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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04
1막/ 12 2막/ 38 3막/ 84 해설(시차의 영도) 허희/ 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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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 난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다리도, 아내도. 그리고 어쩌면 똑바로 생각하는 법도 잃어버렸는지 모르죠.
파출소 직원: 하지만 모든 걸 잃어버린 건 아니야. 아닌가? 김 씨: 다리는 조금 남아 있어요. 십오 센티 정도. 당신이라면 이걸로 뭘 할 수 있죠? 파출소 직원: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르지. 하지만 남은 걸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바다로 기어 들어간다고 달라질 건 없어. 김 씨: 바닥이 익숙해요. 바다도 바닥은 있을 거예요. (65-66p) 김 씨: 그게 누구의 것이든 눈물은 따뜻해요. 손등에 떨어지면. (75p) 김 씨: 전 삼백육십오 일 쪽팔려요. 문단속은 필요 없어요. 여길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바닥은 처음은 조금 불편해도 조금 지나면 편안해져요. 창밖 눈을 좀 보세요. 여기서 보면 정말 달라 보이죠. 파출소 직원: 이대로 있다간 졸릴 것 같아. 김 씨: 맞아요. 눈을 바닥에 가만히 누워서 보면 금방 졸리죠. 소리 없이 하늘이 내려와 제 눈 속에 쌓이는 기분이에요. 파출소 직원: 그 말도 졸려. 졸려. 김 씨: 내리는 눈 속으로 우리의 얼어붙은 눈동자가 들어가 풀리는 거예요. (81p) 사내: (창문을 바라보며) 눈은 세상에 자신의 고요를 조금씩 쌓고 있는 거예요. 파출소 직원: 아가, 이제 자야 할 때야. 사내: 네… 곧 저 눈은 다 고요가 될 거예요. 깊고 아득한 것들로 돌아가기 위해서. 파출소 직원: 그래그래… 자자 자자. (108-109p) 파출소 직원: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김 씨: 어둠 속에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조금만 있자… 하는 거요. 파출소 직원: 멋져. 또 말해줘. 사랑이 뭐야? 김 씨: 이불 속에서 지느러미를 부비며 노는 거. (118p) 조명, 다시 들어오고 쭈그려 앉아 흐느끼는 파출소 직원. 김 씨, 파출소 직원 쪽으로 다가가 등을 토닥여준다. 김 씨: 사람은 바닥에 닿으면 그때서야 자신의 가슴이 가장 따뜻하다는 걸 배우죠. 괜찮아요. 파출소 직원: 흑흑, 못 본 지 몇 십 년이 지났어. 김 씨: (웃으며) 우시는 모습이 저 아이와 닮았어요. 파출소 직원: (김 씨를 안고 울며 웃으며) 정말? 그래그래… (129p) ---본문 중에서 |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시인, 김경주
‘시극’과 사랑에 빠지다! 제목이 인상적인 책이다.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서 장만옥이 흘러간 사랑을 회상하며 애잔하게 읊었던 대사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아련한 향수로 남아 있는 영화 속 시적인 감성과 여운만은 이 책의 제목뿐 아니라, 내용 전반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눈 내리는 밤, 버려진 바닷가의 작은 파출소. 등장인물인 김 씨와 파출소 직원, 사내는 창문에 낀 성에처럼 차갑고 불투명한 공간을 서로의 체온을 빌어 훈훈하게 채워간다. ‘시가 된 이야기’라고 별명을 붙인 이 작품은 정확히 말해 ‘시극(詩劇, poetic drama)’이다. 시극은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하는데, 산문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의 글에 라임과 운율이 살아 있는 문학적 장르이다. 시극이라는 용어 자체가 다소 생소할 수는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극은 문학의 뿌리로서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창문을 열어다오’라고 외치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도 시극이 아니었던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에서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원래 시와 극은 하나였고, 시인은 곧 극작가였다. “T.S. 엘리엇의 《캣츠》도 시극이었다. 열두 마리의 고양이에 대한 시집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처음에는 시극으로 상연되었고 후에 브로드웨이의 손을 거쳐서 뮤지컬이 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극들도 무훈시라고 불리는 시극에서 태동을 찾는다.”_김경주, 시극론(한국일보, 2014.5.10) 저자 김경주는 주목받고 있는 젊은 시인 중 한 명이다.