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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행복과 “행복”: 미소의 편지를 보내며
1_ 나 자신의 행복을 일구는 연습 삶의 축제,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살아있음의 예식, 쓰기 그의 이름은 ‘가아스’ 홈리스와 하우스리스의 경계에서 삶의 정원 가꾸기 조약돌의 철학 존재하는 것은 행복해야만 한다 ‘FM-모드’에서의 삶의 축제 편지 쓰는 존재, 인간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한계 상황’을 마주하며 빵과 커피, 진정성의 내음 진정성 실종 시대, 인간으로 산다는 것 삶은 물음표다 2_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연습 ‘마음속 책상’을 꾸리는 용기 라면 한 냄비와 미소의 선물 두 종류의 나이: 몸의 나이와 정신의 나이 다가올 우정을 향한 초대장 고독은 나의 고향 ‘존재의 부채’를 안고 사는 삶 좌절과 절망감, 삶의 동반자로 다양한 생명들과의 만남 존재함의 용기 왜 쓰는가: 존재 방식으로서의 쓰기와 읽기 행복을 가꾸는 시시포스 포옹, 그 몸의 언어가 상징하는 것 장미는 ‘왜’가 없다 ‘함께’ 웃지 못하는 병 살아감에 대하여 배우기 3_ 동료-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 인간이란 누구인가: 인간의 두 얼굴 그런 ‘신’은 없다 발화 주체는 누구인가 버팀의 철학 ‘시대의 스승’이란 없다, 동료-인간이 있을 뿐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내가 춤출 수 없다면 우리는 ‘생존 기계’가 아니다 나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의 정치학 나의 ‘재산’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생존자’다 의미로운 삶의 조건, 치열성과 자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 홀로-함께 내가 만드는 선택들이 바로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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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을 판가름하는 나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 있다. (중략)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그의 얼굴에 지순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 순간들을 일상 세계에서 가지는가. 자신의 몸과 정신과 마음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타인과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외부 세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나다(I am who I am)’의 철학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가. 복합적 의미의 ‘아름다움(the sublime)’에 대한 갈망과 열정을 품고, 그 갈망을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추구하고 있는가.
--- 「삶의 축제,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중에서 노숙인으로만 기억하던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보고, 고유명사인 이름을 알게 되면서 그는 내게 더 이상 ‘노숙인’이라는 ‘이슈’가 아니다.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인, 고유한 얼굴을 지닌 ‘인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 “인간의 ‘얼굴은 윤리적 자리’이며 얼굴에서 윤리가 시작한다”의 심오성을 구체적인 일상 세계에서 다시 상기하게 된 만남이었다. 각각의 인간 그 개별적 얼굴의 존엄성을 보지 않고 법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개별적 얼굴에 따스한 시선을 두지 못하는 자들이 내미는 정의와 평등을 나는 신뢰하지 못한다. --- 「그의 이름은 ‘가아스’」 중에서 우리는 흔히 집 없이 사는 사람을 ‘홈리스’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로 ‘홈(home)’과 ‘하우스(house)’의 개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이가 ‘홈’과 ‘하우스’를 상호교환적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이 둘은 개념이 다르다. ‘하우스’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다. 그러나 ‘홈’은 우편번호가 아닌, 살아내는 공간(lived place)이다. 내가 소외를 경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가 포용되고 편안함을 느끼는 삶의 조건이 바로 ‘홈’이다. --- 「홈리스와 하우스리스의 경계에서」 중에서 내가 마음이 무거울 때 종종 하는 일이 있다. 바로 ‘편지 읽기’다. 내가 수신자인 편지도 있고, 다른 사람이 수신자인 편지도 있다. (중략) 내가 읽는 편지들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 공간(in-between space)에서, 또 사적·공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심오하고 풍성한 내면의 결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그 편지들을 꺼내 읽으며 절절한 마음들을 만난다. 누군가에게 이러한 마음을 편지로 쓰는 것은 결국 ‘자신(self)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 세계에 품고 있는 갈망, 고민, 희망 등을 글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다. --- 「편지 쓰는 존재, 인간」 중에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은 언제나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적 심연을 접하게 한다.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목도는 ‘그들’만이 아니라 ‘나’의 다가올 죽음을 연결하게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문득 인식하면서, 도대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투병을 하다가 죽음을 맞은 자신의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쓴 회고록 《아주 쉬운 죽음(A Very Easy Death)》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자연적 죽음이란 없다. 