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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 이별 / 편지 / 도움 / 대화 / 이별/ 만남전야 / 만남
에필로그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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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거 바라는 것 없다. 내가 이제 네 몸을 고칠 수 있으니 그저 오래오래 살아줘라. 오래오래 살아서 한집에서 한솥밥 먹으면서 살아보자. 그 이외에는 내 절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소리를 내야만했다. 고맙다는 말이라든가 혹은 잘 살아보자는 말을 꺼내려 했다. 말할 시간을 놓칠까 서둘러 큰 숨과 함께 말하려 했다. 그는 기다려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녀는 보기 좋게 때를 놓쳤다. “내 너에게 순정을 바칠 것이다.” 그의 말이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나보다. 아득한 정신이 서슴없이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까와 같은 다짐도 없이 태연하게 단단한 음성을 전했다. “오라비. 내 모든 순정을 오라비를 위해 바치겄소.” 사랑한다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거대한 의미의 단어. 바로 순정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pp.34-35 소록도를 들어온 사람들은 시간이 있을 때면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 했다.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 각자 달랐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같이 가족이 있었다. 정이 넘치는 동네에서 살았다. 그리고 한센병에 걸렸다. 한센병이 걸리고 난 뒤 이야기는 어찌된 영문인지 공통점을 떠나 무슨 판박이마냥 똑같았다. 몇 대에 걸쳐 동고동락한 이웃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가족들도 다를 바 없었다. 살았던 집들은 불태워졌다. 아주 가끔 운이 좋은 사람들은 정상인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왔다. 더 운이 좋은 사람들은 아내나 서방이 따라와 살아주기도 했다. 사실 한센병에 걸린 가족을 따라 나서는 행동은 가족들이 원한 일이 아니었다. 환자에게는 운이 좋을지 몰라도 정상인인 가족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한센병에 걸린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쫓겨나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가기 싫어도 따라가야 하는 선택은 강요였다.---p.91 서수철이 떠올랐다. 그저 그를 구하기 위해 돈을 벌고 싶었다. 아니, 사실 그가 왜 끌려가야하는지도 타당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총칼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쓰이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다는데, 더군다나 조선을 침범한 놈들이 달라하는데 태연하게 쇠그릇을 주는 일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일 남자들이 가족을 지키려는 데 침범을 해서 죽이려는 일본의 행동을 최소한의 양심으로 막고 싶었을 뿐이다. 죄악을 저지르지 못한 아비일 뿐이었다. 악마가 아니라서 그리 행동한 것뿐이었다. 누군가를 살리고픈 사람다운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구타당하는 모습에 분노해서 몇몇의 악마들을 붙들고 말리는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당한 행위가 죽을죄가 되어버렸다. 내 나라를 침범한 일본을 위해 총칼을 들어야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혼자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장에 들어가려했다. 공장이라고, 분명 공장이라고 말했다. 동네 이장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만나온 사람들 전부 다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 함께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처자들도 하나같이 공장에서 일을 한다는 말만을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이 처녀였다. 이런 끔찍한 일을 알고 떠나온 처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pp.119-120 “독립군과 같이 싸우는 것만이 독립운동이 아니야. 여기에서 나는 또 다른 독립운동을 시작할거야. 맞는 거 따위 두렵지 않아! 비록 반항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할 테지만 끝까지 버텨낼 거야. 버텨내는 게 우리가 이기는 거야. 그래서 꼭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공부를 할 거야. 서양 말과 글을 배울 거야. 전 세계의 글을 다 배워서 일본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자행했는지 알릴거야. 분명 일본은 패망할거야. 확실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공격하고 있어. 일본은 외톨이야. 수많은 나라들과 독립군이 일본을 패망시킬 테지만 그 뒤가 중요해.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일들을 알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야해.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하춘희의 이야기는 처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 처자가 “나도 글을 배울래”라고 말했다. 한번 터져 나온 다짐의 말은 위안소 안을 강한 열정과 의지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각자의 중얼거림 들이 이어졌다. 조금씩 다른 말이었지만 하춘희가 꾸는 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위안소에서 작지만 큰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pp.145-146 그분과 나는 서로 알고 있었어. 