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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 5
보라와 남색 사이 구절초가 그랬지 · 10 입버릇처럼 · 12 떨어진 열매에 대해 · 14 그래도 눈이 온다· 16 오늘따라 날은 맑았지만 · 18 문을 조금 열어 두고 · 20 메멘토 모리 · 24 육십 번째 생일 · 26 진눈깨비 · 28 달을 구워 만든 빵· 30 불안· 32 바닥엔 살얼음이 끼고 · 34 동생1 · 36 동생2 · 38 겨울, 한때 · 40 어떤 날 · 42 모든 시선을 감싸는 소리 · 46 쓸리고 잘린 것도 괘념치 않는 · 48 말씀 · 50 습도 팔십 퍼센트의 저녁은 · 52 잠시, 어찌 보면 한순간 · 54 KOREAN JOURNAL of OTORHINOLARYNGOLOGY· 56 여름, 떡집 · 58 남도의 미역국 · 60 반이 지났다는 이야기 · 62 미용실에서 · 66 길을 묻기 위해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 70 겨울에서 봄에게로 · 72 불면증· 76 참 다행이다· 80 차이의 차이 · 82 지금이 바로 그때· 84 일 많았던 하루· 88 해설: 결핍이 낳은 삶의 충동 / 이송희 · 92 |
박찬호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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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꽃은 다 예뻤지
오월의 수국이 그랬고 연푸른 할미꽃이 그랬지 긴 사연이 있을 거 같은 붉은색의 맨드라미보다 한겨울을 난다는 동백보다 왠지 복잡하지 않은, 단답형일 것 같은 파란 꽃이 더 좋았지 아니 덜 부담스러웠지 --- 「보라와 남색 사이 구절초가 그랬지」 중에서 눈길이 미끄러웠나 봅니다 다리의 힘이 점점 빠진다더니 돌아오는 길에 넘어져 흉골 한 대와 늑골 두 대 금이 갔다는군요 맨날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숨을 쉬기가 힘들대요 별 약도 없다네요 그냥 무리하지 말고 누워서 뼈가 자연적으로 붙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대요 뭐 별 수 있나요? 그이 삶이 그렇듯이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요 입버릇처럼 주저리더니 죽을 날이 빨라지는 것과 뼈가 붙을 날이 빨라지는 것이 결국 같은 얘기란 걸 이제야 알았다네요 나 원 참 예 들어가세요 --- 「입버릇처럼」 중에서 시끄러운 밤을 보낸 날일수록 잠은 오지 않았고 울다가 지친 날일수록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았지요 그러면서 매년 그랬지요 이 겨울이 지나면 돌아가겠다고 오늘따라 날은 맑았지만 기분은 오히려 더 좋지 않았어요 부드러운 바람은 불지 않았고 단지 해만 높이 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제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 해요 올겨울이 지나면 꼭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죠 사실 매년 그랬습니다 내일은 눈이 올지도 몰라요 그러면 기분은 좋아지고 바람은 부드러워질 테니 그러면 정말 떠날 수 있을 듯해요 당신이 계신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해요 --- 「오늘따라 날은 맑았지만」 중에서 시드니 의대에 들어간 아들을 암으로 잃고 영어를 못해 좋다는, 선진국이라는, 지상낙원이라는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돌아 돌아 다시 돌아 한국에 슬픔에 빠져 살다 술독에 빠져 살다 식당을 하다 지금은 8.5톤 트럭으로 다이소 물건을 배달한다는 밤일하는 택배 아저씨 내 동생 엄마가 눈에 넣고 싶어 하는 내 동생 동요 가사 같지 않은 내 동생 생인손 내 동생 그해 겨울 --- 「동생2」 중에서 할머니는 베개를 모로 세우지 말라고 했고요 도둑이 들어 온다고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난 절대로 베개를 모로 세우지 않습니다 도둑이 들어올까 봐 도둑이 든 집에는 영락없이 모로 선 베개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손발톱을 깍으면 안 된다고도 했어요 귀신 들어온대요 무서워요 사는 게 --- 「말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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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잘 가 걱정하지 마 그동안 고마웠어 감사했어요 아파도 괜찮으니까 그냥 오래오래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거예요 희망을 품고 두려워 말고 편히 가세요 그 병동에서 매일 울려 퍼지는 공명(共鳴) - 「메멘토 모리」 전문 이 시의 말들은 완화의료 병동 한쪽에서 들려오는 작별의 인사처럼 조용히 번져 나간다. “사랑해”, “잘 가”, “감사했어요” 같은 짧은 문장들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한 이들과 남겨진 이들이 주고받는 언어의 온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슬픔의 기록이 아니라, 끝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화자는 죽음을 비극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으로 바라본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거예요”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듯,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존재 방식으로의 전환이며, 남은 자들은 그 길목에서 조용히 손을 내민다. ‘메멘토 모리’는 원래 교만을 경계하는 권력의 언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이 단어는 전혀 다른 결을 띤다. 권력과 겸손의 관계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마주한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共鳴)으로 바뀐다. 병동에 울리는 이 ‘공명’은 누군가의 마지막 숨결이 다른 이의 마음속으로 전해지는 순간이며,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이해와 수용’의 언어로 바꾸려는 시도의 흔적이다. 그렇게 이 시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차가운 경구를 ‘죽음을 함께 기억하자’는 따뜻한 위로로 전환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그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으므로 그저 자신의 의지로 감당하라는 명령은, 고통의 인정이자 해방의 선언이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게 숨겨왔던 것이라면/ 이제는 던지고 떳떳하게 거부하겠다 하라”는 대목에서, 시인은 자기 부정이 아닌 자기 회복의 신념을 말한다. 자유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내 안의 망설임을 벗겨낼 때 비로소 도달하는 내면의 순간이다. 그래서 시의 결말은 결의의 외침이 아니라, 서서히 ‘나아지는’ 존재의 호흡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천천히 나아진다/ 한결 나아진다”는 것은 완성의 약속이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증명하는 현재진행형의 자유이다. 이렇듯 박찬호의 시는 결핍과 상처, 회복과 이별의 경계를 관찰하며,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시 ?반이 지났다는 이야기?에서 ‘반쯤 남은 상태’는 결핍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흐름 속에서 절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절망이나 비극이 아니라, 존재의 미묘한 감각과 상호 이해, 그리고 조용한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완전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시인의 말 어려운 시는 어렵게 읽고 쉬운 시는 쉽게 읽었다 그래서 어려운 시는 뭔가 있어 보였고 쉬운 시는 뭔가 없어 보였다 고르고 골라 하루 만에 배달된 시들을 보면서 왠지 쉬운 시는 지나간 연인들에 대한 연민 같은 것들이라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면 별로인 것 같고 나에게 새침하면 있어 보이는 것 같은 그런 문득 지나간 연인들에게 지나간 많은 쉬운 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편하게 와 줘서 고마워 잊지 않게 해줘서 감사해 오랫동안 기억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