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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더 잘해줘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크리스마스에 진심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교분 오프닝 나이트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사소한 일이다 해설 | 퀴어의 수치심과 온전한 돌봄의 시간 김건형(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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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닿은 글자들에서 엄마가 어렵사리 봉인해두었을 고통과 두려움이 입체처럼 되살아나는 듯했다. 묵상을 하자는 청유형 문장에 스스로를 정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을 밤의 고초. 손을 움직여 뭐라도 쓰지 않고서는 좀처럼 진압되지 않았을 마음의 소요.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나는 엄마가 지난 일 년여간 써내려간 모든 글자와 그 안에 깃든 감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고 싶다는 발작에 가까운 충동을 느끼고는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갔다. 가질 수는 없으니 가급적 오래 눈에 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다행히 나는 시간이 많았다. --- pp.15-16 「봄에는 더 잘해줘」 중에서 아빠는 결국 당신의 예상대로 내가 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더욱 막막해졌을까. 엄마와 내가 청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교류와 유대가 아빠를 더욱 고립시켰을까. 만약 내가 아빠의 바람대로 들리지 않는 아이로 태어났다면, 그래서 아빠처럼 감각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너무 약하고 초라해서 화가 나는 일 같은 건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p.6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중에서 나는 찬오가 세상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알았으면 좋겠거든. 세상이 우리한테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를 얼마나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지 정확히 이해했으면 좋겠거든.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씩씩하게 맞서고 있는지,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롭게 살아남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봤으면 좋겠고. 그게 뭐 잘못된 건가? --- p.99 「크리스마스에 진심」 중에서 내가 자꾸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게 사실은 살고 싶어서라는 걸 알았던 장희.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보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유심히 귀기울여주었던 장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장희가 두번째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고, 나는 장희가 이 와중에도 나를 보고 있었구나, 내가 보이는구나 생각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이제 슬슬 들어가자는 장희의 팔꿈치를 잡으며 말했다. 한 바퀴만 더 돕시다. --- p.124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중에서 선생님은 내 글을 보고 단번에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내가 왜 종종 겁에 질려 있었는지, 왜 골이 나 있거나 슬퍼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고 했다. 제가요? 슬퍼 보였어요? 너는 항상 땅만 보고 걸었어.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그러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 시절의 너는 너무 빛나서 어디서든 잘 보였는데. --- pp.163-164 「교분」 중에서 나는 그 소설이 궁금해진다. 호수씨가 그냥 좋은 것도 아니고 너무 좋았다고 야단일 정도면 그건 얼마나 퀴어한 퀴어 소설일까. 거기에는 얼마나 비규범적이고 불완전하며 자유로운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우리가 담겨 있을 것이며 그건 또 얼마나 대단한 교란이고 전복이며 발명일까. --- p.194 「오프닝 나이트」 중에서 워크숍이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장현씨의 그림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땅만 보며 걷는 동안 장현씨는 나를 봐줬구나 싶었고 그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사진이 잘 나오도록 그림을 똑바로 들어 보이던 장현씨가 혹시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기념으로 서로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는지 손에 잡히는 마커로 그림 오른쪽 하단에 뭔가를 작게 써넣었다. 자세히 보니 서명이었고, 나는 그게 또 마음에 들었다. ♥현. 내가 아주 오래전 지어줬다는 장현씨의 영어 이름. --- p.247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사소한 일이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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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진부한 욕망.
내가 이런 걸 원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소중한 욕망.” 소설집을 여는 단편 「봄에는 더 잘해줘」는 초콜릿처럼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씁쓸하면서도 중독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M이 사랑했던 ‘영묵’과 연인이 된 ‘나’는 M에게서 삶의 전부를 빼앗았다는 죄책감과, 영묵을 그리는 가없는 설렘 속을 어지러이 오간다. 자신의 수술을 앞두고 혹시 모를 이별을 각오하면서도 ‘나’는 엄마와 영묵이 함께 있는 장면을, 즉 자신의 ‘진부하고도 소중한 욕망’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지극히 복잡한 사랑의 무늬를 김병운이 얼마나 유려하게 그려내는지를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에서 엿볼 수 있다. 청각장애인으로서 “농인 문화와 청인 문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빠는 “지속되는 자기혐오로 주변을” “망가뜨렸”지만, ‘나’에게 ‘못 들어서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아빠처럼,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전 연인 K. 오랜만에 만난 그는 자신을 완전히 잊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빠 같은 사람들 말고. 너무 오래 외로웠던 사람들 말고. …… 더 늦기 전에,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진짜 사랑을 해보라고. 너는 그래도 돼. _「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에서 김병운의 소설은 지금 이곳에 없는 이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삶을 받은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의 화자는 더이상 이곳에 없는 P의 피아노를 친구의 조카에게 물려주기로 한다. 