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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더 향기
서하진
문학동네 200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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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라벤더 향기
2. 모델하우스
3. 기차가 지나는 마을
4. 불륜의 방식
5. 개양귀비
6. 스케이드보드를 타는 남자
7. 회전문
8. 무월의 시간
9. 종소리
10. 저만치 누군가가 보이네
11. 해설 / 삶의 모욕을 견디는 불온한 사랑 / 백지연
12. 작가후기

저자 소개 1

1960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4년 『현대문학』 신인상에 단편 「그림자 외출」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라벤더 향기』 『비밀』 『요트』, 장편소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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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03쪽 | 148*210*30mm
ISBN13
9788982813061

책 속으로

여자는 충동적으로 눈에 보이는 몇 개인지 모를 분무기들의 향을, 바닥이 난 용기들이 일제히 바람 새는 소리를 낼 때까지 뿌렸다. 라일락과 장미와 라벤더 향을 머금은 작은 입자들이 여자의 얼굴에, 어깨에 천천히 내려앉아 스며들었다. 여자는 가만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자의 잠옷 자락에 쓸려 그네가 흔들리고, 새가 어여쁜 소리로 울었다. 여자는 벤자민 잎을 마른 손으로 훑어 내렸다. 사라지지 않는 플라스틱 물방울이 여자의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미지근한 물방울을 움켜쥐고 여자는 아침이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흰 레이스 잠옷을 입은 여자의 눈꺼풀 위에 깨끗한 햇살이 내려앉아도 여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유리 안쪽에 날아가지 못한 향기가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이내가 낀 듯 부연 공기 속, 루픈 나무 사이에서 여자는 죽은 듯이 깊은 잠이 들었다. 여자를 잠재운 것은 엄청난 양의 다양한 향기, 이제는 악취로, 숨을 쉬기 어려운, 부글부글 무언가를 끓일 수조차 있을 듯한 가스로 변해버린 그 냄새였을 것이라고, 이 여자를 발견한 남편은 말했다.

--- p.32---pp.5-20

나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그를 다시 버리기를. 그저 스쳐가는 바람처럼 그의 곁을 지나가고 그가 다시 기진해 돌아오기를.

--- p.52

꽃은 아름다웠지만 꽃을 파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막 받아와 우아한 향기를 뿜는 꽃일수록 질 때의 냄새는 고약했다. 물이끼 낀 양동이 안에서 군내를 풍기며 썩는 꽃의 밑동을 씻어낼 때마다 내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보이지 않게 썩어들어가는 것. 삶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손님이 뜸한 날이면 나는 '자기 앞의 생' '섬' '예언자' 같은 책들을 읽으며 지냈다. 죽은 할머니의 얼굴 가득 향수를 뿌리고 또 뿌리는 모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조금 울었던가.

--- p. 41

그쪽은 길이 없어요, 여보, 막혔다구요, 나무들 사이로 막 모습이 사라지는 남편을 향해 나는 소리를 질렀다. 부대 앞, 길 없음.비스듬히 박힌 나무 팻말을 남편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흰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이 애매하긴 했다. 실은 우리가 지나온 것도 길이라 부르긴 어려웠으므로 다시 돌아갈 길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 p.39

그 여자가 돌아왔어. 남편은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했다. 남편이 내게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밤 그도 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자가 돌아왔다. 그로써 아무런 설명이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의 귀가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취해 흔들리는 발걸음 같은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나는 남편에게 이제 어쩔 생각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묻지 않아도 나는 알았다. 그가 떠나려 한다는 것.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결코 먼저 그 말을 꺼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문제는 나였다. 나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그를 다시 버리기를. 그저 스쳐가는 바람처럼 그의 곁을 지나가고 그가 다시 기진해 돌아오기를.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통장을 헐어 시누에게 건네던 날 그는 내게 말했다.
정말이지 미안해. 당신은 나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 p.52

출판사 리뷰

1994년 <현대문학>으로 당단한 이후 일상 뒤편의 파괴적 일탈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해온 서하진의 세번째 소설집. 서하진의 장처는 주제를 드러내는 소설적 문법의 견고함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견고함은 크게 보아 정제된 문제와 단단한 구성력으로 요약될 터인데, 일상의 아주 작은 사건들을 붙잡고 한발 한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음험한 악의와 비극적 진실 쪽으로 서서히 육박해가는 구성의 힘과 그를 뒷받침하는 섬세한 문체는 서하진 소설의 큰 매력이다. 이번 소설집에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백지연씨는 이러한 서하진의 소설을 두고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상당수의 소설들이 고백체의 글쓰기와 체험의 진정성을 내세우는 것에 반해 서하진 소설은 관찰과 묘사에 의거한 미학적이고 규범적인 글쓰기를 중시한다. 정련된 문학적 비유와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는 서하진 소설이 지닌, 고유한 장기라고 할 수 있다" 고 지적한다.

