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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원들 (서문)
풍경과 정원 (작품 갤러리) 정원의 표정 (김하나 에세이) |
Joaquin Sorolla
호아킨 소로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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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비치면 슬픔이 덜하다네.” 소로야가 페드로 힐 모레노에게, 하베아에서 파리로, 1905년
--- p.1 소로야의 정원은 평화로운 안식처로서 온 집안을 꽃향기와 물 흐르는 소리로 감싸안았다. 그는 세 곳의 정원에 예술가로서 영감을 얻고 감동받은 스페인의 풍경과 정원을 옮겨놓고자 했다. 집 현관 앞에 있는 첫 번째 정원은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의 영향이 뚜렷하다. 정원 중앙에 네 개의 화단으로 둘러싸인 대리석 분수가 있는데, 이는 소로야가 알카사르에서 그린 트로이 정원의 분수를 연상시킨다. 건물 출입구의 장식과 반원형 아치가 분수와 어우러진 풍경을, 소로야는 알카사르 궁전 풍경화와 자택 정원을 그린 작품 몇 점에 남겼다. 이 정원은 소로야의 집을 찾는 누구나 다정하게 맞이하는 환대의 장소다. --- p.7 소로야 자택 정원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세라믹 타일로 장식되어 있는데, 정원 바닥은 아마도 아내 클로틸데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1908년 왕후의 초상화 작업을 위해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에 방문한 소로야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곳이에요. 이 정원에선 당신이 흙에 발을 디딜 일이 없을 테니까요. 바닥이 모두 포장되어 타일로 장식되어 있답니다. 도금양으로 둘러싸인 타일 분수가 매우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 p.9 소로야는 마드리드 자택 정원의 풍경을 60점 이상 그렸다. 자신이 집 현관 옆에 심어 화사한 꽃을 피운 장미덤불 역시 〈소로야 자택의 노랑장미덤불〉로 생생히 남겼다. 하지만 소로야 사후 노란 장미덤불은 병이 들더니 시들어 버렸다고 한다. “10년 전 이 집을 기억하시나요? 현관 옆에 노란 장미가 만발한 아름다운 장미덤불이 있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미덤불도 병이 들었어요. 예전의 활기를 잃고 더이상 높은 창문 가까이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려 하지 않았죠. 우리가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6년 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시자 장미덤불은 눈에 띄게 시들었어요. 전문 정원사를 불러 전보다 더 잘 돌봐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장미덤불을 살려 보려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장미덤불은 결국 죽어 버렸습니다.” --- p.10 그림의 배경은 마드리드 카예 미구엘 앙헬 9번가에 위치한 소로야의 집 겸 작업실. 1904년 250점의 그림을 완성하며 가장 창조적인 열두 달을 보낸 소로야는 그해 12월 이 집을 빌려 이사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클로틸데가 정원 안에서 고향 발렌시아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기를 바랐고, 자주 앓는 큰딸 마리아에게 햇살과 맑은 공기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집에서 많은 그림을 남기진 못했지만, 〈장미 정원의 엘레나〉(1907년), 〈정원에 있는 아내와 딸들〉(1910년) 등 가족 초상화는 사랑받는 걸작들이다. --- p.42 “작은 물길을 따라 풍부한 물이 흘러넘치고 솟구치는 모습을 보면 물의 축제라고 할만 해요. 조화로운 음악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그 건축물들 역시 음악이죠. 그래서 즐거운 시간이었고, 당신 생각이 많이 났어요.” 호아킨 소로야, 1917년 그라나다에서 클로틸데에게 보낸 편지 --- p.100 해변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시선과 뉘앙스로 정원을 캔버스에 옮기며 화가는 진정한 기쁨을 느꼈다. 〈스페인 정경〉 연작 작업을 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소로야에게 의사는 휴식을 권고했지만, 그는 따르지 않았다. 소로야 자택의 정원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스페인 정원의 아름다움과 특질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여행 중 구입한 타일(〈정원의 클로틸데〉, 1919년)과 분수(〈소로야 자택의 분수와 장미〉, 1918-1919년) 등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기도 하다. 소로야의 가장 마지막 완성작 중 하나인 〈소로야 자택의 정원〉에 ‘빈 의자’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한다. 햇살과 자연을 즐기는 행복감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이 장면에 즐겨 앉았던 빈 고리버들 의자로 화가는 서명을 대신한 것만 같다. --- p.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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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세 가지 소중한 것 - 가족, 그림, 자연을 품은 집과 정원
