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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自序) 5
격식과 환대 11 격외(格外)의 생각 13 결과 무늬 15 고갱이와 멋 부림 17 고목(古木)과 큰 나무 19 고무신과 운동화 21 고추무름과 고추부적 23 공중제비와 착지 25 관(觀) 27 그늘의 힘 29 글의 지문(指紋) 31 긴장감과 탄력 33 김치와 시 35 꽃을 탐할 것인가 열매를 취할 것인가 37 꿈과 현실 39 나는 누구인가 41 나아감과 물러남 43 낚시꾼과 부자 45 남종화와 진경산수 47 노동인가 운동인가 49 달과 천 개의 강 51 달변(達辯)과 눌변(訥辯) 53 딱딱하게 굳은 빵 먹는 법 55 딴전피우기와 딴지걸기 57 땅 속의 7년 나무 위의 7일 59 때때로 익힌다는 것 61 마음자리와 발상 63 막사발의 아름다움 65 만가(挽歌)와 축가(祝歌) 67 모루와 망치 69 목동과 양떼들 71 묵향과 차향 73 물음과 울음 75 바닷물 77 반복과 변주 79 밥과 반찬 81 밥과 술 83 밥과 영혼 85 법고창신(法古創新) 87 보편성과 개연성 89 붓과 팔레트 91 빛과 그림자 93 빛과 빚 95 사막과 낙타 97 사슴의 뿔 99 산과 알피니즘 101 산등성이와 골짜기 103 살청(殺靑) 105 새의 뼈는 비어있다 107 생각의 둠벙 109 생선을 싼 종이와 향을 싼 종이 111 석복의(惜福衣) 113 성(聖)스럽거나 속(俗)되거나 115 소라게나 게고둥이나 117 소소헌과 시집 119 시시콜콜 우두커니 121 시와 진주조개 123 시적 정서와 개성 125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127 아삼륙 129 알과 테트리스 131 여백 133 연잎의 지혜 135 염부와 소금밭 137 오아시스와 모닥불 139 운율과 시 141 원형과 시 143 위트와 풍자 145 유치찬란 147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볼 간(看) 149 일출과 일몰 151 일상에서의 신기루 153 일상의 사소함 155 일아삼엽(一芽三葉)의 시 157 잎이거나 꽃이거나 159 장대높이뛰기와 연작시 161 저 꽃이 법문(法問)이다 163 절구와 디딜방아 165 정면과 측면 167 정적(靜的)이거나 동적(動的)이거나 169 제다(製茶)의 과정 171 제습과 가습 173 제행무상(諸行無常) 175 조기매운탕과 육수 177 주름진다는 것 179 중년의 시 181 중심과 가장자리 183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185 짧은 것은 짧은 대로 187 차 한 잔 189 창조인가 발견인가 191 초지일관(初志一貫) 193 추와 찌 195 콩이다 팥이다 197 틀과 창 199 풍자와 패러디 201 피아노와 피아니스트 203 휘뚜루마뚜루 205 흥과 신명 207 집 그리고 향수 -성선경 208 자술연보 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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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는 헛꽃이라는 게 있다. 참꽃은 작고 볼품이 없어 눈에 띄어도 이목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헛꽃의 치장을 한다. 영락없이 꽃처럼 보이는데 헛꽃이다. 진짜 꽃이 너무 작아 곤충을 유혹할 수 없으니 꾀를 낸 것이다. 꽃이 피면 홀딱 속아 넘어간 곤충들이 혼미하여 날아든다.
