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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의J.M. Coetzee <동물의 생>으로 시작되는 리스트
부코우스키와 알테 뮤직, 쿠프랭과 프랑스령 콩고, 그리고 콘래드가 놓인 저녁 식탁의 쇼팽과 잠들기 전 여유가 있다면 슈바이처의 <예수의 생애 연구>를 마저 읽을 것 야니네의 교회 내 출처는 어디인가 안녕, 내 예쁜이 미움에 대해서 - 쿤데라의 <불멸> 사랑에 대해서 - 래드클리프 홀의 <너의 존>과 <고독의 우물> 무거움의 깁버을 연주함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함께, 혹은 그 책의 독후감 내 어깨 위의 검은 개 |
裵琇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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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적어도 그래야만 하는데, 내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고백하자면, 단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난 지금 한 마리 당나귀야.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나는 내 존재에 대해서 계속해서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거야. 내 생각은 거기서부터 나왔어.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은 몽상의 시작이야. 그러나 나는 삶이 몽상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네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어. 말했잖아. 나는 오직 굶주림의 기억만을 간직한 눈멀고 귀먹은 당나귀에 불과하다고.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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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작가, 배수아의 장편소설 <당나귀들>이 출간됐다. 초기작에서는 단절되고 버림받은 존재의 아픔을 드라이하게 포착해 냈으나, 최근에는 지적인 분석과 사색, 그리고 관념이 두드러지는 작품 경향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장편소설 <당나귀들>은 지적인 사유의 탐색을 더욱 밀도 있게 밀고 나간 작품이다.
《안녕, 내 예쁜이》 흔히들 문단은 1990년대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들 속에 배수아를 편입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단연 독특한 소설 쓰기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왜냐하면 전통 문학사적 배경과 이데올로기를 비껴나 있는 다소 몽환적인 이미지, 건조함과 냉소로 가득한 문체, 게다가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채 일탈과 방황, 비정상적 상황에 처한 신세대 개인들이 그녀의 작품 속에 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나귀들》― 새로운 시작 그러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2003)으로부터 시작된, 묵언?言과도 같았던 작가적 고민은 《에세이스트의 책상》(2003), 《독학자》(2004)를 넘어 어느덧 《당나귀들》(2005)에게 마구간을 내어주었다. 부암동 허름한 골목길의 스키야키 식당 주변에 모여 살고 있는 “빈곤에 무참히 짓밟힌” 존재의 비루함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과 독일 체류 시절의 기억, 그러니까 ‘나’에게 사색적 글 쓰기를 강요하는 M의 정체를 밝히는 작업에 몰두했던 기록의 산물인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이어 지적인 분석과 사색, 관념을 밀도 있게 밀고 나간 《독학자》의 종점으로 《당나귀들》은 손색이 없을 뿐더러 새로운 시작의 선포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 그간의 작업이 총망라된 듯한 느낌과 더불어 한 단계 올라선 작가적 인식을 날선 문장으로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색하는 동물로 태어난 고통과 즐거움이여! 이번에 출간된 《당나귀들》에서 작가는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의 ‘빈곤’의 문제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국경을 넘어선데다 “영혼의 빈곤”으로까지 확대되어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가난하고 천하고 무지한 당나귀”(p. 38)들에 대한 이야기인 이 책은 그러나 “두려움을 고백하기 위해”(p. 10) 쓰여진 것이라고 화자인 나는 밝히고 있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을 말한다. 나는 나이 많은 여자다. 믿지도 않는 것을 말할 시간이 내게는 더 이상 없다.”(p. 9) 화자인 내가 “무척 좋아한다는 그녀”(p. 9)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의 말을 인용하며 소설 《당나귀들》은 시작된다. 화자인 나는 “지금 내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불러일으키는”(p. 10) 이유를 “작가는 스스로 믿는 것, 알거나 확신하는 것, 정신적인 영역에서 자기가 신념을 가지는 것을 말하거나 써야 하며, 혹 역으로 말해서 자신이 쓰는 것이 자기 신념의 영역 안에 머물러야 하는, 절대적으로 견고한 세계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고에 대”(p. 10)한 두려움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신념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의 정신적 경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p. 11)이기 때문인데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p. 21)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p. 22)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이 느낄수록, 그러고자 하는 질긴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그리고 결정적으로 매번 ‘나’라는 인칭으로 문장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빠져나올 수 없는 부끄러움의 깊은 수렁”(p. 23)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또 “우리는 모두 ‘나’라고 쓰인 커다란 관을 머리에 이고 돌아다니며 신석기인의 토굴 안에서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아귀다툼의 독백을 읊조리고 있”(p. 26)다고 선언한다. “나는 스스로를 나에게 가장 육중한 무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어 버린 이 사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을 모르겠다”(pp. 28~29)는 고백은 어쩌면 글 쓰기의 동기인지도 모른다. 