그렇게 만난 ‘찬오’는 전형적인 남자아이와는 다른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 때문에 더이상 게이 삼촌과 어울릴 수 없게 될 것을 쓸쓸한 얼굴로 예감하고 있다. 그러나 “맨박스야말로 허상이라는 걸 몸소 보여줄 수 있는” “불굴의 프라이드로 무장한” 삼촌이 어떻게든 곁에 있을 때, P의 피아노로 [Last Christmas]를 연주하는 찬오의 미래 또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처럼 따듯한 사랑과 기대가 가득할 것이리라. 2023년에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과 김유정문학상 후보작에 동시 선정된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는 HIV 감염 이후 ‘장희’의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했던 삼촌의 이야기를, 그가 다른 감염인들을 간병하며 어떻게 희망을 불어넣었는지를 돌아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분리는 “우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다 P를 잃었”던 ‘나’의 이야기와 중첩된다. 그러므로 장희가 그러하듯 “이해를 거부할” 때에야, 서로를 사랑으로 덧칠하는 사람들에게 비로소 “한 시절의 끝이자 시작을 알리는 듯한 바로 그 순간”이 열릴지도 모른다. 나는요, 형님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됐어요. 이영서씨는 말했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오늘 장희 군한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삼촌은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 _「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서 퀴어 작가와 소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서늘하게 두드러지는 것 또한 김병운 소설의 특징이다. 퀴어 작가가 초점화자인 「교분」은 글쓰기 워크숍 포스터의 ‘성소수자의 눈으로 쓰기’라는 문구가 훼손된 일, 모교에서의 특강이 미심쩍은 이유로 취소된 일과 그로 인해 다친 마음을 가만 들여다본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주는 어떤 이야기는 각자 고립된 이들에게 “거기에 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서로의 상처를 봉합하는 실이 되어준다. 반대로 「오프닝 나이트」는 소설가를 연인으로 두었던 사람의 이야기다. 소설을 통해 실제 연인인 ‘나’가 HIV 감염인이라는 오해를 야기했던 ‘너’는 ‘나’의 항의를 묵살한다. 독자들이 “진짜”라고 느낄 수만 있다면 현실세계의 관계를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 되기를” 원하는 ‘나’는 이윽고 “자랑도 인정도 투쟁도 필요 없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자기혐오와 수치심을 넘어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한껏 찧고 까부는 사랑스러운 얼굴들의 이야기 소설집의 마지막 이야기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사소한 일이다」는 오늘날의 한국 소설이 품고 있는 어려운 질문 앞에서 사랑과 미래의 징조를 발견하는 소설이다. 성소수자 소설을 쓴 ‘나’의 인터뷰 기사는 엄마에게 아우팅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언제나 엄마에게 “자랑”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되고 만 건 비밀이라는” 실감은 ‘나’를 끝없는 참담함에 빠뜨린다. 하지만 김병운은 막다른 곳에서도 다정한 출구를 마련한다. 특별한 마음을 나누는 후배와 함께 ‘나만의 동네 지도 그리기’ 워크숍에 참석하며 조금씩 아픔을 치유해나가는 ‘나’와, “이해가 안 간다면서도” ‘나’의 소설을 “읽기를 포기하지 않은” 엄마에게 다가올 내일은 겨울을 견디는 온도를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다. 우리는 왜 끝내 사랑한다고 정확히 말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장 오래 떠올릴까. 이 질문에 김병운은 제대로 이름 붙이지 못한 사이들, ‘거의’에 머물러온 관계들을 다시금 그려냄으로써 응답한다. 불꽃들이 흩어지는 여름의 해변, 캐럴이 흐르는 크리스마스 저녁의 거실, 아기들이 걸음마를 연습하는 토요일 저녁의 공원, 신발까지 벗고 눈사람을 만드는 학생들과, 골목을 정겹게 걷는 한밤의 산책단……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오래되었지만 손때가 묻어 각별해진 필름 카메라처럼 담아내는 김병운의 소설들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절실한 회복과 사랑의 속삭임이 되어주리라. 혐오에 맞선 단단한 개인 혹은 연인의 내밀한 이야기에 집중하던 한국 퀴어 문학의 관습에 비하면 김병운은 상대적으로 주변의 관계들로 확장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게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는 개별적 퀴어 존재론에서 사회적 퀴어 존재론으로 확장해간다. 지금 김병운의 소설을 읽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_김건형 해설, 「퀴어의 수치심과 온전한 돌봄의 시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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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운의 소설은 골똘히 응시하는 얼굴이다. 그 얼굴은 자신에게 겨우 허락된 중고 피아노에 마음을 붙여보려는 소년의 것이었다가 평생 자기파괴적으로 외로웠던 청각장애인 아버지를 뒤늦게 이해하고자 기일마다 묵언하는 남자의 것이었다가 병상에 누워 수십 년 전 자기를 힘껏 안아주었던 어린 조카를 그리워하는 늙은 게이의 것이 된다. 그 골똘함이 등돌린 세계를 노려보는 동시에 자기 안에 들끓는 온갖 못난 마음을 달래듯 바라보는 이중 초점을 선보일 때 얼굴이란 원래 요철임을 새삼스레 자각한다. 김병운이라는 얼굴의 볼록은 비정한 세계의 각본을 뾰족하게 응시하는 한편 오목렌즈를 통과한 눈빛은 진심을 산란한다. 그 자리에서 ‘거의’ 말고 ‘진짜’ 사랑이 시작되리라. 사랑에 진심인 김병운이 기다림에서 일어나 우리를 만나러 온단다. 역사 혹은 계보 혹은 세월과 함께. 나는 그 훌륭한 자긍의 퍼레이드를 맞으러 갈 생각이다. 요란하게 호들갑을 떨면서. 함께 가자. - 이주혜 (번역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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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 오래전에 김병운 작가가 나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몇 년간 그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으나 좀처럼 답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를 읽고 나서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책은 그때의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구나. 김병운의 소설에서는 사랑을 해내려는 이들이 등장하고,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매 순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평생을 꿈꿔온 순간과 마주하는 얼굴, 엉망진창인 세상과 씩씩하게 맞서는 얼굴, 자신을 반쯤 죽이는 이의 마음까지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얼굴들. 진짜 사랑에 가닿으려는 얼굴들. 상처투성이인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이와 눈을 맞추는 동안만큼은 숨이 트이던 경험을 해본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임선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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