이런 멋 부림은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명함에 찍힌 많은 이력들은 거의 헛꽃이다. 시에 있어 멋 부림은 고갱이를 돋보이게 하려는 장치다. 멋 부림은 고갱이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에 눈길을 끌어들이는 헛꽃이다. 곤충에게서나 사람에게서나 먼저 눈이 가는 것은 헛꽃이다. 헛꽃의 멋 부림에 끌려들어가 고갱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멋 부림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헛꽃에만 눈길이 가 고갱이를 놓칠까 하는 근심을 하는 것이다. 헛꽃은 헛꽃으로서의 역할이 있을 뿐 고갱이는 아니다. 고갱이를 놓치면 곤란하다. 헛꽃은 당의정의 설탕물과 같은 것이다. 고갱이를 잡아라. 삶의 줄기, 고갱이를. --- p.17 「고갱이와 멋 부림」 중에서 시를 쓰는 일은 밥을 팔아 영혼을 사는 일이다. 이는 매우 고달프고 곤혹스러운 일이다. 영혼도 사고팔고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적합한 직업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영혼을 팔아 밥을 사는 구조다. 밥을 팔아 영혼을 사야지 영혼을 팔아 밥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시인은 밥을 팔아 영혼을 사는 사람이다. 어느 시인은 태어나려고 하는 “아이의 심장도 밥, 밥, 밥, 하고 뛴다.”고 시를 썼다. 이게 자본주의의 논리다. 밥이 법보다 위에 있다. 자본주의는 영혼을 팔아 밥을 사는 구조니 태아도 이미 밥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암시다. 아무리 숭고한 영혼도 밥 앞에서는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다. 밥과 영혼은 공존하기가 어렵다. 나는 많은 시인들이 밥 때문에 영혼을 팔아 힘들어하는 것을 보아왔다. 밥 앞에서는 젊은 날의 꿈도 무릎을 꿇는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장난처럼 묻던 물음이 어떤 함의를 가졌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밥과 영혼이라. 시를 쓰는 일은 밥을 팔아 영혼을 사는 일이다. 곤란하다. 헛꽃은 당의정의 설탕물과 같은 것이다. 고갱이를 잡아라. 삶의 줄기, 고갱이를. --- p.85 「밥과 영혼」 중에서 마음은 아주 크고 넓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이 보이니 보이지 않느니 한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은 마음의 자취니, 마음은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빙산일각(氷山一角)이라, 보이는 부분 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 시의 행간에 담긴다. 생선을 싼 종이는 생선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는 향내가 나기 마련이다. 같은 나무를 보고 어떤 시인은 전신주를 떠올리고, 어떤 시인은 미륵상을 떠올린다. 전신주를 떠올리는 시인은 전신주에 마음이 가 있고, 미륵상을 떠올린 시인은 미륵에 그 마음이 가 있다. 그 마음이 행간에 담긴다. 말은 마음의 소리다. 시는 그 마음의 소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양식이다. 시인은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 그 마음을 다 담는다. 시를 읽는 독자는 어떤 평론가 보다 예리한 눈을 가지고, 그 마음을 읽는다. --- p.111 「생선을 싼 종이와 향을 싼 종이」 중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태일 때 우리는 진퇴양란(進退兩亂)이란 말을 쓴다. 앞을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고, 뒤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인 중년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다. 나는 이 나이에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래서 오직 시만 읽었고, 시만 썼다. 이 시기에 나는 가장 많은 시집을 읽었으며, 가장 많은 시집을 냈다. 진퇴양란(進退兩亂)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시에만 매달렸다. 그때, 아이들은 아직 어렸고, 부모님은 이미 늙었다. 오직 나만이 스스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고독한 중년이었다. 모든 가족들이 내 손만 바라보았지만 내 손은 빈 손, 건네줄 그 무엇이 없었다. 빈 사막에 혼자 떨어진 느낌으로, 하루하루가 무섭고 두려웠다. 이때 시는 돈도 되지 않고 밥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진주난봉가를 부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뜰에다 오동나무를 심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중년, 진퇴양란(進退兩亂)의 이때 시가 더욱 필요하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을 것 같은 시가 구원의 동아줄이 된다. 나는 이 나이에 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 p.181 「중년의 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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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등단 37년의 시인이 자신이 시를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각의 고갱이들을 99편의 산문을 통해 풀어놓고 있다. 책의 각 편마다 한 장씩의 사진을 배치해 자못 급하게 달음질쳐 나가려고 하는 생각의 보폭을 한 걸음 늦추게 배치하였다.
총 99편의 글은 사전처럼 가나다순으로 정렬하여 순서대로 읽지 않고 자신이 관심이 가는 편을 먼저 읽어볼 수 있게 배치하고 있다. 일종의 무서록처럼 순서 없이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는 장을 먼저 읽어도 좋은 사전 형식의 편집이다. 함축과 은유의 시적 산문은 비오는 여름날의 수제비처럼 수수하여 호젓한 감성에 젖어들게 하며, 독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보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엽서 형식의 짧은 글들은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젊은 시인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글쓰기의 함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의 고갱이들을 지은이는 차근차근하게 풀어놓고 있다. 이 책은 비단 시인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모든 장르의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 만하다 할 것이다. 글쓰기가 마음의 행로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책은 한 번 만에 다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한 편씩 한 편씩 천천히 곁에 두고 읽으면 글쓰기에 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