몇몇 대학에 만화반과 판화반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이듬해까지 해방 춤, 4박자 춤 등을 보급하러 전국을 다녔어요. 요즘으로 보면 바로 ‘플래시몹(flash mob)’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동시에 방향까지 맞추어 추는 춤이니까요. ---「양은희, 473」중에서 오빠네 집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는 뭐 하러 가세요?” 물었더니 “오늘은 그냥 같이 가자.” 이러는 거예요. 그 때만해도 전혀 생각을 못했죠. 알고 봤더니 그게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가는 차였어요. 도착한 곳이 청량리역 근처 정신병원이에요. 병원에 가까워지니 올케 언니가 “아가씨, 미안해요.”라면서 막 우는 거예요. ---「양은희, 490」중에서 여성 노동자 누구나 육아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지금처럼 국가가 아이를돌보는 구조가 아니고, 아이를 맡아 준다 해도 “우리 집으로 아이 데리고 와. 내가 돌봐 줄게.” 이런 수준이었어요. 다들 자체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던 거예요. ‘내가 다음 운동으로 잡아야 될 것은 탁아 운동이다.[...]’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죠. ---「양은희, 496 」중에서 당시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쌓고, ‘내가 사람이 되는 일’이었어요. 나는 정말 어떤 그림을 그려야하지? [...] 그림으로 사람의 감성을 싹 움직일 수 있는 것 정도는 저에게 쉬운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넘어선 예술이 무엇인지, 현장하고 예술이 어떻게 만나지, 이것이 저의 고민이었어요. 그 시대에 한국 작가가 독일문화원에서 작품전을 하면, 바로 미술계에서 중요한 작가로 뜰 수도 있었어요. 그게 멍에가 될 것 같더라고요.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거죠. ---「이기연, 491」중에서 “밤500명이 풍물을 치는데 억수로 오는 비 맞아 본 경험 있어요? 멀리서 보니까, 차가운 산에 물안개 끼는 것처럼, 인간들이 움직이는데 물안개가 끼는 거예요. 비를 맞고 몸에서 열기가 올라가잖아요. 인간 전체가 한 덩어리의 산이 돼요. 북 가죽이 젖어서 소리가 퍽퍽퍽퍽 내려앉아요. 꽹과리는 땅땅땅땅 소리가 올라가요. 물안개로 하나가 된 그 덩어리에서 나오는 소리가 상황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암울한 현실을 깨는 ‘신바람’이 저거구나.” ---「이기연, 511 」중에서 당시에 걸개 그림이 너무 강한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어요. ‘부드러운 대중성’이랄까, 상당히 많이 고민했던 작업이었습니다. 이 걸개 그림은 거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쓰였어요. 경기 남부뿐만이 아니고 많은 지역에서 활용되었어요. 그림이 활동에 미치 는 영향이 어마어마했고,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시각으로 사람을 사로잡던 시절이었는데, ---「이억배, 575 」중에서 저는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때려 치우라고 이야기할 때 그 굿판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인데, 그 말을 꺼낸 매체와 발화 방식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 자체가 이상하지는 않았어요. ‘죽음’이라는 것. 우리 운동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 제가 받아들이기에 임계치를 넘었다고 할까요. 저 스스로 도저히 소화가 안 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운동 자체에 내부 논쟁이 너무 많았고요. 뭔 논쟁이 그렇게 많은지, 지금 생각해도 미치겠어요. 그런 힘든 논쟁을 하면서 저는 내부적으로 무너져갔던 것 같아요. ---「이억배, 599」중에서 '아, 이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무지하게 원초적 고민을 하고 있구나' [...] 이후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가 사실은 눈에 뻔히 보였어요.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평생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겠다고, 어떤 그러한 마음에서 결단을 내리고 두렁에 들어가게 됩니다. ---「정정엽, 765~767」중에서 지금도 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민중 미술이 끝났다' 또는 '그 때는 활발했는데 지금은 사장됐다' 이런 식의 이야기인데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었고, 정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게 민중 미술은 완성된 적도 없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정정엽, 795」중에서 '긴 혁명의 시기가 끝나고 이제 일상의 시기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 그 동안에는 (대상이 명확해서) 비판을 하고 싸우면 됐지만, 이제는 스스로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이것을 꽃피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전에 제가 처음 두렁을 선택할 무렵의 그 긴장감 같은 것을 다시 느꼈어요. ---「정정엽, 797」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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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에서 보냅니다]
