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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없는 봄 세 개의 대문에 관한 꿈 K읍의 싸움법 바람의 신탁 부드러운 환멸 시작되면서 사라져가는 것들 해설 ㅣ 아버지의 귀환과 새로운 역사성의 발명 - 류보선(문학평론가.군산대 교수)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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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 Hui Gyeong,殷熙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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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유난히 가물고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는, 농사에 결코 이로울 리 없는 기후 특징 외에 아무런 특산물도 절경도 없는 K읍을 지나치며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척박하고 군색한 고장이라는 인상을 받게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목 밑까지 치밀어오르는 멀미를 참기 위해 잔등이 벗겨진 붉은 산벼랑을 노려보면서 악명 높은 곰치재를 넘어 겨우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여행자라면 자신을 맞이하는 읍내의 초라한 행색에 심란하고 허탈한 심사가 되는 걸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여인숙과 약국과 잡화점의 간판들은 어디선가 곧 바람이라도 불어닥칠 것처럼 을씨년스러워보였으며 그 너머로는 좁은 골목들 사이로 녹슨 함석지붕과 양철대문들이 웅숭그리고 있었다. K읍에서는 눈길을 멀리 두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망연히 고개를 쳐들었다가는 당장 처마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낮은 산들에 시야가 가로막히곤 했으므로 그때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산들은 마치 늙고 피곤한 장돌뱅이들이 봇짐에 기댄 채 아무렇게나 끼어앉아 쉬고 있는 봉놋방 봉창에 비친 그림자 같았다. 여행자들은 K읍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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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삼 년 만에 은희경이 새 소설을 선보인다. 자신의 여덟번째 책이자 다섯번째 장편소설 『비밀과 거짓말』. 95년 등단 이후 일 년에 한 권꼴로 새 책을 선보여왔던 작가라는 점에서 꽤 오랜만의 작품이라 할 만하고, 그만큼 이 소설에 시간과 공력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이 작품을 자기 소설세계의 전환점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새의 선물』 이후 십 년, 삶과 죽음의 모든 중량을 담은 은희경 소설의 새로운 풍경 이 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2003년 여름부터 2004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을 탈고하기까지 일 년을 다시 매달렸다. 연재 시작부터만 따져도, 책을 묶기까지 꼬박 이 년여를 이 작품에 바친 셈이다. 그 시간의 무게 탓일까, 이 작품은 기존의 은희경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이전 작품들이 경쾌함과 발랄함으로 다가왔다면, 이 소설은 산고의 무게 이상으로 무겁고 깊게 다가온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공들인 문장과, 그 문장들 사이의 긴장, 그리고 행간의 밀도 역시 깊고 치열해졌다. 작품을 읽다가 문득, 이게 은희경 소설 맞아, 하는 느낌이 들 만큼 작가는 또다른 소설세계로 진입해들었음을 감지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다르기만 한 건 아니다. 작가의 특장이라 꼽혀온 생에 대한 직관과 통찰력은 더욱 세밀하게 벼려져서 내장되어 있다. 이전에는 그것이 작품 전면에 드러나 있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마치 철삿줄 같은 낭창낭창하고 질긴 그 특유의 힘이 유려하고 섬세한 문체 안에 숨어 있다.” 이 소설을 미리 읽은 작가 임철우의 표현을 빌리면, “스케일부터가 다르다. 작가의 야심이 확연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은희경이 이 년여를 이 작품을 붙들고 추구한 것이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더욱 깊은 지층과 더 넓은 지평을 지닌 소설세계임을, 작가가 끝내 자기 소설 속에 받아안고자 하는 것이 삶과 죽음의 모든 중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타인’에게 말 걸었던 은희경, 자신에게 말을 걸다 “소설이란 소설가의 현재이다. 이야기 속에서 과거를 끌어냈든 미래를 상상해놓았든 간에 거기에서 삶을 읽어내는 것은 현재의 눈이다.”언젠가 작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비밀과 거짓말』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현재는 어떤 것일까. 작가를 평단과 독자들에게 한번에 각인시켰던 작품 『새의 선물』과 경쾌한 필치로 그려낸 동갑내기 남자들의 성장기인 『마이너리그』에 이어, 이 작품 『비밀과 거짓말』 역시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예의 두 작품이 ‘스스로 성장을 멈추었다’는 열두 살 애어른 진희를 내세우고, 내내 ‘마이너리그’로 살아야 했던 ‘58년 개띠’ 남자들을 내세우며, 작가 자신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삶과 성장에 대해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면, 이 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작가가 직접 삶을 마주하고, 작가 자신을 대면하고, 정색을 하고 쓴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작게는 영준과 영우 형제의 갈등과 화해의 이야기이며, 확장하면 두 형제와 아버지 정정욱의 이야기이며, 다시 넓어져 아버지 정욱과 할아버지 정성일, 또다시 정씨 집안과 최씨 집안의 이야기이고, 다시 K읍의 이야기이고, 그리고 작가 은희경의 이야기이다. 그 안에는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있고, 사랑과 운명의 이야기가 있고, 공간과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 스스로도 “어지간히 할말은 다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비밀과 거짓말』에는 은희경이 작가생활 십 년 동안 쌓아온 내공의 힘, 내내 누르고 삭이고 벼려왔던 세상과 삶의 무게와 ‘진실’ 그리고 ‘비밀’이 모두 들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