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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 폭염 고흐에 관한 명상 오월의 봄날을 가다 퍼플섬 느리게 오는 새 모르는 슬픔 대신 아파 드립니다 시를 위한 단상 폭염 2 발톱 생이 허무처럼 다가올 때 셀프 텔러 충분의 무게 기다린 일 반가 사유상 제2부 아름다운 저녁 후포항 노란색의 투사들 독주회 망혼의 방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녁 속으로 예지몽 손편지 잘 다녀오십시오 애인 같다와 처럼의 이중구조 차안과 피안 기분 묘하다 존재와 부재 잠자리 제3부 내가 더 슬픈 이유 아마島 귓속말 바다에서 만나자 말 잘 들어주는 사람 내일은 비 남이섬 흘린다는 것과 찌른다는 것 갈망의 푸대들 서운암 장독대 미래 도서관 긍정의 힘 인어공주 부재중입니다 눈이라도 기다리며 살자 오월과 유월 사이 제4부 물 위를 걷다 우리를 흐르는 것들 기다림의 미학 춤으로 쓰는 시 맨발 걷기 빅 백 빌런의 엔솔로지 김수영 시인 졸업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 아는 노을 사무사 思無邪 불면객 그놈은 예뻤다 비망록 사랑하다 죽어라 단풍나무 해설/존재하지 않는 존재와의 결별-김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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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속엔 노을같이 붉은 말 할 수 없는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위한 말할 수 있는 말들로 가득해요 우는 자들을 위해 소나타 형식으로 짜여진 사랑스러운 말 그리운 말 전하지 못한 말들이 빽빽하죠 주체할 수 없어 입 벌려 말하려 하면 꺼내기도 전에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알이나 소리 나지 않아 버린 고장 난 악기가 되어버리죠 터트릴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입속 가득한 말로 성을 쌓으려 해도 새를 날리려 해도 반복되는 악순환을 떨칠 수가 없어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위한 말할 수 있는 말들이 입속 가득 찬 공기였다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구릉이었다고 신기루였다고 물푸레나무 슬픈 이름으로 속삭이는 수밖에요 그럼에도 난 내 입속 쏟아낼 수 없는 말들을 사랑해요 소리로 접을 수 없어 숨 막히는, 말해지지 않아 말의 늪에 빠져 지내는 하루를 그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를 둑 넘치는 질주를 사랑하고 사랑해요 ---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 중에서 막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쓴다 연필심 뾰족하게 깎아 너를 쓴다 슬퍼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 흔들려서 슬픈 가을 들녘의 절규를 쓴다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을 두고 한 장에 적어 내려가지 못하는 아픔을 쓴다 잊히지 않아 용서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아 슬픈 침묵에 대해 쓴다 여름이 다 가도록 태양을 훔치는 배롱나무 그 은밀한 내력에 대해 쓴다 별에 관한 명상을 논하던 별이 쏟아지던 밤의 글썽이는 눈부심을 쓴다 부질없다고 해도 부질없어지지 않는 관념에 대해 쓴다 백지 위에 다시 연필심 뾰족하게 세우고 너를 쓴다 거짓 아닌 거짓을 쓰고 위선 아닌 위선을 쓴다 귀를 하나 잘라도 좋다 --- 「고흐에 관한 명상」 중에서 물 위를 걷는다 바람이 흘린 눈물 같아서 초록 잎사귀가 햇살에 흔들리다가 떨군 입술 같아서 입술만 생각하면 가닿고 싶은 섬 같아서 세상의 모든 보라를 그러모아 허물고 덧대고 칠하고 펼쳐 만든 전경 속으로 들어간다 전신을 안개처럼 친친 휘감는 보라 마을의 지붕도 담벼락도 카페도 펜션도 공중전화 부스도 해안가를 따라 핀 제비꽃 수국 라벤더도 다 보라다 보라 보라 중얼거리다가 불현듯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멍 자국 선명했던 유년의 보라에게 전화를 건다 그땐 그러면서 크는 줄 알았다 많이 다쳐 본 사람이 철도 빨리 든다기에 스치면 인연 물들면 사랑이라는 어디서 읽은 글귀를 생의 어느 지점에서는 아플 줄 알면서도 인연에 물들고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 보라가 되기 위해 누군가 건네준 보라색 헐렁한 티셔츠를 걸친다 바람의 갈기에 머리칼을 맡긴다 바다가 발밑에서 출렁이는 다리 위, 그러니까 보라색 물 위를 걷는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전생처럼 다감하고 물 위를 걷는 몽유의 시간은 기시감으로 뒤척인다 내 안에 있는 보라가 명치끝을 찔러 댄다 멀리 와서 버린다 생의 무거운 짐 --- 「퍼플섬」 중에서 어디서 오는지 모를 새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성적인가 비이성적인가 자꾸 투명해져서 불투명해지고 마는 안개에 마음 베인다 갈증과 허기는 어디서 오나 밤이 왔다 검은 누우 떼 같은 밤이 침대에 누워 늦은 밤거리를 쏘다닌다 썰물과 밀물이 지나간 휑한 거리를 주점과 주점으로 포개진 지린 비애 위를 거리엔 바람 불고 바람이 지나는 방향으로 하루를 잃어버린 빈 비닐봉지들 부치지 못한 밤의 긴 편지 같은 몸짓으로 낮게 날고 있다 공들인 날들에 찔려 물큰거리는 상처 검은 봉지에 접어 날려 보낼까 밤과 밤의 긴 행렬, 갇혀 있던 말들이 숨을 조였다 푼다 멀리서 느리게 오는 새를 대합실 의자처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가 