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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인간
만고강산 저녁의 눈이신 인지상정 소풍 너는 어디에 있느냐 내 고운 벗님 본래면목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해설 / 정홍수 작가의 말 |
成碩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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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부인은 혼례를 앞둔 재희가 침선여공에 재주가 없어 시집살이가 드셀까 적이 걱정이다. 재희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침모, 찬모, 유모 아이보개 하여 밑엣것들을 부리고 살면 될 게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해대지만 그게 이야기책을 너무 읽어서 나온 허황한 소리라고 김씨부인은 생각한다. 다만 보통학교에도 서당에도 넣어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글자와 글씨를 어깨너머로 깨쳐서 어지간한 동네사람들 편지는 다 이 처녀가 대필을 해줄 정도이다.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지마는 아버지도 은근히 맏딸의 그런 재주를 사랑하고 이따금 어려운 한문 문자도 가르쳐주는 눈치였다. 이제 재희는 아버지가 사오는 한자말이 섞여 있는 책을 하나 막히지 않고 술술 읽어내려가며 토를 달고 뜻을 풀어 적어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일이 일러주는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김씨부인이 이야기에나마 재미를 들여 온갖 시름을 옛이야기에 실어보낼 수 있게 된 것도 재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웃의 아낙들 중에 간혹 이야기를 잘하는 이가 없지는 않으나 대개가 노인네들의 이야기로 어린시절부터 들어오던 고리탑탑하고 대중도 없이 황당한 이야기였지 재희가 읽어주는 책처럼 호둣속같이 아기자기하고 깨처럼 고소하며 마늘처럼 맵고도 눈물짓게 하는 맛은 있을 수 없었다. 장차 이런 것도 재주라면 재주가 될 것이니 김씨부인이 바라기는 재희가 제 말대로 고대광실 넓은 집에 개미같이 많은 하인들이 있는 부잣집 셋째며느리로 시집가서 이야기 좋아하는 시부모 만나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이야기책만 읽어 바치며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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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내고 난 뒤 2, 3년의 세월 동안 잘 놀았다는 느낌인데 어느새 새로 창작집을 내게 되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중단편 소설들은 잘 논 시간의 소산인 셈이다. 그런데 교정을 보기 위해 다시 읽어보다 보니 정말 제대로 잘 놀았는지 더럭 의심스러워졌다. 가령 산에 가서 논다 할 때 아래쪽 풍광 좋고 물 좋은 계곡에서 마시고 노래하며 노는 것도 있고 산 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노닐 수도 있고 사력을 다해 정상을 정복하는 것도 있으며, 정상에 미치지 못하고 지쳐떨어지며 노는 방법도 있다. 각자 취향에 맞게 놀면 될 일이다. 나는 정상보다는 정상 바로 바로 아래쪽 구할쯤 되는 곳을 목표로 마음과 몸에 알맞고 흡족할 때까지 가는 쪽인데 문제는 여기에 들어 있는 소설들이 백퍼센트 내 몸과 마음에 알맞고 흡족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랴, 여기에도 ‘구할의 원칙’이 있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소설을 쓰면서도 어떤 구할의 수긍할 수밖에 없는 구할의 묘한 구할(정상×0.9×……×0.9)로 연속되는 어떤 궤적을 따라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구할의 행진 끝에 마지막 결과가 처음 출발할 당시의 모습을 잃을 정도로 순도가 낮아진다면 그 길은 끝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인가? 그런 걸까? 2005년 1월 성석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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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서사전략과 개성적인 소설언어로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성석제 스타일'을 펼쳐온 작가 성석제(成碩濟)의 신작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2002년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후 3년여 만으로 작가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독자와 평자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며 그해 언론에서 새뚝이로 선정된 바 있다.
