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긴이의 말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제3부 제1장 축제 제2장 축제의 종말 제3장 끝나 버린 연애 사건 제4장 최후의 결심 제5장 떠돌이 여인 제6장 분주한 밤 제7장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마지막 여행 제8장 결말 작가 소개 작가 연보 책 속의 역사 문화 산책 작품 해설 판권 |
|
서평
몰락은 어떻게 오는가: 도스토옙스키의 가장 무서운 예언, 『악령』 3부 한 사회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거대한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외부의 충격으로만 몰락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무서운 붕괴는 내부에서, 아주 사소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균열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더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진지한 가치를 조롱하며, 공허한 이념이 광기를 대체할 때, 사회는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바로 이 내적 붕괴의 과정을 해부한 가장 무섭고도 정확한 예언서다. 그리고 우리가 손에 든 이 세 번째 책은, 마침내 그 모든 균열이 합쳐져 거대한 파국으로 폭발하는 현장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악령』 1부와 2부가 다가올 폭풍을 암시하는 불길한 먹구름이었다면, 3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터져버리는 대재앙의 기록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우리 '도'의 지사 부인 율리야 미하일로브나가 야심 차게 준비한 '축제'는 이 파국을 위한 거대한 무대가 된다. 그녀는 이 행사를 통해 흩어진 사회를 통합하고 자신의 진보적 명성을 드높이려 했지만, 그녀의 선의와 허영은 도리어 악령들이 날뛸 판을 깔아주는 결과를 낳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축제의 풍경을 통해 한 시대의 종말을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으로 그려낸다. 축제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지만 속으로는 추문과 소동을 기대하며 들떠 있다. 작가는 꿰뚫어 본다. 혼란의 시대에 가장 먼저 우위를 점하는 것은 선량한 다수가 아니라, 가장 목소리 크고 파렴치한 소수라는 것을. 과도기에는 언제나 이런 쓰레기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이들은 어떤 사회에나 존재하지만 아무런 목적도 없을 뿐 아니라 사상의 흔적조차 없이 오직 불안과 조급함을 표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을 뿐이다. 더욱이 이런 쓰레기들은 거의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소수의 ‘진보분자’ 집단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쓰레기들’과 그들을 조종하는 ‘진보분자’들, 즉 표트르 스쩨빠노비치의 무리가 축제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뜬구름 잡는 거장 작가 까르마지노프의 낭독회는 “맙소사, 이 무슨 헛소리야!”라는 야유 속에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절규에 가까운 연설은 동정과 경멸 속에서 무력하게 흩어진다. 그의 외침은 한 시대의 처절한 유언과 같다. 저는 셰익스피어와 라파엘이 농노 해방보다 더 소중하고, 민족주의보다 더 소중하고, 사회주의보다 더 소중하고, 젊은 세대보다 더 소중하고, 화학보다 더 소중하고, 거의 모든 인류보다 더 소중하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진정한 열매이고, 아마도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열매일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교양이 모든 것을 구원할 것이라 믿었던 1840년대 자유주의자의 순진한 이상은, 이제 ‘구두냐 셰익스피어냐’를 논하는 새로운 세대의 냉소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이념은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오직 더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선동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마침내 한 미치광이 교수가 연단에 올라 러시아를 저주하며 모욕할 때, 군중은 분노하는 대신 열광적인 박수를 보낸다. 몰락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완성된다. 신성한 가치들이 공공연히 모욕당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쾌한 구경거리로 즐긴다. 이 거대한 혼돈의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다. 표트르 스쩨빠노비치와 니꼴라이 스따브로긴. 표트르는 이념을 가진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모든 이념을 경멸하는 냉소주의자이자, 인간의 허영과 공포를 이용해 혼란을 설계하는 탁월한 연출가다. 그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 하며, 그에게 ‘대의’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모든 파괴의 근원적 에너지는 니꼴라이 스따브로긴에게서 나온다. 그는 『악령』의 태양이지만, 빛을 발하는 태양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그는 선과 악, 신앙과 불신, 그 어떤 것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공허 그 자체다. 그의 내면에는 어떤 확신도, 어떤 열정도 없다. 리자베따가 그에게 몸을 던진 것도, 샤또프가 그에게서 러시아의 구원을 찾으려 한 것도, 끼릴로프가 그의 존재에서 신(神)의 가능성을 본 것도 모두 그의 거대한 공허함이 만들어낸 신기루일 뿐이다. 그는 모두에게 신 혹은 우상이 되지만, 정작 자신은 텅 비어 있다. 그가 다리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이 끔찍한 진실을 고백하는 그의 유서다. 내게서는 위대함도 힘도 없는 부정만 나왔습니다. 부정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하찮고 생기 없었습니다. (...) 나는 결코, 결코 자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살해야 한다는 것을, 혐오스러운 벌레처럼 나 자신을 지상에서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나는 자살이 두렵습니다. 위대한 영혼을 보여주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영혼’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하찮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은 그가 뿌린 혼돈의 마지막 마침표이자, 신념 없는 삶이 다다를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이다. 『악령』은 정치 소설의 외피를 두른 심리 소설이자, 한 시대의 몰락을 그린 역사 소설이면서, 동시에 인간 영혼의 구원에 관한 종교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우리에게 묻는다. 신념이 사라진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낡은 가치가 무너진 폐허 위에 우리는 무엇을 세울 것인가? 만약 그 답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 역시 언제든 『악령』의 무대가 될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한동안 깊은 어둠과 불쾌감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겪어야 할 지적, 정신적 홍역과 같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의 ‘악령’을 직시하고, 그것에 맞설 항체를 얻게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150년 전의 파국이 오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 마지막 3부는 그 모든 지적 여정의 화룡점정이자, 우리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시대의 거울이다. 기꺼이 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길 권한다. 그 끝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