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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땅 제주에 얽힌 한 가족의 다큐멘터리
이 소설은 세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직 여성으로서, 결혼에 대한 환상도 기대도 그다지 없는 30대 신세대 여성인 ‘나’가 혼전관계에서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면서 전개되는 현재의 이야기와 제주 출신인 아버지의 과거 이야기, 그리고 ‘나’의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었던 제주 설문대할망 설화가 그것이다. 나의 현재와 아버지의 과거는 같은 비중으로 교차되며 서술되고, 대화체 형식으로 구성된 설문대할망 설화는 아버지의 과거 앞에 배치되어 아버지의 이야기가 모두 그녀가 나중에 듣고 재구성한 사실임을 암시하고 있다.
작중화자인 나는 법대를 졸업한 뒤 국책 은행에 다니는 전문직 여성으로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여가를 즐기며, 자유롭고 쿨한 삶을 지향하는 가벼운 신세대이다. 제주 출신 아버지의 가족과 자식에 대한 유별난 집착에 염증을 느끼며 자랐고, 한편으론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기대와는 사뭇 어긋나는 연극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해 자괴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어렸을 적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맞아들이게 된 이복 언니(셋째 언니)의 존재는 아버지의 도덕성에 대한 혐오를 갖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가 연극판에서 우연히 알게 된 현이라는 남자와 미지근한 연예를 하다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상황은 ‘나’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 남자와 결혼할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선택하지 않고, 자연 유산 되기를 바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망에 집착하는 돌발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녀는 합리적이고 똑똑한 신세대로서, 그녀의 선택이 사회로부터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왜 이럴까’, 읽는 독자조차도 ‘이 여자 왜 이러는 거지?’ 라는 물음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녀는 서울 한복판에서 오사카, 제주도를 오가며 육체적으로 힘든 ‘만일’의 상황에 스스로를 내몰기도 하면서 자신의 이 정체모를 욕망을 계속해서 따라간다. 오사카에서 만난 작은 외할아버지로부터 외할아버지가 4·3때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이복 언니로부터 아버지가 4·3때 가족을 살리기 위해 토벌대에 가담해 죽창으로 양민을 찔러 죽인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살을 피하기 위해 게릴라와 무관한 데도 총살당한 외할아버지, 어쩔 수 없이 양민 학살에 가담하고, 6·25가 발발하자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한미연합 해병대에 자원해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되고, 전쟁의 와중에 두 형을 잃은 아버지의 상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전쟁의 비극을 목격했던 아버지의 과거를 알아 가게 되면서 막연히 자유로운 삶을 지향했던 나는 삶의 무게와 가족애에 대해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배 속에 있는 아기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막연하게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는 꿈을 이루기는커녕 나만의 꿈을 제대로 갖지도 못했다. 지금에 와서 이렇게 맹목적으로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맹목적인 자식 사랑을 이어가려 하고 있을 뿐. 이것도 하나의 꿈이라면 그야말로 맹목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한 욕망에 불과하다. 아버지가 그 지옥 같은 일들을 겪으며 맹목적으로 살아남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그러나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맹목적이기에 더욱 더 순수한 열망인지도 모른다.” 서로 무관한 듯 나열되었던 ‘나’의 현재와 아버지의 과거는 나의 임신으로 인하여 뜻밖의 생명이 몸속에 자리 잡아 모성이 발동되는 상황과 엄청난 생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임을 당했던 과거 전쟁의 상황으로 병치된다. 몸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과 눈앞에서 죽어 가는 생명. 입덧할 때의 울렁임과 군함을 타고 출정할 때의 울렁임. 그러나 입덧도 배멀미도 별로 하지 않는 건강한 딸과 아버지. 이 소설의 핵심은 전쟁의 비극이나, 미혼모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려고 했다기보다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혼외정사나 출세를 지향하며 사회와 세상의 관습을 좇아가는 가부장적 기성세대의 메타포다. 또한 제주 4·3과 6·25를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상처를 갖고 있으며, 제주와 제주사람들에게 덧씌워진 육지 사람들의 편견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던 인물이다. 작가는 전쟁터에서 극적으로 죽거나 그 충격으로 인해 미쳐 버린 인물 대신 전쟁의 상흔을 잘 견뎌 내고 살아남은 보통 사람의 삶을 그려 보임으로써 전쟁이 누구에게든 공기처럼 알게 모르게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혈육에 대한 엄청난 애정과 집착을 갖게 되었으며 강하게 살아왔던 행위자로서의 아버지의 삶과 철저한 존재자로서 살아가는 나의 삶은 ‘혼전 임신’이라는 사건을 통해 한없이 무거운 기성세대와 한없이 가벼운 세대의 합일점 없는 갈등 상황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두 세대의 삶을 역사라는 프리즘에 통과시켜 보임으로써 삶이 서로에게 무관하게 흘러갈 수 없다는 반성과 더불어 ‘가족애’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성숙한 통찰을 가능케 만든다. 이 지점은 특히 아무런 사회적, 역사적 맥락 없이 자유롭고 쿨한 것만을 지향하는 요즘의 경향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등단 10년째 선보이는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 초기 대표작으로 삼고 있을 만큼 대중에게 익숙한 논리 구조보다는 실험적인 시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다. 쿨하게 극한으로 밀어붙이거나 한없이 진지한 쪽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둘 다를 조화시켜 보려는 작중 의도는 엄연히 다른 부류들이 현실에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작가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이 소설은 친절한 것 명확한 인과관계, 치밀한 갈등 구조 대신 시종일관 불명확하나 무언가 존재하며 영향을 끼치는 것, 우연적 사건으로 벌어지는 일, 전쟁 장면조차 다큐멘터리처럼 건조하게 끌고 가는 등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또 작중화자인 ‘나’가 배 속의 아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배경에 낙태에 대한 혐오나, 대안 가정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진보적 이론 대신에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의 개방적인 가족관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제주의 공동체 의식과 4·3과 전쟁으로 인해 이어진 제주 사람들의 가족애를 부각시킴으로써 비극적인 우리 현대사를 피해의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작가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역사 인식이 빛나는 작품이다. * ‘신들의 황혼’에서 신은 상상할 수도 없는 조건 속에서 삶을 일구어 내고 오늘날 우리를 창조해 낸 부모 세대를 가리키며, 황혼은 혹독한 운명과 어지러운 이념 속에서 살아남아 목숨 바쳐 지키고 쌓아온 것들로부터 도전받는 삶, 그리고 죽음을 향해 가는 그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신들의 종말을 의미하는 북유럽의 라그나뢰크 신화를 니벨룽겐의 반지와 결부시켜 만든 오페라 <신들의 황혼>에서 따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