이번 소설집은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내 고운 벗님」을 포함, 3년여 동안 발표한 아홉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기성의 통념과 가치를 뒤집는 화려한 수사와 "웃음의 모든 차원을 자유자재로 열어놓는 말의 부림"으로(정홍수)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각양각색 인물들의 삶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표면에 드러나는 유쾌한 재미와 해학, 풍자 밑에는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통찰이 번뜩이기도 하고 그리움이나 인간을 향한 건강하고 따뜻한 시선이 은근히 깔려 있어 읽는 이에게 독특한 감동을 선사한다. 성석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농담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놓으며 "마치 무협지의 고수들처럼"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입담을 펼친다.(문혜원) 이러한 거침없는 활력은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잃어버린 인간」의 화자는 소설가이다. 소설가인 화자는 재당숙모의 부음을 듣고 찾아간 고향에서 재당숙 이봉한의 두 아들 쌍둥이가 굶어죽었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소설의 한가운데 액자처럼 들어 있는 재당숙 이봉한의 일생,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한 인물의 삶을 풍문에서 건져 실제 인간의 모습을 찾아내려 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긴 세월의 망각을 뚫고 어린시절의 자신의 철없는 폭력과 다시 대면하는 장면은 읽는 이에게 진기한 울림을 준다. 「내 고운 벗님」은 '건국 이래 최대 국방사업의 에이전트'라 알려진 거물급 '대위'가 한 시골마을 '장안'에 낚시를 하러 오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 대위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려고 온몸이 노곤해지도록 자발적인 봉사를 했던 '이중사'와 '장낚시'는 대위가 사나운 욕설과 거대한 쓰레기더미만 남긴 채 황당하게 떠나버리자 충격에 휩싸이지만, 이내 "미쳤어도 가주니 참말로 고맙지라" 하며 덤덤하게 넘긴다. 이러한 한바탕 소동 안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야유이자 은근한 풍자가 배어 있다. 「소풍」의 화자 '정대'는 독선과 허세로 무장한 속물지식인 박중현의 환멸스러운 자태를 곱씹다가 박중현의 고향마을에서 식당 노인을 만나고 박중현류의 인간이 키워지는 토양에 대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많은 양반가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 무시당해서는 안되고, 싸움을 걸어오면 절대 피하지 않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증명을 해야만 하는 법. 정대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작가의 촉수는 우리 삶의 속물적 속성을 건드린다. 「본래면목」은 삶의 진창에서 노니는 사이비 예술가 '황봉춘'과 병 요양차 시골에서 살고 있는 화자의 알 듯 모를 듯한 교류와 요란한 활약상을 작가 특유의 해학 넘치는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다. '강산'이라는 고장에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 '남산만' 총경을 둘러싼 소동을 그린 「만고강산」, 부에 대한 허망한 집착과 욕망을 보여주는 「인지상정」, '미시타 숑'이라는 미묘한 인물을 통해 "성석제식 인간탐구의 특이한 국면"을 보여주는(정홍수) 「너는 어디에 있느냐」, "유년기 시골학교 축구팀에 대한 현란한 수사학 밑에 투명한 그리움이 흐르고 있"는(김윤식) 「저녁의 눈이신」 등은 우리 일상의 낯익은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법한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을 작가 특유의 활력과 해학, 페이소스에 버무려 그려낸 흥미진진한 작품들이다. 이번 작품집에서 작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장기와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하나의 이야기와 또다른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교차시키며 유려하게 텍스트를 직조해내고 있다. 그 유려함으로 눈에 띄는 작품이 표제작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이다. 이 소설에는 보름달이 환한 늦가을 밤, 베틀을 가운데 두고 길쌈하는 어머니와 그 앞에서 어머니를 위해 고전소설 『추풍감별곡』을 읽어드리는 맏딸 재희가 등장한다. 어머니의 마음은 혼기에 이른 맏딸 재희에 대한 걱정과 장에 간 남편과 아들에 대한 염려로 가득하고, 고전소설 『추풍감별곡』의 이야기가 그 안에 스며든다. 소설에 삽입된 『추풍감별곡』의 내용은, 김진사의 딸 채봉과 선천부사의 아들 강필성이 서로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벼슬에 눈이 어두운 김진사가 딸 채봉을 허판서의 첩으로 주려고 하여 채봉이 평양 기생이 되는 등 두 남녀가 갖은 고난을 겪는 부분이다. 고전소설 속 인물들의 정한과 재희네 가족사가 교차되고 어머니의 상념이 베틀의 움직임과 함께 다시 이야기에 녹아든다. 소설은 장에 갔던 아버지와 아들이 수레를 밀고 끌며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군더더기 없이 잘 짜여진 이야기와 깊은 모정, 전통적인 가락에 담긴 그리움과 비(悲)의 정서가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작이다. 내성의 틀에 갇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가는 오늘의 우리 문학판에서 성석제의 건강한 웃음과 개성있는 서사는 단연 빛을 발하는 활력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