이쯤에 이르면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나타난 독일 체류 시절의 기억, 그러니까 ‘사색적 글 쓰기를 강요하는 M의 정체’를 뛰어넘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글 쓰는 당나귀들에 대한 배수아식式 헌정 그러나 화자는 글 쓰기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하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이 말, ‘그대는 그대가 파악하는 정신을 닮는다Du gleichst dem Geist, den du begreifst’가 내게 곧 글의 철학의 의미하고 있음은 변하지 않았다”(p. 175)는 화자의 고백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과 맞닿아 있다. “신기하게도 바흐 애호가들은 책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흐, 그 이상은 없다, 하고 그들은 자신 있게 말하곤 했다. 어떤 이가 음악을 이해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바흐에 대한 그의 태도에 따라 판단된다는 말도 있다. 혹은 ‘나는 바흐, 베토벤, 비틀스……를 좋아해.’ 하고 위트 있게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만일 네가 바흐를 마음먹고 듣게 된다면, 더 이상의 다른 음악은, 듣고 싶지 않을 거야.’ 하고 부코우스키도 썼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바흐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바흐를 좋아하게 되면 글을 쓰고 싶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음악에 빠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바흐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말을 한 사람 자신이 바흐 애호가였으니까 그랬겠지. 오늘의 눈으로 볼 때 바흐는 마치 음악의 시작에 있는 것처럼, 음악의 문門을 연 것처럼 그렇게 보인다. 우리는 물고기처럼 그에게 거슬러 올라간다”(pp. 103~104)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화자인 나는 “당시의 다른 음악가들처럼 신神과 함께 살았다. 그것은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예술가의 시대정신이었던 ‘헌정’그 자체였을 것이다”(p. 102)라고 말하며 예술가 정신을 살짝 건드린다. 이는 《독학자》에서 보여준 바 있는 사색과 관념의 밀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밀도는 켜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응축되어 있다. 현대적 축사에 머무는 당나귀들 그렇다면 화자인 나의 이러한 인식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화자인 나는 지금 공항에서 T를 기다리고 있다. 공항 주변을 돌아보는 건 누구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화자는 무언가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흐리고 건조하며 식초 냄새가 섞인 희미한 악취 스민 공기”(p. 14)로 가득 차 있으며 “희미한 하늘과 땅의 경계 사이에서”(p. 14) “맥없이 자리잡은 대지의 사물들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수상쩍은 녹색과 진흙 빛깔로”(p. 15),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도시도 시골도 아닌 도로변의 시든 풍경을 보여준다”(p. 15)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공항 건물 내부의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커피 판매대에서 풍기는 커피 향기나 높은 유리 천장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면서 위압적으로 커다란 녹색 이파리의 윤기를 자랑하는 화분에 담긴 열대 식물이나 혹은 음료수대에서 솟아나는 맑고 깨끗한 식수보다도 더 완벽하지도, 결정적이지도 않다.”(p. 15) “콘크리트로 발라 버린 편평한 땅을 스포츠 시설 혹은 공원이라 부르면서 자연이라 생각하고 즐길 만큼 둔감하지 못한 사람”(p. 15), 즉 화자인 나는 “남 몰래 매일매일 상처받고 당황했으며”(p. 15) “어느 날 문득, 어느 방향을 둘러보아도 부연 먼지와 배기가스로 뒤덮인 하늘 아래서 이미 오래전에 심리적 수치적 포화 상태를 넘어선 현대적 축사와 다를 바 없는 세계적 대도시의 거대한 아가리 안에 굴러떨어진 ‘동물의 생’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것을 알게”(p. 15) 된다. 그리고 “문명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우리의 시작, 탄생, 전설, 기원과 소멸에 대해서가 아니다. 오직 우리는 정체성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것뿐”(p. 22)이라고 단정짓는다. 마침내 “신석기인이 별의 일생에 대해서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이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자신을 안다고 느끼게 되는 것,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버려진 신석기인의 토굴을 하나 찾아내어 거기 들어가 관 속처럼 눕는 것, 이윽고 관 뚜껑 위에 마침내 영원하고도 거룩한 이름 ‘나’라고 쓰는 것,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나이 듦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pp. 22~23)라고 자신의 삶을 규정지어 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