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김수영 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그의 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미국 대표 문학지인 《보스턴 리뷰》지에서 ‘2014년 최고의 시 TOP 20’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미국, 프랑스, 스웨덴, 멕시코 등에서 작품이 꾸준히 번역되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수식보다 그를 더욱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을 향한 그의 확신에 찬 눈빛이다. 김경주는 시뿐 아니라, 연극, 음악,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전방위 예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십 년 넘게 ‘시극 운동’을 해왔다. 홍대의 클럽과 카페, 버려진 공장, 들판, 부둣가, 길거리 등 장소를 초월해 시극 운동을 펼치고 있다. 2006년에는 수많은 극단이 밀집해 있는 혜화동 1번지로 눈을 돌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대학로 무대에 올렸는데, 이는 동명인 그의 시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에서 출발한 시극으로, 많은 관심 속에서 수차례 상연되며 시극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세계델픽대회(문화예술올림픽)’ 국가대표로 선정되어 시극 부문 최종 본심에 진출했으며, 2013년에는 서울시극단 공연의 극작을 맡아 시극 《나비잠》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시극 운동’에 힘쓰고 있다. 영화, 드라마와 같은 촘촘한 스토리텔링이 각광받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시극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공간을 비우고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시극은, 친절하고 상세한 언어로 공간을 채우는 이야기들에 밀려 무대를 내어주고 있다. 그러나 저자 김경주가 단언하듯 시극은 멸종하면 안 된다. 열림원에서 출간하는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역시 그의 확신에 찬 시극 운동의 일환이다. 이 작품은 올해 봄 ‘그런 말 말어’라는 작업 초기의 제목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다양성의 차원에서 연극 무대가 균형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시적인 연극에 대한 갈증을 포기할 수 없다. 시극은 그 모성의 언어를 찾아가는 리듬을 포기하지 않는 작업이다. 시극은 멸종하면 안 된다. 시인은 참 많지만, 정말 심각할 정도로 시심을 잃어가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시가 마치 사치나 감정의 산물처럼 노출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언어의 속살이 살아 있는 극도 있어야 한다. 시적인 침묵과 행간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계속 될 것이다.” _김경주, 시극론(한국일보, 2014.5.10.) “리듬을 재발명해야 한다. 우리가 기계가 아닌 사람인 한에서, 빈틈없는 천편일률을 빈틈투성이 불협화음으로 전환하고 긍정할 필요가 있다. 완전한 기계적 성공을 지양하고, 온전한 문학적 실패를 지향하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문학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시로, 소설로, 희곡으로, 비평으로 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김경주는 어떤가 하면 ‘시극(詩劇)’으로 하고 있다.” _문학평론가 허희 ‘해설’ 중에서 ‘시’처럼 멈춰 서서 읽다가 이내 ‘드라마’처럼 빨려 드는 포에틱 드라마, 시극을 만나다! 흰색, 검은색, 회색. 책을 디자인하는 데 다른 색은 필요 없었다. ‘새하얀’ 눈이 푹푹 내리는 ‘캄캄한’ 밤, 버려진 해수욕장 근처의 작은 파출소에 이 시대의 ‘회색인’으로 대표될 수 있는 ‘파출소 직원’과 ‘김 씨’, ‘사내’가 모여든다. 그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추억하고 공유하며, 서로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다. 덕분에 색도 없고 온기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책 속 무대는 그들의 시적인 대사와 체온으로 점점 따뜻하게 채워진다.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이 작품은 저자가 신촌 한복판에서 만나곤 했던 실재의 인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작품 속에서 하반신 대신 고무 튜브를 끼고 거리를 기어 다니며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등장인물 ‘김 씨’로 구현된다. 