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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어린이의 정경_1986/피아노/신호등/바탕색/계절/46색/따귀/가정교육/밤의 기도/붉은 것/비행/쥐잡기/단테와 침대/어른들은 진실을 수정한다/어떤 거짓말은 솔직하다/아이들은 현실을 수정한다/가구 사용법/내 수영복이 아니야/할 수 있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2부 우리들의 실패/찌그러진 풀처럼 사람을 눕게 하는 감각/작은 배우/그건 잡으라고 난 털이 아니다/큰 배우/부스러기들/찢어진 페이지/지나간 미래/미래에도 하지 못할 이야기/학자와 나/난삽/언덕에서 내려오기/얼굴 사용하기/회상하기/전화 돌리기/오해하기/언덕에서 멀어지기/두 사람 해설 | 전승민(문학평론가) 어린 오르페우스의 여름밤 작가의 말 |
朴蓮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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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처음과 그 모든 것의 실패에 대하여
소설은 일곱 살 여름으로 시작한다. 소녀의 이름은 여름. 고모 손에 맡겨진 채 마당 한 귀퉁이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어른들은 죄다 나갔고, 아이만 혼자 덩그러니. 여름을 돌봐줄 사람은 없다. 괜히 마당에 나앉아 줄을 긋거나, 소리 내 책을 읽어도 봐주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밖에 홀로 나갈 수도 없다. 점처럼 깜빡이는 일곱 살 여름. 이유 없이 자주 울고, 웃고 침묵하다 떠들고. 엄마가 있는 아이가 아니라서. 엄마를 대신하는 게 고모라서 사람들은 여름을 고장난 신호등처럼 바라본다. 그런 그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젊은 여자와 아빠. ‘쟤는 수줍음이 많아.’ 아빠의 말에 대항하려다 멈춰버린다. 일곱 살 여름은 아빠에게 유일한 약점이자 무기. 최대한 도도하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기. 동정이 필요 없다는 듯. 반응하기를 멈춘다. ‘오늘부터 엄마라고 불러.’ 아빠가 데리고 온 여자가 말한다. 고모 말에 따르면 교양이라곤 눈을 뜨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여자. 새엄마.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엄마와 아빠의 여름. 우리 집에 갈래? 마음속에 친구라고 다짐할 때 나오는 첫마디.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만난 첫 친구. 루비가 말했고 여름은 승낙했다. 그때 두 아이 삶의 궤도에 정확히 일치하며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누구나 처음 ‘친구’와의 강한 결속력과 유대감이란. 나의 세상과 기꺼이 맞바꿀 수 있는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 같은 것. 여름을 지배하는 루비. 루비를 스며들게 하는 여름. ‘넌 좀 특별한 것 같아.’ 특별하게 지켜주어야 할 그 무엇과 혹 지켜주지 못했던 그 무엇을 혼동한 채 결속되어버린 둘. 여름은 종이에 쓸 때가 많았고 루비는 종이를 읽는 때가 많았다. 둘은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읽거나 썼고 말하거나 들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내어준 그 처음에 대하여. 세상이 모르게끔 감추어둔 그 처음들에 대하여. 슬픔. 죽음. 기억. 과거. 나쁜 것. 야한 것. 좋은 것. 착한 것. 믿음. 배신. 타인. 사랑 같은 것들. 유년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아이면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상상이 펼쳐지고 펄럭이는 열 살. 이불먼지를 뒤집어쓴 채 재채기를 하며 기어나온 열한 살. 세상의 처음이 이제는 익숙한 것으로 느껴지는. 어른들이 현실이 수정하는 것에도. 어른들이 거짓말로 현실을 버텨내는 것에도. 과거가 슬프다는 사실도. 현재를 생각하면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도. 미래를 생각하면 씩씩함과 눈물이 서로 교차한다는 것도 알게 되는, 그리고 루비를 잃어버리게 된 열두 살. 불안과 질투로 루비를 잃어버린 게 아니다. 루비의 견고해진 거짓말 때문도 아니다. 여름에게는 친구가 많았고 루비에게 친구는 여름뿐이라서. 오래도록 비밀로만 친했던. 늘 혼자였고 외로웠고 침울했던 루비를 모른 척했던 그 여름 때문일까. 그래서 결국, 루비는 떠나간다. 여름은 그게 나의 ‘첫’ 사랑이란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또한 ‘첫’ 이별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것 또한 루비라는 것도. 루비도 여름과 같았을까. 루비에게도 여름이 그 ‘처음’이라는 걸. 실패하는 사랑은 영원히 사랑해야 할 수밖에 없는 사랑 유년의 상처가 오래도록 어른의 삶에 관여하는 이유는, 아마 유년의 상처와 슬픔이 당시에 각인되지 않고 영원히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져버린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어른의 밑거름이 되고 그때의 슬픔의 흔적이 지금 우리들의 얼굴이 된다. 유년의 상처와 슬픔은 서서히 어른으로의 시간이 채워지며 찾아온다. 어른이 된 후, 유년의 그 어떤 시절의 기억과 냄새와 풍경이 불현듯 묻어온다. 여름이 루비를 잃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 깨닫는 것처럼. 잃어버린 루비를 다시 되찾아야 되겠다는 다짐처럼. 우리들의 첫 실패를 분명히 상기하고 있는 그 유년의 상실에 대해, 박연준의 소설은 막바지에 다다라서 공명한다. 실패하는 사랑은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인 것처럼. 실패해버렸기에 영원히 사랑은 계속된다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