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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청일전쟁을 둘러싼 역사 기억 /나카츠카 아키라
청일전쟁에 관한 일본인의 기억 일본군의 첫 번째 공격이 왜 ‘조선 왕궁 점령’이었을까? 도죠 히데노리(東條英?)의 「격벽청담」 어느 대대장의 자살- 환영받지 못한 일본군 02 동학농민전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나카츠카 아키라 ‘동학’이란 무엇인가 조선에 대한 편견이 낳은 동학 사교관 조선왕조 말기의 민중과 서양의 압력 동학은 어떤 사상인가 동학의 확산- 잠행하는 포교에서 집단적 시위운동으로 접과 포 끓어오르는 농민의 대중운동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03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 작전 /이노우에 가쓰오 조선 전역에서 끓어오른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가와카미 소로쿠의 “살육 명령”- 섬멸작전의 서곡 섬멸작전과 대본영·섬멸대대에 대한 파견 명령 연산의 전투현장-한일 공동조사에서 남발되었던 섬멸 명령 어느 일본군 병사의 「진중일지」에서 04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걷는다 /나카츠카 아키라 역사의 현장에 서다 비빔밥이 가장 맛있는 거리와 세계유산 지석묘 ‘사발통문’을 새긴 동학혁명 모의탑 무장(茂長)-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황토재 언덕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의 충격 삼례의 동학농민기념공원 공주를 눈앞에 둔 대격전지 우금티 지금도 계속되는 저항- 연산 보은-동학의 길 장흥-두 개의 기념비 나주-일본군 최후의 몰살 작전의 기지 진도-두개골을 채집했던 장소 대둔산-기록에 남아 있는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이야기하는 것 05 동학농민혁명과 현대한국 /박맹수 광주사건의 한가운데에서 군대에 있었던 나 야학운동의 선두에서 배운 것 민주화운동의 원점인 동학농민혁명 현장 답사를 중심으로 연구 30년 인골방치사건에서 시작한 한일공동연구 풀뿌리 차원의 교류 발전 현대에 살아있는 동학사상 ‘한살림운동’ 내일을 위한 제언 |
井上勝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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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청일전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동학농민군을 주력으로 하는 조선인이 일본군의 조선 침략에 반대해서 일어났을 때, 그 조선인을 상대로 일본군이 몰살 작전을 펼쳤던 전쟁을 말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때, 많은 조선인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현재 거의 없습니다. 청일전쟁의 또 하나의 전쟁인 조선의 항일투쟁,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이 싸웠다는 것을 일본인은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 p.23
동학은 조선왕조 말기 정치적·사회적으로 직면해 있던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를 민중 차원에서 개혁하고 점점 압박해 오는 외국의 압력으로부터 민족적 이익을 지키려고 하는 당시 조선 사회의 역사적 바람을 반영한 사상이었습니다. --- p.39 수만의 조선농민이 희생당한 조선 동학농민봉기와 일본군의 포위 섬멸 작전은 분명히 청일전쟁 후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게 사실은 큰 문제를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사에 다소라도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하는 참모본부의 자세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커녕 대대적인 작전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군사기밀상 병참부의 상황을 명확하게 기술하지 않는다는 등의 핑계를 대더라도, 참모본부가 편찬한 전사에서는 철저히 은폐되었습니다. --- p.61 즉 28일에 시모노세키 히코시마에 있던 미나미 소좌에게 조선 파견 명령이 내려와서 미나미 소좌는 그날 히코시마 ‘수비 교대 준비’를 끝내고 출발, 다음날 제5사단 사령부로 출두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본영이 설영되어 있었습니다. 미나미 소좌가 수비 교대 준비를 하고 나서 그날 출발했다고 하는 것은 그만한 준비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후4시 이전, 즉 대본영의 최고 지도자들이 한성 일본공사관과 인천병참감에 동학농민군 토멸 부대 파견을 타전한 오후4시보다 앞서서 히코시마의 후비 제19대대에 조선 파견 명령이 내려졌던 것입니다. --- p.88 미나미 대대장은 섬멸작전 직후에「 동학당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라는 강화(講話)기록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농민군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원문대로 소개합니다. “장흥(전라도 남부--역자 주), 강진(충청도 서부?역자 주) 부근의 전투 이후 비도를 많이 죽이는 방침으로 한다.” “동학당은 잡는 즉시 죽일 것.” 즉 가능한 한 많은 동학농민을 살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잡는 즉시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 p.111 여행에 즈음하여 늘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걷고 싶었습니다. 우선, 동학농민이 1894년에 봉기했던 전라도라는 지역이 어떤 지역이었을까를 현지를 보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현지를 방문하면 동학농민의 고투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비(碑)와 조각품, 기념탑과 기념관 등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당시 농민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기념상과 탑, 건물을 만들고 있는 현재 한국 사람들의 ‘지금의 생각’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도 중요한 체험입니다. --- p.133 여기에는 올려 보게 되는 탑은 없습니다. 가운데 주탑에는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이라고 새겨진 받침대 위에 사각의 화강암 판으로, 넘어져 있는 동료를 껴안고 죽창을 들고 외치는 농민의 모습이 엷게 새겨져 있습니다. 앞에 소개했던 박준성 씨의 발표에 의하면 이 조각 방법은 1980년대에 자주 쓰였던 민중 판화 양식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같은 달 9일,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연세대학교의 이한열이라는 학생을 일으켜 안은 동료가 전두환 정권에 대하여 화난 눈으로 쏘아보고 있는 사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 p.155 지금 한국 사람들은 자국의 군대가 범한 전쟁범죄의 진상을 해명하고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의 청산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연구자들도 제노사이드 학회를 만들어 진상규명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한국인은 평화와 공생을 실현하려는 생각으로 자국의 부끄러운 과거를 명백하게 밝히는 한편, 불행했던 역사를 명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과제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떻습니까?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 ‘과거의 잘못된 유산’은 자국 사람들에 의해서 청산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p.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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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1일, 광주 상록회관