밤샘 마감으로 어수선한 사무실을 청소한 뒤 신간 보도자료를 쓰다 말고 늦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늙은 어머니와 멀리 사는 형제들의 문자 메시지가 쏟아집니다. “계엄” “광화문 괜찮으냐” 찾아 보니, 빨간 배경의 자막에 “언론 출판 통제”가 뜹니다. 에헤~이, 2024년에 계엄이 무슨, 먹던 소주를 한 잔 더 따르면서도, 머릿속에 두서없이 걱정들이 명멸합니다. ‘아… 어쩌면… 이 책 배포를 못할 수도 있겠네….’ 동료들은 다들 안전한 곳에 있을까? 내일 출근하지 말라고 알려야 하나? 이 전화기는 사용해도 되는 걸까? 돌아오는 제삿날에 지방의 어머니 댁에 갈 수 있는가? 살면서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024년 12월 3일의 비상 계엄의 첫 작전이 술자리를 파하기도 전에 불발된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성숙하고 단단하게, 깊은 곳까지 뿌리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촛불 집회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이 축제이고 놀이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월호를 겪으며 집회가 우리 모두의 마음에 박힌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마음의 마당이 됨을 알았고, 진압 군경들과 충돌을 피하는 지혜를 익혔습니다. 연행을 피해 재빨리 적법한 국회를 소집하고, 그렇게 하도록 돕고, 그 상황을 디지털 매체로 공유할 수 있는 나라라는 믿음이 두텁고 넓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려 일상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공포를 질서로 누를 줄 알고, 분노를 혐오와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지난 반 세기, 또는 130년 전 동학 농민군들 때부터 이 땅의 홍익 인간들이 수없이 피흘리고 또 실패하며 쌓아 낸 두터운 성과일 것입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혹한의 계엄에, 우리는 1979년 12월 서울로부터 45년의 어둠 속에서 피흘리고 더듬으며 씨뿌렸던 민주화가 이렇게나 훌륭하게 뿌리내리고 울창하게 자랐음을 역설적으로 확인합니다. 또한 우리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과오가 독이 되어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 우리의 사소한 일상을 망치려드는 현장을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민주화 운동의 실패, 3.1 만세 운동의 실패, 동학 농민 혁명의 실패를 다음 세대가 마주칩니다. 이 모든 것이 수류산방의 새 책 미술 동인 두렁의 이야기, 『두렁, 앞뒤』의 이야기입니다. “‘두렁’이란 말은 논이나 밭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둔덕을 뜻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그 곳은 농작물을 거두어 집으로 나르는 곳이고, 일하다 쉬는 휴식처이자 일에 지치지 않게 함께 노래도 부를 수 있고 춤도 추는 놀이판입니다. 이처럼 ‘두렁’은 함께 땀 흘려 일하고 노는 삶의 터입니다. 이런 이름을 미술 모임에 붙인 것은 미술품이 한낱 고급 소비품에 불과하지 않고 그림 한 장, 조각품 하나가 만들어지더라도 고생을 이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복판에 같이 있고 싶어서입니다.” [『미술 동인 ‘두렁’ 판화 달력』, 실천문학, 1983. 12.] [1980년대 민중 미술 ‘소’집단 두렁 : ‘대’집단은 누구입니까?] [두렁, 앞뒤]는 미술 동인 두렁에 가담했던 열여섯 사람들의 구술을 모은 책입니다. 두렁은 미술에 조금 관심이 있다 해도 생소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미술 동인 두렁은 1982년에 홍익대학교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민중 미술 이념을 표방하며 출범한 미술 단체이다.” 한국 미술 용어 사전에서 두렁을 소개하는 첫 문장입니다. 이것은 반쯤 맞습니다. 두렁은 그 출범 시점도 명확하지 않고, 학벌로 닫힌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개개인이 민중 미술의 대표 작가라고 할 만한 여정을 걸었던 것도 아니고, 미술 단체였다고 하자니 꾸준히 전시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두렁이 무엇인데?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이 책 『두렁, 앞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수류산방이 책 제목에 ‘앞뒤’를 붙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두렁은 정확한 시점과 끝을 알 수도 없고, 완결될 수도 없습니다. 두렁은 1983년에 동인으로서 창립 선언문을 발표하며 창립 예행전을 가지고, 1984년 경인미술관에서 창립전을 개최했습니다. 그것이 동인의 이름으로 연 모든 전시였습니다. 미술관과 전시장, 미술 작품으로는 두렁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민중 미술을 표방하는 작가들과 두렁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1995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전》을 거부했습니다. 『두렁, 앞뒤』는 두렁의 스펙트럼을 한데 모은 최초의 출판물입니다. 지금 우리가 두렁의 이야기, 『두렁, 앞뒤』를 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1980년대 민중 미술 집단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두렁은 처음부터 그 자리를 버린 데서 시작한 이름이었습니다. 