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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난 뒤부터 인생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장과 무대의상에 갇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맨얼굴과 편안한 옷차림으로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 맨얼굴에 자신이 없다면…… 어떡하지? ---「한때는 젊었던 우리들의 동창회」중에서 파라솔 아래에서 불쑥 튕겨 나오던 투명한 비치볼. 내 또래의 여자 아이가 평상을 내려서면서 무심히 벗어 놓던 분홍색 비치가운. 다른 여자들이 길러낸 아이들은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세상. ---「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구차한 시절」중에서 그러니까 관건은 자연스러움이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씻고 바르고 옷이며 가방, 구두까지 몽땅 꺼내 거울 앞에서 별짓을 다해봤어도 집을 나서는 그 순간에는 무심히 나온 듯 자연스러워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저렇게 티가 난다. 모처럼 만나는 남자들 앞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안쓰러운 티. ---「소문은 잠들지 않는다」중에서 정말이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인생의 별다른 선택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선택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그러므로 연애 따위의 배경 화면이 없어도 결혼을 선택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 만난 남녀가 섹스는 할 수 있지만……」중에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외로운 게 낫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결혼해 봤자 서로 집착하다가 상처만 얻을 뿐이지. 그러다가 도 다른 스치는 인연에 흔들리고, 환상을 꿈꾸고, 또 상처받고……. 외로움은 끝없이 나타나는 함정 같은 거 아니겠나.” ---「삶에 찌든 만큼 목마른 밤」중에서 “그런 변화야 나도 원하지만…… 인생이 그리 쉽나? 나름대로 소소하게 예쁜 드라마 찍는 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그래 봤자 창피당하고 가난해질 뿐이라고, 그런 불편함 대신 원하는 인생을 얻는다면 오히려 행복할 거라고 그녀는 말했었다. 하지만 실은 그게 두려운 게 아닐까? 지수 엄마에게 굳이 묻지 않더라도 나는 알 것 같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이 불편해지는 게 싫으니까. ---「남편의 여자」중에서 “와? 세 번 이혼한 여자는 싫나?” 성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둘 사이로 흐르는 어색한 침묵이 견디기 힘들어 나는 맥주만 거듭 들이켠다. 누구는 애인과 헤어지고 누구는 남편과 헤어지고…… 누구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고 누구는 모두를 첫사랑이라 하고…… 또 누구는 이렇게 누군가를 애틋해 하는 첫사랑을 알딸딸하게 바라보고 있고…… ---「인생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 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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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주의 『드라마 퀸』은 중년을 맞는 여성들의 삶을 섬세한 문체와 고요한 시선으로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어느 덧 사십 대 후반을 맞게 된 은하는 동창 모임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유채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미주를 학창 시절부터 동경해 왔음을 깨닫는다. 공평하게 나이를 먹고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 온 그들이지만 은하는 문득 자신의 삶에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은하에게 드라마는 현실을 잊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 주는 환상의 세계. 은하는 유채와 미주의 화려한 삶을 드라마에 비교하며 자신은 항상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었음을 생각한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조연의 역할과 그 삶에 안도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은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단지 드라마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하지만 남편의 수상한 행동과 이웃집 지수 엄마의 드라마틱한 일들을 접하게 되면서 은하는 예전과 달리 들러리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내가 결혼하는 걸 보며 슬퍼했던 남자도 있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다함께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을까? 도미노처럼.’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확인하던 은하는 동창 박성규에게 점차 호감을 갖게 된다. 박성규와의 만남이 계속되고 스스로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할 때 은하는 남편에게 내연녀에 대한 일을 묻게 된다. 우연히 남편의 말을 듣게 된 둘째는 가출하게 되고 둘째를 찾는 과정에서 은하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드라마가 자신의 삶과 가정 속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 드라마는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는 허상에 불과한 것임을 실감하게 된 은하는 세상의 모든 드라마가 시시해졌다고 고백하게 된다. 비로소 은하는 오랫동안 자신의 주인공이었던 유채, 미주의 결핍들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로 돌아온 은하는 어느 날 햇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난다는 이웃집 지수 엄마를 끌어안아주며 평범한 삶이 그리 지루한 일만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어느덧 폐경을 생각하는 은하는 얼마 전 초경을 시작한 둘째를 바라보며 드라마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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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인생의 한 순간에 주인공이 된다
『드라마 퀸』의 특징은 주인공의 드라마가 현실 속에 위치한다는 데 있다. 주인공 김은하는 정유채의 화려한 연애나, 서미주의 직업여성으로서의 삶, 지수 엄마의 외도 등을 각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로 바라보는데, 이런 드라마들은 자연스럽게 은하의 관객참여를 유도한다. 주인공 은하는 시청자, 조연, 주연을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각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김은하를 매개로 하나가 된 이야기는 곧 김은하의 드라마 이고 이 드라마가 결말에 이르는 과정은 이야기를 읽는 독자에게 서로 다른 삶을 견주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이 소설이 단순한 소재 측면에서 ‘동창회에서 만난 이성과의 불륜’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는 작가가 자신을 닮은 커리어 우먼 서미주가 아닌 전업주부 김은하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의 말 주목받는 삶을 사는 친구들, 딴 여자에게 한눈파는 남편, 갱년기 엄마와 반항하는 사춘기 딸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남자 동창, 드라마틱하게 살아가는 이웃들…… 그 사이에서 부대끼며 과거를 돌아보던 김은하는 인생이라는 드라마에 돌연 주인공으로 호명되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한 순간에 주인공이 된다. 그 순간이 언제 다가오느냐가 문제일 뿐. ……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이어질 나의 아름다운 친구들. 이것은 너희들의 이야기이자 또한 소설이란다. 어디까지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잘라낼 수 없어. 모든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얽히고설킨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지. 난해하고 알 수 없는 우리들의 삶처럼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