불씨를 지피면 뜨겁게 타오를 심장이 남아 있기 때문인가 밤을 조망하고 누운 가슴이 뭉클 달아오른다 --- 「느리게 오는 새」 중에서 커브를 돌자 한밤의 습격처럼 사차선의 바다가 폭넓게 펼쳐져 있었죠 영혼의 시원 같은 온몸을 전율 가운데로 몰아넣는 깜짝 선물은 기쁨과 환희를 데려오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욕구가 목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런 감정은 기억을 오래 붙들고 있는 법이죠 불면처럼 목적지가 가까울수록 코를 자극하는 강렬하고도 치명적인 냄새 허기와 채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건 식욕과 소유욕을 불가분의 관계라고 정의한 이론 때문만은 아니겠죠 배꼽시계 알람을 풍경으로 재웁니다 소문대로 찾아간 냄새의 발원지는 선착장 앞 난장이었습니다 각종 수산물과 살아 있는 대게를 즉석에서 쪄주는 간이 매장 절약을 미덕 하는 사람들의 흥정은 꽁무니가 긴 법이죠 희비가 질펀한 바닥일수록 관습이 전통이란 이름으로 맥을 이어 갑니다 선착장을 선회하는 갈매기들의 나래짓처럼 푸른 이끼처럼 기다리는 사람은 많고 가마솥은 한정되어 있어 결국 피 같은 시간을 지불해야 하죠 누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피의 감정으로 갖가지 깃발을 단 수십 척 선박을 배경으로 셔터를 누릅니다 같은 공장 사람이 아닌데도 점점 닮아 가는 아니 점점 낡아가는 렌즈 속 얼굴들 이들에게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어울릴까요 갈 길 멀어 대게 냄새로 한낮의 적막을 문신하는 후포항을 통째 들고 차에 오릅니다 --- 「후포항」 중에서 노란 눈이 쏟아져요 자꾸 멀미가 나요 등 뒤에서 누가 불러요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노란 입술이 입술을 포개요 수만 년을 걸어온 사내들이 허공을 내려와요 색이 하늘을 날아요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것들은 색을 펼치죠 사내들은 온몸으로 물감을 짠 색을 입고 있어요 물레에 실을 뽑아 옷을 짓는 여인네들처럼 눈이 발끝에 차여요 한 줌 눈송이를 쓸어 공중에 뿌려요 떨어지는 속도를 따라 함께 비상해요 주효하므로 주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들이 손끝을 거쳐 발끝에 차이죠 발끝에 차여 본 적 없는 돌에게 삶을 이야기하지 말아요 금기가 되어 가는 상식을 논하지 말아요 힘으로 누르려고 하는 자들의 말을 믿지 말아요 정석이 어느새 비정석이 되어 가니까 그럴 때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노란색으로 무장한 가을이 오고 노란색의 투사들이 무진 거리를 휩쓰는 거예요 소멸해 가는 종들을 추모하는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거예요 모든 잎이 입을 대신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종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거예요 냄새를 풍기며 순교하는 노랑이 있는 거예요 사소하고 소소해서 눈에 띄지 않는 질서가 아침이면 조용히 거리를 정갈하게 만들어주고 사라져요 연해 노란 눈이 쏟아져요 자꾸 멀미가 나요 --- 「노란색의 투사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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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닫아도 닫히지 않는 문이 있다 문의 또 다른 이름인 길 위에서 방황을 한다 열리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 닫히지 않는 문을 닫기 위해 단언컨대 시인은 지상의 가장 외로운 떠돌이 별인지도 모르겠다 -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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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의 시는 ‘사이’에 존재한다. 존재와 부재, 사람과 사람, 말과 말, 꿈과 현실, 뭍과 바다, 노을과 어둠... 이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견디며 다양한 삶의 문양을 그려낸다. 공간이나 사물의 이쪽과 저쪽, 그 중간에 존재하는 ‘사이’는 양쪽에 닿아 있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지대의 특성이 있다. 공간과 공간,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항상 중간 혹은 사이의 공간이 존재하지만, 공간이나 사물의 한쪽이 사라지면 중간 혹은 사이의 공간은 존립할 수 없다. 이 말은 사이는 독립적이 아닌 의존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시간이나 관계가 중간에 존재하지만, ‘사이의 공간’에 개입하지 않는다. 사이의 공간은 가득 채워져 있을 수도, 텅 비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공간에 존재하는 ‘사이’가 아니라 사물이나 현상의 관계나 상태를 의미한다면 ‘사이’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공간의 사이’가 단지 공간이나 사물의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면, 사물이나 현상의 관계나 상태의 사이는 연관이나 비교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 김정수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