『라벤더 향기』는 전체 10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작 「라벤더 향기」는 작가의 전언이 가장 깊이 있게 형상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안정된 가정, 일에 빠진 남편, 아래층 남자와의 불륜 등 일쑤 상투적일 수도 있는 소설적 구도는 심야의 뺑소니 사고를 계기로 가차없는 삶의 진상을 향해 달려간다. 그 진상이란, 불륜이라는 껍질 속에 숨겨진 허무하고 텅 빈 사랑의 실체에 다름아니다. 불륜이라고 하는 일탈의 욕망 속에 일상이 은폐시키고 있는 삶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일탈에 깃들인 미망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일탈의 진정성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은 냉정하게 포착하고 있다. 머릿속에 그리는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낯선 남자와의 정열적인 사랑 관계 역시 눈속임으로 더럽혀져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더러움을 깨친 눈으로 일상의 더딘 삶을 돌이키게 만드는 힘이 이 작품에는 있다. 그러고 보면 서하진 소설에 무선 편견처럼 붙어 있는 '불륜 테마'가 기실은 하나의 냉정한 방법론이었음이 드러나는 셈이며, 이것만으로도 이번 소설집의 문학적 의의는 튼실한 것이라 하겠다.

「모델하우스」나 「개양귀비」는 가정이라는 미망에 대한 서하진식 해부학이다. 어린 시절 가족의 흩어짐으로 상처받은 주인공에게 따뜻하고 안정된 결혼생활, 평상의 가정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얻고 싶은 소중한 공간이었다. 남편의 첫여자로 인해 힘겹게 이루어낸 가정을 포기해야만 하는 주인공에게 남는 현실은 단지 '모델하우스'뿐이다.(「모델하우스」) 「개양귀비」에 등장하는 시어머니 역시 신혼 초부터 밖으로만 돌던 남편, 시아버지에게 빼앗긴 아이들 등으로 해서 삶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꽃을 가꾸며 살아간다. 그녀에게 가족, 혹은 가정이란 무엇이었을까. 「불륜의 방식」에는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 채 불륜의 사랑을 감행하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불륜은 일상의 건조함을 견디는 방법이거나 자학의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작가는 불륜의 심각성을 조롱하며 삶의 한편에 그 마땅한 자리를 마련해주고자 하는 듯 하다.

추천평

은 서늘함, 낯선 사람이 집을 잘못 찾아온 일로 한바탕 치정 사건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에로틱하고도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환상, 뺑소니 운전자의 불면과 이어 곧 예리한 보복이 시작될 것 같은 적막감, 토씨 하나만 놓쳐도 이야기 줄기를 놓쳐버릴 것 같은 조바심..... 이런 느낌들에 빠진다는 것을 뜻한다.

숙명적이다시피한 오래된 내면 상처와 극단적으로 단절된 세속 일상이 뒤섞인 이 작가만의 인물들의 비극적인 행로가 만만찮은 읽을거리를 제공하게 한다는 점도 미덕이지고 하거니와, 그것이 치밀한 묘사와 극적 긴장과 어우러져 상당한 수준의 서사미학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에 값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박덕규(소설가)
서하진의 소설에는 고전적인 품격이 있다. 그의 소설은 특유의 단문이 자아내는 서정적인 문체와, 간결하고 절도 있는 설명 속에 성취되는 속도감 있는 짜임새와, 사건과 스토리를 포용하는 시적 분위기를 통해 고전적인 품격을 획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이 땅의 족보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서하진의 이번 소설집은 이같은 특징을 바탕으로 삼사십대로 보이는 여자들, 중년의 나이에 도달한 여자들의 삶을 우리에게 그려 보이고 있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안타까운 기억과 상처, 혹은 주변에 어울릴 수 없는 어떤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들이 그러한 상처와 외로움에 대항해서 저지르는 가슴 아픈 작은 반란들은 그 하나하나가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도덕적 차원의 판단을 벗어나 글썽이는 눈물로 우리의 공감을 호소하고 있다.
홍정선(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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