소로야는 마드리드에 가족을 위한 집을 짓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집과 정원에 평생 소중히 여겨 온 세 가지─가족, 일(그림), 자연을 모두 품을 계획이었다. 소로야의 정원은 평화로운 안식처로서 온 집안을 꽃향기와 물 흐르는 소리로 감싸안았다. 그는 세 곳의 정원에 예술가로서 영감을 얻고 감동받은 스페인의 풍경과 정원을 옮겨놓고자 했다. 집 현관 앞에 있는 첫 번째 정원은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의 영향이 뚜렷하다. 이 정원은 소로야의 집을 찾는 누구나 다정하게 맞이하는 환대의 장소다. 첫 번째 정원에 인접한 두 번째 정원은 가장 나중에 완성되었다. 소로야는 설계를 여러 번 바꾸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수로를 따라 낮은 분수가 설치되어 물의 터널을 이루는 모습은 그라나다풍이다. 소로야는 1909년 그러나다를 방문해 처음으로 알람브라 궁전과 도시 풍경, 시에라네바다를 그렸다. 그는 늦가을에 도착해 흐린 날씨와 추운 기온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가 없어서?“당신이 여기서 나와 함께였다면!”) 고생한 가운데 8일 만에 열네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그라나다에서 구입한 세례반과 세면대가 두 번째 정원에 자리잡았다. 이 정원엔 로마와 피렌체 정원을 연구한 소로야의 각별한 노력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세 번째 정원은 작업실과 맞닿아 있어 가장 깊숙한 위치의 정원이다. 이곳은 무엇보다 화가의 고향인 발렌시아와 연결되어 있다. 분수 앞에는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발렌시아에서 흔히 설치하는 퍼걸러가 만들어져 있고 입구 계단은 발렌시아식 타일로 장식되었다. “이 정원에선 당신이 흙에 발 디딜 일이 없을 테니까요.” 아내 클로틸데를 위한 사랑의 정경 소로야 자택 정원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세라믹 타일로 장식되어 있는데, 정원 바닥은 아마도 아내 클로틸데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1908년 왕후의 초상화 작업을 위해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에 방문한 소로야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곳이에요. 이 정원에선 당신이 흙에 발을 디딜 일이 없을 테니까요. 바닥이 모두 포장되어 타일로 장식되어 있답니다. 도금양으로 둘러싸인 타일 분수가 매우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소로야는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그곳의 꽃을 아내에게 보내곤 했다. 1918년 3월 〈스페인 정경〉 작업을 위해 세비야에 머무를 때 꽃이 아직 피어 있지 않다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세비야가 가장 아름다운 달은 4월이에요. 왕후의 초상화만 아니라면 여기 머무르며 꽃을 그릴 텐데요.” 장미는 소로야가 가장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정원에도, 그의 작품에도 아름답게 남아 있다. 자신이 집 현관 옆에 심어 화사한 꽃을 피운 장미덤불 역시 〈소로야 자택의 노랑장미덤불〉로 생생히 남겼다. 마지막 걸작에 서명 대신 남긴 빈 의자 고향 발렌시아의 해변처럼 그의 집 정원은 소로야에게 안식처이자 기쁨의 원천인 그림의 주제였다. 이 정원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눈으로 먼저 그려 지은 다음, 실제로 그려졌다고 할 만하다. 해변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시선과 뉘앙스로 정원을 캔버스에 옮기며 화가는 진정한 기쁨을 느꼈다. 8년에 걸친 〈스페인 정경〉 연작 작업을 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소로야에게 의사는 휴식을 권고했지만, 그는 따르지 않았다. 소로야 자택의 정원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스페인 정원의 아름다움과 특질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여행 중 구입한 타일(〈정원의 클로틸데〉, 1919년)과 분수(〈소로야 자택의 분수와 장미〉, 1918-1919년) 등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기도 하다. 소로야의 가장 마지막 완성작 중 하나인 〈소로야 자택의 정원〉에 ‘빈 의자’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한다. 햇살과 자연을 즐기는 행복감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이 장면에 즐겨 앉았던 빈 고리버들 의자로 화가는 서명을 대신한 것만 같다. 김하나 작가의 에세이 ‘정원의 표정’ 수록 “…정원은 그가 살면서 간직해 온 표정들을 안으로 살려낸 공간이었다. 우리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던 기억뿐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힘은 언제나 깊고 강해서, 사라지는 듯싶다가도 살아나고, 또 살려낸다. 그의 시선과 마음이 곳곳에 어려 있던 그 작은 정원에는 그가 평생 주의 깊게 보아 온 풍경과 기억이 살아 있어 방문자에게 고요한 충족감의 형태로 옮아간다. 저 먼 곳에, 삶의 깊숙한 힘을 바라보고 표현하려 했던 한 화가의 작은 정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래전의 여행자는 여전히 힘을 얻는다.” 호아킨 소로야 Joaquin Sorolla, 1863-1923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스페인을 덮친 콜레라로 양친을 잃고 이모 부부에게 입양되어 유년기를 보냈다. 양부모는 그림에 재능을 보인 어린 조카를 발렌시아 미술학교에 다니도록 지원했다. 그는 스무살에 지역대회에서 우승했고, 이듬해엔 전국 전람회에서 2위를 차지하며 호평받았다. “여기서 주목받고 메달을 따려면 죽은 사람들이 출품해야 할 것이다.” 장학금을 받아 로마에서 배우고 파리에서 영감을 키운 소로야는 자연주의, 리얼리즘을 거쳐 곧 자신만의 화풍으로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는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 것에 주목했다. 클로드 모네는 그를 ‘빛의 대가’라고 치켜세웠다. 야외 작업을 선호하여 해변에서 여가를 즐기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시간 속에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그림 속에 멈춰두려는 화가의 의도와 절묘히 조응했다. 1920년 6월 20일, 그는 자택 정원에서 작가 라몬 페레스 데 아얄라의 부인 초상화를 그리다 쓰러졌다. 부축을 받아 일어나 붓질 네 번을 시도했으나 전과 같지 않았고, 초상화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사람은 그림을 그릴 때 진정 행복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4천 점의 작품과 8천 점의 드로잉, 그리고 아내와 자식에게 보낸 편지 988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932년 마드리드의 그의 집과 정원이 국립 소로야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