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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9
제1부 미국에서의 시작 /13 제2부 민주적 행동으로서 커뮤니티 오거나이징 /125 제3부 커뮤니티 오거나이징과 종교적 다양성 /173 제4부 오거나이징 문화 /219 제5부 현장에서 /277 제6부 서비스 부분 /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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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미국에서의 시작
변혁을 꿈꾸는 자, 『플레이보이』지와 인터뷰 하다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와의 인터뷰 이 인터뷰는 1972년 사울 알린스키가 에릭 노든(Eric Norden)과 대화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1972년 3월 미국 판 『플레이보이』 지의 주간 연재물로 처음 게재되었다. 2010년 프랭크 띠브스(Frank Theves)가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지난 35년 동안 미국 기득권층은 정말 잔혹할 정도의 비난에 직면해 있었다. 그 비난은 다름 아닌 안경을 쓰고 잘 차려 입은 한 커뮤니티 오거나이저로부터 나온 공격이었다. 그의 외견은 회계사를 연상시켰지만, 그의 말투는 거친 항만 노동자를 닮아 있었다. 『뉴욕 타임즈』지에 따르면, 사울 알린스키는 “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증오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유는 그가 “힘 없는 사람들의 반란을 추동한다는 것”이었다. 『뉴욕 타임즈』지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운동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주간지 『타임』지의 한 기사는 “미국 민주주의가 알린스키의 아이디어로 인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40년에 걸쳐 가난한 사람들을 급진적인 사회 행동으로 조직해 내면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수많은 공인들로부터 존경(물론 개중에는 진정 마음속에서 우려 나온 것이 아닌 것도 섞여 있다)도 받았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마리탱은 그를 일컬어 “금세기 몇 안 되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 격렬한 이념적 적대자였던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마저도 “알린스키가 인상적인 인물 이상이며 오거나이징의 천재”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에 대한 평판은 널리 퍼져나갔다. 최근 알린스키가 도쿄에서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아시아를 여행했는데, 그때 그는 가난한 제3세계를 위한 구체적인 혁명적 교훈을 제시하는 유일한 미국인이라는 칭송을 정치인은 물론 학생들로부터 받았다. 알린스키는 1909년 1월 30일 시카고의 남부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슬럼가 태생 아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분명 그의 운명은 나쁘지 않았다. 알린스키는 시카고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2년 후 대학원을 그만두고 일리노이 주로 떠났다. 범죄학자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1930년대 중반, 그는 당시 급진적인 산업조직회의(CIO,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에서 오거나이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존 L 루이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조력자가 되었다. 1939년부터 그는 점차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줄이면서, 커뮤니티 오거나이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오거나이저로서 그의 첫 활동은 그 자신과 가장 밀접하게 얽혀 있던 지역이었던 시카고 빈민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분열되고 침묵하는 분노를 단합된 저항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의 활동은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E 스티븐슨(Adlai E. Stevenson)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알린스키의 목표는 형제애, 관용, 자비심, 그리고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이상을 가장 충실히 반영한다”고 칭송했다. 1940년 마샬 필드 3세는 알린스키에게 후한 성금을 내놓았다. 진보적인 이 억만장자는 산업지역재단(Industrial Areas Foundation)을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제공했는데, 이 재단은 지금까지 알린스키의 주요 활동 기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알린스키는 그 후 10년 동안 필드의 재정적 지원을 토대로 캔자스시티와 디트로이트에서, 남부 캘리포니아의 라틴계 마을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의 수많은 빈민가에서 그의 첫 활동에서와 마찬가지의 성공을 반복했다. […]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긍정적인 반응만을 이끌어낸 유일한 업적은 1971년에 새롭게 출간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ules for Radikals)』일 것이다. 이 책은 사실상 모든 신문과 잡지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알린스키는 이러한 당황스런 지지에 대해 자신이 느낀 감정을 직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 박수갈채의 폭풍을 이겨낼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그들로부터 또 다시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 『플레이보이』 지는 에릭 노든에게 알린스키를 인터뷰 하도록 의뢰했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아보고, 나아가 이 공적 인물의 감춰진 사적 생활을 조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노든은 최근에 발주된 알린스키의 가장 야심찬 캠페인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 캠페인의 목표는 다름 아닌 바로 미국의 백인 중산층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중산층을 조직하려는 당신의 노력은 지난 수년간 당신이 가난한 흑인과 백인 슬럼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작업으로부터 상당히 동떨어진 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이제 교외 Q. 지역(suburbia)이 당신의 조직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이 될 것으로 기대하나? A. 알린스키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경력에서 가장 도전적인 전투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것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기억하라. 사람들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이 게토에 살든, 보호구역(reservations)에 살든 아니면 바리오(barrios)에 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고 교외지역은 그냥 또 다른 보호구역, 즉 길디드 게토(gilded ghetto)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깨달은 한 가지는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긍정적 행동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백인 중산층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한데, 거기에 실제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인구의 3/4는 중산층이다. 