눈 내리는 겨울밤, 파출소 직원은 얼어붙은 길바닥을 배회하는 김 씨를 등에 업어 파출소로 데려온다. 단속에 걸린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파출소 직원은 김 씨에게 따뜻한 물과 술을 건네고, 김 씨의 처참한 이야기들을 가슴으로 들어준다. 거리의 사람들은 무심코 김 씨의 손을 밟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김 씨를 아프게 하는 것은 엄마도, 아내도 김 씨를 떠났다는 사실이다. 정년을 맞은 ‘파출소 직원’에게도 아픔이 있다. 오래전 그에게는 자폐인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집을 나간 아이를 찾지 못했고, 아이가 시신이 되어 돌아오자 그의 아내마저 생을 포기하고 말았다. 연이어 가족을 모두 잃은 그는 평생 동안 죄책감과 상처 난 기억을 붙들며 살아왔다. 파출소 근처 무덤가에 사는 ‘사내’는 3막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채 성인이 되어서까지 무덤가에 살며 파출소 직원과 교류해왔다. 사람보다 유령에 가까워 보이는 인물로서, 파출소 직원의 죽은 아들을 대신하듯 행동한다. 작품은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과 2막은 주로 김 씨와 파출소 직원의 대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의 날갯짓으로 시작하는 3막에는 2막에서 소년으로 등장했던 사내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셋이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 중간중간 은유를 머금은 시적인 대사들이 사유의 밀도를 높이고, 저자가 의도한 것처럼 언어의 빈 공간을 만든다. 또한 현실을 뛰어넘는 마술적인 상징과 묘사가 곳곳에 스며 있는데, 이는 작품 전체에 오묘하고 신비로운 감성을 더해 상처투성이 인생들을 아름다운 시로서 승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사내: (창문을 바라보며) 눈은 세상에 자신의 고요를 조금씩 쌓고 있는 거예요. 파출소 직원: 아가, 이제 자야 할 때야. 사내: 네… 곧 저 눈은 다 고요가 될 거예요. 깊고 아득한 것들로 돌아가기 위해서. 파출소 직원: 그래그래… 자자 자자. 김 씨: (창문을 보며) 물속에서 종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파출소 직원: (담배를 꺼내 물며) 물고기들의 울음소리야. 김 씨: 그걸 어떻게 아시죠? 물고기들 입안에 종이 들어 있나요? 파출소 직원: 겨울엔 자주 들려와. 혼자 새벽에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곤 해. 눈이 내리면 물고기들은 바닥에 가라앉아 입안의 종을 흔든다고 하더군. 그들의 인생은 어떤 결론을 맞이하게 될까? 잔잔한 듯 깊이 있게 흐르는 시극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는 독자에게 새로운 글 읽기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이 책은 시집처럼 독자를 멈춰 서게 하면서도, 드라마처럼 다음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더불어 희곡집과 차별화하고 시극의 특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본문 구성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물 흐르듯 읽히되 시와 같은 여백을 주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부디 글 속에 녹아 있는 저자의 진심과 시극을 향한 그의 열정이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시극이 낯설지 않은 즐겁고 매력적인 장르로서 대중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네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아픈데 어떻게 시를 쓸 수 있겠니?” 누가 내게 그 말을 해주었던가? 그에게 내가 한 말이던가? 이야기와 행간 사이에 눈을 담아보고 싶었으나 당신에게 가서 모호하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면 다행이다. 무대에 올려본 적이 없는 텍스트다.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작업할 때 ‘그런 말 말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고 이후 다듬어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 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는 사람들 틈에 끼어 건널목을 기어가다가 신호등이 바뀌는 바람에 미처 길을 다 건너지 못했다. 겁을 먹은 채 중앙선 위에 배를 깔고 있던 그의 검은 지느러미는 위태로워 보였다. 다음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목격한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대학 시절, 신촌의 홍익문고 앞에서 자주 마주치던 그분께 이 책을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