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Misumi Kubo,くぼ みすみ,窪 美澄
구보 미스미의 다른 상품
이소담의 다른 상품
|
이 단지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많다. 여기는 말하자면 자살 명소다. 어려서는 노을 질 때면 단지 구석이나 나무 덤불 속에 누가 서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도 내가 세 살 때 아빠가 죽고, 열 살 때 엄마가 언니와 나를 남기고 집을 나간 뒤로는 살아 있는 인간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게 됐다.
--- p.8 주간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 말도 같은 반 애들의 말도 너무 빨라서 따라가지 못했고, 칠판을 봐도 하얀 문자가 눈물로 일렁일렁 흔들렸고, 반 애들이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괴롭히는 애들은 괴롭힘을 당할 사람을 순식간에 찾아낸다. 마치 사바나의 표범처럼. --- p.17 구라하시가 “사, 살아 있는 동안 먹은 음식에서 보존료를 잔뜩 섭취하니까, 요, 요즘 시체는 잘 썩지 않는대”라고 말했다. “그거 자주 듣는 도시 전설이네…….” 무짱이 코웃음을 쳤다. “……시체는 썩어?” 내가 묻자, 무짱과 구라하시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 p.34 고독사도 자살도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었던 단어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어도 내 마음은 전혀 술렁거리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자주 인사하던 할머니가 사라지는 건 흔한 일이었고, 자살도 이 단지에 살면 교통사고 수준으로 일상적인 일이었다. 내가 그때 속으로 생각한 것은……. 생각한 것은, 젠지로 할아버지와 단지 경비를 하다 보면 언젠가 진짜 시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그 현장을 맞닥뜨린 적 없다. --- p.53 남자는 펜스 위에 걸터앉았다. 세찬 바람이라도 휙 불면 남자의 몸이 저 너머로 떨어질 것 같았다. 빨리, 빨리, 시체가 되어줘. 지금 당장. --- p.71 “나, 재일 한국인이야.” 무짱이 말했다. 그 말은 몇 번이나 들은 적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그런 말로 괴롭힘을 당한 남자애와 여자애의 얼굴이 생각났다. “한국인인데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소윤은 내 한국 이름. 내가 싫어졌니?” “어? 왜 싫어져?” 입에 넣은 지짐이라고 하는 얇은 오코노미야키 같은 것이 목에 걸릴 뻔했다. “왜냐하면 고작 그런 이유로 다들 날 줄곧 미워했거든.” --- p.137 “내 친구가 사는 단지를 갑자기, 아무런 허가도 없이 철거한다고 합니다! 갈 곳 없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도쿄도가 하는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무짱의 큰 소리에 몇 명인가가 걸음을 멈췄다. “여러분은 그런 폭거가 용납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나요!” “살 곳을 일방적으로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나요?” --- p.227 언제였던가, 나는 시체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 p.263 |
|
자살 명소로 불리는 낡고 허름한 아파트
그곳에 남겨진 삶들을 지키기 위한, 작지만 가장 뜨거운 연대 주인공 미카게는 도시 외곽에 있는 낡은 아파트 단지에서 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빠는 오래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무책임한 엄마는 아이들만 남겨둔 채 집을 나가버렸다. 어릴 적부터 천식을 앓아 몸도 약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도 서툰 미카게, 그리고 그런 동생을 돌보기 위해 험한 밤일도 마다하지 않는 언니 나나미. 자매가 사는 아파트는 허름한 외관과 흉흉한 소문 때문에 지역에서 ‘자살 명소’로 불린다. 실제로 노인들의 고독사나 투신자살도 흔하게 일어난다. 미카게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타인의 무덤 위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삶’보다 ‘죽음’과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미카게의 소원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시체를 보는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실체를 확인하고 더 잘 이해하는 것. 그것이 미카게가 생각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카게에게 있어 그 외의 다른 꿈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사치스러운 것이다. 어느 날 미카게는 스스로를 ‘단지 경비원’이라고 칭하는 노인 젠지로를 만난다. 젠지로는 미카게에게 배지를 주며 반강제로 단지 경비원에 임명한다. 처음에는 체력 문제와 낯선 노인에 대한 반감으로 경비원 일에 부정적이던 미카게는 차차 젠지로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아파트 청소, 독거노인의 생존 확인, 옥상 순찰. 이것이 경비원으로서 미카게에게 주어진 임무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일은 죽음에 한없이 가까워지던 미카게의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다시 삶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삶을 견뎌내는 모든 이에게 건네는 따스한 위로 구보 미스미는 그간 성인을 화자로 내세워 사랑과 이별에 관해 이야기하는 수위 높은 작품을 써왔다. 그러나 나오키상 수상작인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부터 아동과 청소년을 화자로 채택하는 문학적 실험을 시작했고, 이번 작품에서는 제목부터 ‘죽음과 탄생(TIME OF DEATH, DATE OF BIRTH)’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은 서사의 고삐를 청소년 화자에게 쥐여주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죽음이 산재한 공간에 방치된 미카게는 늘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떻게 올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마주하게 돼 있고, 육신의 소멸과 함께 인간은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삶은 죽음으로 가는 단계일 뿐일까? 전작에서 코로나 시대를 담아내며 상실의 아픔을 그린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그 시선을 유지하며 한층 더 깊은 곳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이웃들과 연대하며 처음으로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디는 미카게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개개인은 작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통해 모두의 삶을 지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된다. 이 소설은 저마다의 상실과 좌절, 죽음 위에 집을 짓고 삶을 견뎌내는 우리, 모든 ‘나’에게 건네는 따스한 위로이자 응원의 목소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