실제 벌어들이는 금전적인 수입이 그렇든 아니면 중산층과의 자기 동일시를 통해서든 간에, 그들은 중산층에 속한다. 하위 중산층인, 블루컬러나 건설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는 매년 $5,000에서 $10,000를 벌어들이는 7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난하거나 하류층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자들보다 더 강하게 주류 중산층 정신을 옹호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소수가 되고, 다수가 다이어트를 하는, 물론 그 반대급부로 가지지 못한 자들은 매일 밤 배고픈 채로 잠자리에 들어야만 하는 나라를 목도하고 있다. 하느님 맙소사! 우리가 착취당하고 있는 모든 저임금 집단, 즉 흑인, 멕시코인, 푸에르토리코인, 가난한 백인들 모두를 어찌어찌 하여 조직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그들을 조직해낼 수 있고, 생존 가능한 하나의 연합체로 통합시킬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정이 현실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어떤 것일까? 그런 식으로 조직되는 인구는 매우 낙관적 추정에 따르면, 70년대 말까지 총 5,500만 명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전체 인구는 2억 2천 5백만 명을 넘어설 것이며, 그 중 압도적인 다수가 중산층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워싱턴의 현자들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침묵하는 다수’이다. 바로 이들이 판을 결정지으며, 이들이 앞으로의 50년 동안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이너리티의 진정한 진보를 위한 유일한 희망은 메저리티 속에서 동맹을 맺고 그 메저리티를 변혁을 위한 국가적 동력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손쉽게 포기하고, 중산층을 애그뉴(Agnew)와 닉슨(Nixon) 같은 인물들에게 내맡겨 둔다면, 그때부터는 이 모든 게임을 그냥 끝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직 결과는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Q. 부모님이 정치 활동을 하셨나? A. 알린스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엄격한 정통 유대교도였고, 그들의 전체 삶은 일과 회당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행동은 완전히 편협했다. 어릴 때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 중 하나는 학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가장 나쁜 협박은 내가 탈무드 학교에서 잘 하지 못하면 ‘고이셔 콥’으로 자랄 것이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이방인 아이들이 모두 똑똑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부모님은 나에게 이방인들은 사실상 몽골로이드일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러한 쇼비니즘은 반유대주의만큼이나 건강하지 않다. […] Q. 종교 문제 이외의 영역에서도 반항한 적이 있나? A. 알린스키 그렇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 나는 일곱 여덟 살 되던 때부터 시스템에 저항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나는 “잔디에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표지판을 보기 전에는 결코 잔디 위를 걷는 다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런데 나는 그걸 본 뒤에는 잔디를 밟고 다녔다. […] 그러한 행동은 반항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반항으로 보였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결코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은 언제나 내가 매타작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아버지는 “네가 또 다시 그런 짓을 하면,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겠지”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언제나 코를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나를 심하게 매질했다. 나를 내려다보며 가죽 끈을 휘둘렀다. “또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니, 어떻게 되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린 채 그냥 서 있었다. 나는 그때 교훈을 얻었다. 권력은 기득권층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상상 속에 존재한다. […]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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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커뮤니티 오거나이징에 대한 논의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기고문들도 추가되었다. 지역의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기고문들 외에, 커뮤니티 오거나이징의 역사적 및 이론적 토대에 초점을 맞춘 기고문들도 함께 수록되었다. 전 세계의 많은 저자들이 이 책을 만드는 데 함께 힘을 보탰다는 것에 대해 정말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특히 이 책이 계속해서 영어권 논의들을 독일어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제의 행동에 도움이 되는 최상의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우리는 이 책 출간의 근본 목적, 다시 말해 로컬에서의 행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독일어 텍스트가 영어 원본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제적 차원에서의 지식 교류를 위해 헌신하는 DICO의 전통이 이 책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 책의 기고문들은 하나의 독립적 텍스트로 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누구나 자신의 상황에 맞춰 관심 가는 부분들만 따로 읽어도 무방하다. ‘커뮤니티 오거나이징’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의 작업과 그 후속 조직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역사적인 배경, 제1장 “미국에서의 시작”부터 시작하는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제2장 “민주적 행동으로서 커뮤니티 오거나이징” 그리고 제3장 “커뮤니티 오거나이징과 종교적 다양성”에서는 각각 민주적 공동참여(Mitbestimmung) 또는 종교 커뮤니티와의 협업과 관련된 ‘오거나이징’의 측면을 강조한다. 제4장에서는 커뮤니티 오거나이징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라는 것과 관련된 실천적 가이드라인과 몇 가지 사례들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추가적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 부분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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