죽음이란 영원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투병의 과정조차 없는 돌연한 죽음이나 자살 같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죽음은 주변 사람 모두에게 ‘한계 상황’을 경험하게 한다. --- 「‘한계 상황’을 마주하며」 중에서 〈쇼생크 탈출〉의 원제가 ‘쇼생크 구속(The Shawshank Redemption)’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탈출’은 물리적 감옥으로부터 ‘벗어남(escape)’을 의미한다. 그 벗어남의 행위 자체가 어떤 ‘존재론적 가치’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원제에 있는 ‘구속(redemption)’이라는 개념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종교·철학적 의미를 담은 개념으로 확장한다. 즉 물리적 감옥에서의 탈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인간에게 ‘구속적 의미’를 지닌다는 심오한 해석을 전달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는 다양한 ‘감옥들’이 있다. 감옥으로 상징되는 ‘제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제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듯 당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매일매일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쇼생크에 울려 퍼진 아름다운 아리아처럼 일상을 넘어서게 하는 그 무엇을 만날 때, 비로소 자신의 인간됨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 「진정성 실종 시대, 인간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한국, 독일, 미국, 영국, 이렇게 네 나라에서 살아 온 나는 삶의 여정에서 무수한 ‘떠남’을 해야 했다. 익숙한 곳을 떠날 때, 익숙한 물건들을 버리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이 떠남과 도달함이란 언제나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임을 나는 조금은 안다.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구하고자 했던 가구는 책상이었다. ‘책상’이란 나의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가 만나는 ‘존재의 공간’이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실용적 가치만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닌 ‘상징적 은유’이기도 한 것이다. --- 「‘마음속 책상’을 꾸리는 용기」 중에서 내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시간을 낼 때, 그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타자나 사물에 호기심이 담긴 질문이 별로 없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야 할 때다. 어떠한 질문을 품고 있는가가 그 사람을, 그리고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질문이란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세계를 가꾸는 호기심과 열정을 구체화하는 사유, 읽기, 고민 등을 통해 만들어진다. (중략) 소위 ‘훌륭한 학자’라도 함께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질문이 없는 경우가 있다. 같이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오는 질문만 받을 뿐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내게 젊음을 상실한 사람이다. 또 관계에 대하여 매우 무책임한 사람이다. --- 「두 종류의 나이: 몸의 나이와 정신의 나이」 중에서 “오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에서 말하는 그 ‘없는 친구’란 무엇인가. 이 구절은 한편으로는 마음 아픈 한탄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의 선언이기도 하다. ‘진정한 친구, 진정한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기다림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결단의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상투적인 소위 ‘친구’라는 관계망을 넘어, 단 한 명이라도 ‘진정한 친구’와의 우정을 향해 부단히 갈망을 품어야 한다. 그렇게 ‘다가올 친구(friend-to-come)’와의 만남을 창출해야 한다는 선언인 것이다. --- 「다가올 우정을 향한 초대장」 중에서 나는 앞마당에 있는 나무를 밑동만 남겨놓고 모두 잘라버린 적이 있다. 이제 그 나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두 달 반 정도 지나니 놀랍게도 가지가 자라고 소담한 꽃까지 피우는 게 아닌가. 이 나무를 보면서 우리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고, 밑동까지 잘려 나간 나무처럼 아무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조금씩 자라 가지를 뻗치고, 꽂을 피우는 것처럼, 다 끝난 것 같은 우리 삶에 예상하지않았던 ‘꽃’을 피워낼 수 있다. --- 「행복을 가꾸는 시시포스」 중에서 말과 글의 언어만이 아니라 몸의 언어를 통해서도, 우리는 지지와 인정을 나눌 수 있다. 포옹이라는 ‘순간의 경험’일지라도 그 순간의 경험을 부여잡고 척박한 일상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힘과 삶의 에너지를 끄집어내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포옹’이 필요한 존재다. 또한 누군가를 ‘포옹’하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포옹이 상징하는 것은 그 존재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인정’, 그리고 당신의 아픔에 함께하고 무엇을 하든 응원하겠다는 ‘지지의 몸짓’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를 작동시켜서 다른 존재를 ‘포옹’한다. 이 사실은 포옹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살아감이란 결국 ‘함께 살아감’이다. 