내가 위안부로 갔다는 사실, 그분이 한센병이라는 사실. 서로 알고 있었어. 서로가 알고 있는 걸 알면서도 서로 모른 척 혔어. 굳이 우리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됐으니께. 거짓 편지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행복했어. 평생을 서로 모른 척 살아갈 거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않았으니께. 이해할 수 있으려나, 그게 바로 순정이여---p.171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누구라도 나같이 행동하는 게 정상이니까요. 차라리 나를 응원해주세요. 그리고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어요.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 꼭 아버지와 이모와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시대가 변하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이해하겠죠? 그때까지는 살아남아주세요. 우리의 억울하고 원통한 이야기를 만천하에 들려주세요. 오라버니만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모든 걸 오라버니에게 맡기고 떠나는 우리를 용서하세요.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따위는 버리세요. 앞으로가 더 험난하고 힘들 거예요. 우리는 가짜 낙원인 소록도가 아닌 진짜 낙원으로 미리 가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홀로 싸워나가는 오라버니를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게요. 외로워 마세요. 아버지와 이모와 내가 늘 곁에 있을 테니까. ---p.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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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각인해야 할 역사가 담겨 있는 책이다. 나는 고스란히 젖어드는 슬픔에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꺼이 우리 후손들이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기록들을 읽노라니 심장은 더 격하게 요동쳤다. _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의 추천사 중에서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 슬픔은 하나의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가슴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잊지 못할 이름들, 지우지 못할 기억들…. 그리고 그 안에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희망도, 나를 믿어준 친구들이 준 소명도 있다.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은 보물 같은 순간, 힘겨운 삶속에서 슬픔조차 흡수하는 법도 배우지만 살아있는 역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믿음이 우리 고통을 덜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믿음이 우리를 악에서 보호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오롯이 누군가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이 옳은 것이고, 그것이 행복한 것인지 모를 수 있다. 믿음이 죽음이라는 공통된 운명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수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변화의 가능성, 깨달음의 가능성, 그리고 살아야할 이유까지. 어찌 보면 아침드라마에서 보는 신파처럼 남자는 강제징용에 천형(天刑) 같은 한센병까지, 또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남자를 기다리던 여자는 위안부로. 이렇게 기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이들의 엇갈린 운명은 우리 역사가 빚어낸 슬픈 현실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들을 위한 전쟁도 아닌 타국의 야욕에 희생되고 싶었을 것이며, 누구나 오순도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을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너무 간절하여 70년이 넘는 시간 내내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재앙처럼 충격을 주는 책, 깊이 슬프게 만드는 책!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을 닮아서 소록도라고 이름 지어진 장소. 그러나 이름과 달리 고립무원의 그곳에선 식민지배의 국민인데다, 천형 같은 나병까지 짊어진 이들이 살고 있었다. 병을 앓는 환자들의 고통에, 가족 곁에 있겠다고 남은 그들의 가족까지 감내해야할 고통은 아름다운 섬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 수 있었고, 때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었다. 공장에서 일을 해 헤어진 정혼자를 구하겠다고 나선 소녀가 이름 모를 곳에서, 그 소중한 모든 것들을 참혹하게 빼앗기고, 선물 같은 죽음을 기다리는 때가 있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었고, 그 안에서 그리움과 기다림이라는 것이 인연을 맺는다. 그렇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의 가슴속에 있는 순정을 믿는 것이다. 하나, 둘 소중한 사람들이 생기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생기고…. 그 이유가 운명처럼 느껴질 때 그들에게 닥친 가혹한 현실은 우리시대가 잊지 않고 직시해야 하는 역사의 모습이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할 소명이다. 이제 우리는 평생 순정을 간직한 이들의 애틋함에, 별 하나하나에 친구의 이름을 새기며 묵묵하게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끊임없는 부드럽지만 강한 용기에 가슴에서 우러난 박수를 보낼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