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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제1부 제1장 서문을 대신하여 제2장 해리 왕자, 혼담 제3장 타인의 죄 제4장 절름발이 여인 제5장 현명한 뱀 작가 소개 작가 연보 책 속의 역사 문화 산책 작품 해설 판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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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 우리는 왜 지금 『악령』을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저마다 ‘정의’와 ‘진보’, ‘대의’를 외치지만, 그 목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거대한 소음이 될 때가 많다. 숭고한 이념이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아름다운 구호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역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목도한다. 인간이 이념의 숙주가 되어버리는 현상, 이것만큼 섬뜩한 일이 또 있을까. 150여 년 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이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한 편의 소설을 썼다. 바로 『악령』이다. 이 책은 단순한 고전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광기를 진단하는 예언서이자, 이념에 사로잡힌 영혼의 병리학 교과서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의 한 지방 소도시를 무대로 삼는다. 이야기는 존경받는 지식인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그는 1840년대 자유주의 이상을 품었던 구세대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스스로를 '박해받는 자'이자 '유배자'로 여기며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도취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이 '박해받는 자', 즉 '유배자'라는 처지를 무척 사랑했다. 이 두 단어에는 한번 그를 매혹시킨 뒤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 자존심을 부풀려 마침내 허영심을 크게 만족시켜주는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일종의 전통적인 광채가 있었다. 이 얼마나 정확하고 통렬한 묘사인가. 스쩨빤은 실제로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지만, ‘진보적 애국자’라는 역할극에 심취해 현실을 외면한다. 그는 숭고한 이념을 논하지만, 정작 그의 삶은 허영과 나태, 카드놀이와 샴페인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다가올 비극의 ‘아름답지만 무력한 아버지’다. 그의 공허한 이상주의가 ‘악령들’이 자라날 비옥한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이 평화로운 도시에 ‘새로운 사상’을 품은 젊은이들이 나타나면서 균열이 시작된다. 그들이 바로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악령’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서구에서 수입된 급진적 사회주의와 허무주의 이념 그 자체다. 이 이념은 인간의 영혼에 깃들어 개인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소설은 이 과정이 얼마나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하게 진행되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 혼돈의 중심에는 두 명의 압도적인 인물이 있다. 스쩨빤의 아들인 뾰뜨르 베르호벤스끼와 니꼴라이 스따브로긴이다. 뾰뜨르는 혁명을 유희처럼 여기는 냉소적인 모략가다. 그는 사람들의 약점과 허영심을 이용해 비밀 조직을 만들고, 유혈 낭자한 소동을 일으키며 파괴 자체를 즐긴다. 그에게 이념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반면 니꼴라이 스따브로긴은 더욱 복잡하고 위험한 존재다. 그는 ‘해리 왕자’라는 별명처럼 귀족적이고 매력적이지만, 그 내면은 텅 비어있다. 그는 어떤 것도 믿지 않으며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의 삶은 동기 없는 기행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악행으로 채워져 있다. 한 예로, 그는 클럽에서 존경받는 노인의 코를 붙잡고 방을 가로질러 끌고 가는 충격적인 행동을 저지른다. 남작이 당시 막 소문이 돌기 시작한 위대한 개혁의 절대적 진실성을 단호하게 확언했을 때,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는 갑자기 참지 못하고 "만세!"를 외치며 기쁨을 나타내는 몸짓까지 했다. (...) 뭔가 잘못되었나 보다. 남작은 희미한 미소를 허용했지만 (...) 거실로 돌아온 바르바라 페트로브나는 (...) 창백한 얼굴로 눈을 번뜩이며 속삭였다: "나는 이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요!" 위 장면에서 스쩨빤의 과장된 몸짓에 대한 바르바라 뻬뜨로브나의 반응처럼, 스따브로긴의 행동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전면적이고 모욕적인 도전이다. 그는 믿음이 없는 시대, 가치가 붕괴된 사회가 낳은 괴물이다. 주변 인물들은 그의 공허한 매력에 이끌려 각자의 이상과 욕망을 투영하고, 그 결과 모두가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이 책을 읽다 보면 150년 전 러시아 지방 도시의 이야기가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현실의 문제 해결에는 무력한 지식인들, ‘대의’를 위해 폭력과 거짓을 서슴지 않는 극단주의자들, ‘좋아요’와 ‘공유’로 자신의 신념을 과시하지만 정작 그 이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서재와 뾰뜨르의 비밀 모임은 오늘날 우리의 광장과 온라인 커뮤니티로 무대를 옮겨왔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념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사회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숭고한 이념일수록 인간을 더 깊은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전 인류의 행복’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서 개인의 존엄성은 아무렇지 않게 짓밟히고, ‘궁극적 선’을 위한답시고 ‘1억 명의 목’을 요구하는 시갈료프의 논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목소리들과 소름 끼치도록 유사하다. 이처럼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악령』은 한순간도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한 서사 능력 덕분이다. 그는 미스터리, 정치 스릴러, 심리 드라마, 부조리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한데 엮어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번역본은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격렬한 호흡과 인물들의 신경질적인 독백, 숨 막히는 대화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덕분에 독자들은 19세기 러시아의 복잡한 사회상을 넘어,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 조건의 심연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악령』은 불편한 책이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혹함, 위선과 광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념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름다운 구호’ 뒤에 숨은 파괴의 논리를 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악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지 성찰하기 위해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있는 독자라면, 주저 없이 이 책의 첫 장을 펼치기 바란다. 이 책을 덮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