현실과 발언의 뒤를 이었다느니, 광자협 서미공과 나란하다느니, 그런 말들은 조금도 두렁의 가치를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렁의 개개인들은 스스로 ‘이념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선언했지만, 모두 입을 맞춘 듯 ‘두렁은 하나의 정신이고 태도였다’고 회고합니다. 그 태도는 민중을 위한 예술이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예술을 넘어서는 것으로, 민중 속의 예술, 삶 속의 미술, 현실을 바꾸어 가는 미술이었습니다. 두렁에 속한 이들은 이른바 순수 미술에 대한 염증, 삶과 유리된 예술에 대한 질문, 서구에서 이식된 장르와 개념에 대한 의문들을 가졌습니다. 우리 전통 안에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는 없는가?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나는 창작일 수는 없는가?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며, 예술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많은 말들을 대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품었던 분들이라면 꼭 이 『두렁, 앞뒤』를 보십시오. [두렁과 『두렁, 앞뒤』 : 미술사가 아니다] 그들은 보자르식 서양 미술을 잘 습득해 대학까지 갔으면서 한국 전통 미술과 풍물을 연구합니다. 일부러 못 그리려, 일부러 서툴게 그리려 했습니다. 미술 작품이 아닌 걸개그림이나 현수막, 판화와 만화… 여러 시각 매체로, 여러 장르로 나아갔습니다. 아예 미술계가 아닌 현장으로 나아가 공장 근로자가 되고 농민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울의 외곽, 자본주의의 언저리에서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 살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두렁의 작업입니다. 두렁의 스승은 미술 밖에, 대학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미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1980년대 미술사가 아닙니다. 미술을 버려도 좋다고 작가의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두렁의 동인으로 남았습니다. 두렁의 동인들은 역사의 현장에 스스로 나아가 목숨을 걸고 검열을 피해 이름을 바꾸고 몸을 숨기고 감옥에 잡혀가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두렁, 앞뒤』를 보아야 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1970~1980년대 독재 치하 한국 민주화의 역사 그 자체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전태일 이후 동일방직 노조 등 초창기 노조의 탄압으로부터 민주노총이 결성되기까지의 노동 운동의 역사와, 1970년대 유신과 민청학련 이후 1980년 5.18과 민청련이 펼쳐 나간 정치적 민주화 운동의 역사, 해방신학과 기독교 농민회로부터 전국농민회총연맹을 거쳐 FTA 반대 투쟁까지의 농민 운동의 역사가 어떻게 서로 얽히며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는지, 그 속살을 이처럼 내밀하게 그리고 퍼즐처럼 증언하는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현장 안에서 몸을 굴려 그 역사를 만들어 간 톱니들입니다. 두렁의 동인들은 작가가 되기도 전에 훗날 한국 민주화 역사를 쓸 영웅들과 함께 있었으며 운동권의 붕괴와 그 욕망의 변절 또한 지켜보았습니다. 그 모든 트라우마를 각자의 삶으로써 신체로써 받아내고 삭혀 내는 방식 또한 두렁의 긴 사연이 되었습니다. 고대 신화, 동학, 영성, 환경, 돌봄, 여성. 두렁의 주제와 방법이 생명적 가치로, 홍익 인간으로 확장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우리를 저 먼 고대와, 자연과, 우주와, 다른 생명과 이어 주는 모든 것이 예술이므로 그렇습니다. 두렁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성 중입니다. “미술은 새로운 인간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미술을 위한 미술이거나 생활에 미(美)를 심기 위한 미술이 아닌, ‘삶에 기여하는 미술’이 되기를 노력한다. […] 전문성을 경계하고 공동 작업을 지향한다. […] 우리는 미술이 인간 중심에 서서 삶의 공간에 개방적으로 확장되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술 동인 두렁은 아직 동인으로서의 이념 통일도, 공동 작업 방식의 체계화도, 의식과 형식의 일치점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고뇌를 같이 하는 동시대의 미술인으로서 안주를 원치 않고 변화를 갈구하는 정열로 모인 것이다.”[미술 동인 두렁, 「산 그림을 위하여―미술 동인 두렁 창립 예행전을 하면서」, 1983.] [아무도 모르는 두렁의 이야기 : 수류산방의 편집 과정] 이 책은 두렁 동인 중 16명이 2014년부터 2022년까지 행한 여러 차례의 구술 또는 대화록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구술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렁 동인들이 산개해 뛰어들었던 현장, 즉 아직 공백이 많은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수류산방에서 편집하며 주석을 작성하고 도판을 찾고 사실 관계를 바로 잡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이후 민중 문화와 노동 미술, 운동 현장의 다양한 면면이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또한 구술에 참여한 16명 동인들의 두렁 이후의 작업들, 미술품은 물론이고 출판물과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인 등도 소개했습니다. 