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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언어학이란?
제2장 동물의 언어 제3장 언어의 기원 제4장 언어습득 제5장 언어와 두뇌 제6장 음성학 제7장 음운론 제8장 형태론 제9장 통사론 제10장 의미론 제11장 화용론 제12장 언어와 사회 제13장 언어의 계통과 비교 제14장 언어의 탄생과 사멸 제15장 문자와 기록 제16장 언어와 음악 제17장 광고와 매체 제18장 언어와 문학 제19장 언어와 디지털 제20장 한국어와 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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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을 소리로 나타낸 것을 말이라 하느니라.” 일찍이 외솔 최현배(1894~ 1970)가 한 말이다. 언어란, 즉 우리말로 ‘말’이니 여기서 ‘말’을 ‘언어’로 바꾸어 놓아도 될 것이다. 최현배가 말한 ‘말의 학문’이 바로 언어학이다. 그렇다면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을까? 어떤 동물이 자신의 생각을 소리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이 과연 생각할 수 있는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유일한 척도라고 말해져왔다. 이 말이 맞는다면, 동물은 생각이 없거나 소리가 없거나 아니면 생각은 있어도 그것을 소리로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많은 언어학 개론서들은 인간만이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오고 있다. 노암 촘스키는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차별적 특질이자 인간의 정수라 부를만한 어떤 것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물이 과연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 의사소통과 관련하여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필자는 방금 ‘의사소통과 관련하여’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자주 ‘의사소통’이란 용어를 사용할 텐데, 과연 언어와 의사소통은 어떤 관계인가?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인가? 필자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영어학개론을 강의해오면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왔고, 거의 똑같은 답을 들어왔다. “언어란 무엇일까요?” “의사소통의 도구입니다.” 이런 문답이 자주 이루어져왔다. 이런 답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비유를 해보자. “망치란 무엇일까요?”란 질문에 대해, 어떤 학생이 “망치는 물건을 깨는 도구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가정해보자. 망치는 분명 물건을 깨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물건을 깨는 데 꼭 망치만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돌멩이로도 물건을 깰 수 있고, 손으로도 물건을 깰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돌멩이나 손이 망치인 것은 아니다. 아이구 머리야. 언어학이란 이런 말장난 같은 것을 하는 것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자는 한 가지 이상한 예를 들은 것일 뿐이다. 언어는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기능들 중 하나가 바로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언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것은 좋지는 않다는 말이다. 필자는 수업시간에 가끔 특정 학생에게 눈길을 보내고 손으로 일어나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의아해하던 학생이 나의 손끝을 보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면 필자는 다시 손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학생은 이번에도 아주 의아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제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해서 필자는 한 학생과 손짓과 눈빛으로 충분히 의사소통을 했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언어’인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방금 필자가 학생과 주고받은 의사소통 행위는 과연 언어인가? 물론 아니다. 학생들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럼 이러한 의사소통 행위는 왜 언어가 아닐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현배에 따르자면 이러한 의사소통 행위는 ‘소리’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 언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의미와 소리의 결합’이 바로 언어이다. 자, 그럼 이번에는 이런 반론을 제기해보자. 소리를 사용하지 않는 수화(sign language)는 언어인가 아닌가? ‘소리’가 없다는 점에서 수화는 다소 특별하지만, 수화에 사용되는 각종 손짓들은 언어에 사용되는 ‘소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수화는 매우 특수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방금 전에 필자가 언급한 교실에서의 소통행위와 수화는 몸짓(gesture)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수화는 고도로 조직화되고 체계적인 기호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몸짓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이 언어의 본질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언어사용 양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없는 경우에도 언어를 사용한다. 혼자 있을 때, 인간은 독백을 한다. 독백을 자신과의 대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철학적일 수는 있겠지만, ‘의사소통’의 기본 개념에서 볼 때 독백은 결코 의사소통을 위한 행동이 될 수 없다. 태어난 지 한두 해 된 어린아이를 보라. 혼자 있을 때도 열심히 옹알이를 하고, 말을 배운 이후로는 엄마가 근처에 없어도 열심히 혼잣말을 한다. 이러한 행위는 결코 의사소통을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 이 점이 동물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언어가 다른 점이기도 하다. 동물은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없을 때 소위 ‘동물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꿀벌은 동료 꿀벌에게 꿀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서만, 새들은 다른 새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서만 ‘동물의 언어’를 사용한다. 혼자 있거나 다른 동료에게 무언가를 알릴 필요가 없을 때, 동물들은 결코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이 책에서 의사소통으로서의 언어의 기능에 대해서보다는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언어의 특질에 대해 자세히 논할 것이다. 의사소통은 분명 언어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그러나 되풀이하여 말하자면, 의사소통은 언어가 가지는 기능의 하나일 뿐, 언어 자체를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언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언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가령 사과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는 다소 다르다. 사과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과’란 구체적인 사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란 사과와 같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다. 비록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라고 말은 했지만 왠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란 말은 언어의 구성 요소에 대해서 말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정의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마치 ‘망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쇳덩어리와 나무의 결합’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언어는 ‘기호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기호란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어의 ‘가다’란 소리는 실제로 가는 행동과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 관계도 없고, 그것 자체가 ‘가다’란 행동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어에서 ‘가다’란 소리는 ‘두 발을 움직여 위치를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다’란 소리가 실제 ‘가능 행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은,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에서 ‘가다’란 소리가 ‘가는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특정 언어의 음들은 특정한 의미를 대신하는 일종의 기호로 사용되는 셈이다. 그래서 언어를 ‘기호의 체계’라고 하는 것이다. 언어음은 교통표지나 화장실 표시 그림과는 다르다. 즉, 교통표지는 그 표지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언어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은 해외여행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화장실 그림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고, 교통표지 역시 대개는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가다’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우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어에서 ‘가다’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영어나 러시아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미국의 화용론학자인 찰스 퍼스(Charles Peirce)는 도로표지와 같은 기호들을 도상기호(iconic sign)라 하고, 언어음과 같은 기호를 상징기호(symbolic sign)라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기호의 체계’라고 하여 ‘체계’란 말을 덧붙였을까? 체계란 구조이다. 체계나 구조란 말은 단순한 집합이 아니란 말이다. 즉, 상징기호들을 단순히 모아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체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사전을 생각해보자. 영어사전은 여러 가지 언어음, 즉 상징기호들과 더불어 각각의 기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설명해 놓는다. 다시 말하면, 영어 단어는 기호인 것이다. 그렇지만 영어사전의 모든 단어를 안다고 해서 우리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에 사용되는 기호, 즉 단어들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단어들을 연결하여 의미를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규칙(rule)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언어음이라고 하는 기호들이 규칙에 의해 일정한 방법으로 연결되어 의미를 표현할 수 있게 되는 체계’가 바로 언어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 역시 언어의 속성들 중 하나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무언가에 대해 완벽한 정의를 제시하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 이 말은 언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언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그것을 말로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스스로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언어로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정교한 언어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던 것을 정의해보고자 시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독자들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더라도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으로, 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독자들의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풀릴 의문일 수도 있다.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