드넓은 예식홀, ‘한일 시민 교류회’에 참석한 1백여 명의 청중을 향하여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는 강연을 시작했다. ‘제9회 한일 시민이 함께 하는,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의 일본 측 여행단 50여 명을 인솔하고 한국에 온 나카츠카 교수는 성성한 “지금 일본에서는 아베 내각의 폭주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는 강력한 일성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나카츠카 교수는 현재 일본의 극우화 흐름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간략히 설명하고, 그 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는 교류와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나카츠카 교수, 2014년 4월 25일 제7회 녹두대상 수상 특히 나카츠카 교수는 본인이 올해 4월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로부터 제7회 녹두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의 감동을 전하면서 그것은 한국의 시민들이 일본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그 내용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양국 사이의 역사인식을 바로 세워 가는 데 신명을 다하자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흔쾌히 수상을 수락했다고 밝혔다.(이날의 특강 내용은 이 보도자료 말미에 첨부)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기행’은 무엇인가 이제는 한국인에게도 잊혀져가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일본인들의 역사기행이 길게 보아 20년째, 그리고 조직적으로 올해로 9년째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카츠카 교수는 반세기 이상의 시간 동안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데 헌신해 왔으며(나카츠카 교수는 일본 교과서를 바로 잡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모임의 회장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의 역사왜곡이 청일전쟁과 그 속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 정리를 하던 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관점을 가지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올바로 일본 시민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올해 행사의 특징은? 특히 올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2주갑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일본에서는 42명이라는 대규모 견학단이 참가하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또한 일본인의 관심은 ‘전라도 동학’을 넘어 동학의 발상지 경주 용담정 견학을 시작으로, 대구(동학 창도주인 수운 최제우의 순도지)와 남원(수운 최제우가 경전을 다수 집필한 동학의 성지)의 동학 유적지를 거쳐, 정읍과 전주, 논산과 공주 일대 동학 사적지를 돌아보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에게 ‘동학농민혁명’은? 일본인에게 ‘동학농민혁명(전쟁)’은 존재하지 않는 역사이다. 일본인이 기억하는 당시의 동아시아 역사는 오직 ‘청일전쟁’뿐이다. 일본에게 ‘조선(한반도)’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기도 한 것을 전후 사정으로 알 수 있다. ‘청일전쟁(1894-1895)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것(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이를 ‘일본이 저지른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표현한다.)은 동학농민군’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천착하는 데서부터 나카츠카 교수의 역정(歷程)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학’이라는 거대한 동력을 주저앉힌 일본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바로 잡아가자는 희망에서 오늘도 노구를 이끌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그것은 동학 사상과 이념 그리고 그 정신의 미래 지향성, 생명사상 등의 측면을 일컫는 말이다. 무엇보다 나카츠카 교수에게, 그리고 그의 뜻에 공감하여 해마다 한국을 찾아오는 양심적 일본인에게 그것은 한국(조선)의 문제가 아니다. 우경화의 길로 치닫는 일본 정부와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한, 그렇게 해서 일본이 또다시 전쟁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방지하여야만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 속에서 진행하고 있는 장정(長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 또 하나의 청일전쟁』 이 책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또 하나의 청일전쟁』에서 나카츠카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더욱 깊이 천착하게 되고, 특히 이 길에 있어서 학문적 동지인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 한국의 박맹수 교수와 어떻게 연계되고 함께 노력해 왔는지를 밝히고 있다. 또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일본 내에 은폐되고 유폐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료를 발굴하면서 그 속에서 일본군이 그 후 50여년에 걸쳐 저지른 ‘제노사이드’의 원형질을 발견하게 된 과정을 밝히고 있다. 또 박맹수 교수는 1994년 동학농민군 유골 발굴을 계기로 두 명의 일본인 석학들과 교신하면서 스스로 한일 시민 교류의 중심이 되어 갔던 과정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최근 번역 출간된 『일본의 양심이 보는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나카츠카 아키라),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나카츠카 아키라)과 연속된 선상에 있다. 이 책의 출간이 한편으로는 한-일 간의 바른 역사 인식의 확산을 위한 중대한 변곡점을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학’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한국에서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로 확장시켜 가는 디딤돌로서 역할할 것으로도 기대되고 있다.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몰아올 폭풍을 일으킬 나비의 날갯짓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