2014년 세월호와 2017년 탄핵 집회까지, 동인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소통을 이끌어내고 진혼하고 위로합니다. 마지막으로 2024년 개최된 미술 동인 두렁 40주년 기념 『두렁, 지금』의 전시 장면까지 수록했습니다. 16명 작가의 40년 활동, 수천 매의 구술을 바탕으로 808쪽의 책을 만들어 내는 일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수류산방에 정리되지 않은 구술문과 데이터들을 내려 놓은 연구자들은 원고를 집필하고 정리하고 편집하는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살펴 주지 않는 공백 속을 더듬어 가는 동안, 그 밤샘의 시간 동안 수류산방은 두렁 작가들의 이야기 그 안에서 나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구술 안에 수류산방의 바로 지금이 거울처럼 환했습니다. 16명 동인들의 이야기에서 나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두렁, 앞뒤』는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담입니다. 두 번밖에 전시를 못하고 해체된 동인, 미술계에 순수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 그들이 어떻게 실패를 향해서 날아갔는지, 어떻게 더 미술로부터 서울로부터 더 먼 언저리로 향해갔는지의 이야기입니다. 『두렁, 앞뒤』는 이 땅에 근대가 이식된 이후 한국에서 생산된 예술가 또는 창작자 집단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두렁의 동인들은 자신의 방법론을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2020년대 한국에서 길을 찾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교훈과 빛을 주며, 남겨야 할 이야기입니다. 두렁은 한국 미술이 낳은 독특하고 독창적인 성과이며 가장 한국적인 현상입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를 증언하고 기억하는 가장 뛰어난 미술입니다. 노동 미술, 여성 미술, 대안 미술, 생명 미술, 다원 예술, 출판 미술과 디자인이 모두 두렁과 이어집니다. 두렁은 우리 고대의 신화와 철학, 불화와 민화, 풍물과 탈춤의 미술 아닌 것들을 모두 포용해서 새로운 통로를 터 주었습니다. 두렁의 작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도 빛을 잃지 않고 울림을 주며 우리를 1980년대 운동의 현장으로 데려다 줍니다. 『두렁, 앞뒤』는 미술계이든 아니든, 널리 읽혀야 할 이야기입니다. 미술 동인 두렁은 단명했을지 모르지만 두렁의 정신과 태도는 살아 유동하며, 바로 지금 이 시대가 그 정신을 간절히 부르고 있습니다. 두렁은 소집단이 아닙니다. 두렁은 점처럼 흩어져 곤란 속을 허덕이는 개개인들을 순식간에 연결시켜 한바탕 뛰게 하는 거대한 에너지입니다. 두렁 동인들의 삶과 태도는 1980년대의 산 역사이며, 2024년 살아 춤추는 탄핵 촛불 집회라는 현재입니다. “생활 현장의 사실성과 문화적 역량을 가장 귀중한 작업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대상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는 데서 벗어나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일하고, 놀며, 생활하는 실상을 그린다.”[미술 동인 두렁, 「산 그림을 위하여―미술 동인 두렁 창립 예행전을 하면서」, 1983.] [두렁이 던진 질문에서 출발하다] 『두렁, 앞뒤』 역시 두렁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인 ‘미술사’ 또는 ‘민중 미술’ 서적이 보이는 패턴에서 벗어난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구술 본문이, 왼쪽 페이지에는 관련된 주석과 도판이 흐르며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형식은 수류산방이 오랜 기간 연구, 발전시켜 온 특유의 방식으로 이 책에서 한층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미술사도, 구술사도, 작품집도 아닌, 어드메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여러 해에 걸친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표지는 흔히 그려지는 무겁고 엄중한, 또는 감정에 호소하는 형태와 달리 간결한 타이포그래피로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다. 앞과 뒤를 연결하는 동시에 표지와 내지를 관통하는 그래픽이 눈에 띈다. 속지에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두어 일종의 도입부 역할을 하도록 했다. 본문은 두렁의 옛 활동을 보여주는 화보로 시작한다. 16명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끝은 2019년과 2024년 열린 두렁 회고 전시 화보로 마무리해 책을 펼칠 때부터 덮을 때까지 과정을 섬세하게 설계했다. 표지의 종이는 가죽 부산물과 리사이클 펄프에 100% 천연 에너지로 생산된 친환경 종이를 사용했다. 종이 자체의 색을 살렸다. 속지는 사탕수수 부산물을 이용한 비목재 비표백 친환경 종이이다. 두꺼운 평량대의 속지를 사용해 800페이지가 넘는 무거운 책을 표지와 속지가 함께 지탱하도록, 한층 견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PUR 제본을 택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매 페이지 새로운 도판이 가득한 800페이지가량의 책을 큰 불편함 없이 읽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