포옹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인정하고, 지지하는 함께 살아감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몸짓인지 모른다. --- 「포옹, 그 몸의 언어가 상징하는 것」 중에서 얼마 전 타계한, ‘시대의 스승’으로 호명된 모 교수에 대한 뉴스 기사를 보았다. 그는 평생 자신의 서재에서 살았고 서재에서 읽고 쓰기만을 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를 이 ‘시대의 스승’이라고 호명할 때, 많은 이가 ‘학자로서의 삶’과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마치 상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중략) 일생 글쓰기와 읽기만을 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를 ‘스승’으로 삼고 살아감의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또 그의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은 누가 감당했을까. 그가 먹는 매일의 세 끼 식사는 누가 준비했으며, 그의 옷은 누가 빨고, 그의 서재는 누가 청소했을까. 그는 시장에 가서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끝도 없이 필요한 물건들, 음식들을 사 본 적이 있을까. --- 「‘시대의 스승’이란 없다, 동료-인간이 있을 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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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새로운 질문
그대는 언제, 누구와, 무엇을 할 때 ‘미소’ 짓는가? 이 책은 대명사가 아닌 이름을 부르는 ‘호명’ 행위로 나와 너의 존재를 드러내는 강남순 교수가 ‘행복’을 주제로 펴낸 철학 에세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철학자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이 세기를 넘나들며 다양한 정의를 시도했지만 끝내 결론짓지 못한 영원한 주제다. 사람마다 행복을 경험하는 순간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다양한 행복을 정의하는 대신 각각의 독자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도록 안내한다. “지순하고 환하게 웃는 순간을 누리고 있는가, 몸·정신·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나는 나다’의 철학으로 살고 있는가, 행복의 갈망을 품고 용기 있게 추구하고 있는가?” 여기서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이나 금전 같은 기준은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안정된 직업과 수입, 그리고 본인과 가족의 건강, 성공 등 가시적 조건들이 행복의 구성요소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깊은 내면의 자신에게, 그리고 나와 이 삶의 여정을 함께 걷는 이들에게 미소가 되는 그 행복감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보는 시선,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 존재의 깊이에서 품는 반가움과 인정, 그리고 환영의 ‘미소(smile)’ -그 미소가 설사 ‘순간의 경험’이라 해도-, 이런 경험들은 한 사람의 삶에서 소중하고 다양한 결을 이루고 있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에서 ‘미소’는 행복을 사유하는 가장 큰 메타포이다. 내가 어느 순간, 누구와 함께할 때, 또 무엇을 할 때 진심으로 미소 지었는지 돌아보도록 이끄는 것이다. 미소가 행복을 판가름하는 절대적 기준이나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질문하도록 안내하는 커다란 길잡이임은 분명하다. 나와 함께하는 행복, 너, 그리고 동료-인간과 함께하는 행복 이 책은 총 3개의 ‘행복의 대상’이 있다. 나, 너,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 살아가는 세계다. 누구와 함께할 때 행복해야 하는가? 첫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 나와 우정을 쌓는 것을 진지하고 깊이 있게 다룬다. 행복은 ‘행복하겠다는 의지이자 용기’라고 말하는 저자는 어떻게 나의 행복을 가꾸고 만들지 스스로에게 묻고 끊임없이 결심해야 한다고 전한다. 음악을 듣고, 보름달을 보고, 거리를 거닐고, 글을 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저자는 자기 자신과 ‘함께한’ 경험을 독자에게 나눈다. 그리고 고립이 아닌 자신과의 성찰의 시간, 즉 고독을 진지하게 사유한다. 이는 나를 ‘통째로’ 끌어안는 연습이자 죽음까지 동행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두 번째 행복의 대상은 ‘너’와 이 ‘세계’다. 친구나 연인, 이웃 등 타자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또 동료-인간들로 구성된 이 세계가 불행하다면 그 세계에 속한 ‘나’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이 책에는 수많은 ‘너’가 등장한다. 가까운 친구부터 스쳐 지나간 이웃까지, 그리고 멀리 있지만 연결된 수많은 동료-인간이 호명된다. 그 수많은 ‘너’들과 이야기하고, 미소 짓고, 포옹하며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연습을 안내한다. 또한 그 정원을 넓혀 이 세계를 보다 낫게 만드는 여러 방법을 탐구한다. 인간의 살아감이란 결국 ‘함께 살아감’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지지와 인정, 포용 등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복의 몸짓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쉽게 읽히고 묵직한 성찰을 남기는 철학 에세이 일상 위에 펼쳐진 자크 데리다, 한나 아렌트, 에밀 시오랑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일상에서 길어올린 다양한 경험 위에 현대 철학을 펼쳐 놓았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자크 데리다, 악의 평범성을 세계에 알린 한나 아렌트, 20세기 니체로 불리는 에밀 시오랑 등 현대 철학자의 다양한 철학을 오늘의 현실에 대입했다. 저자의 평범한 일상 위에 현대 철학을 접목한 이 책은 무겁지 않으면서 깊이를, 쉽게 읽히면서 오래가는 여운과 성찰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