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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즐거운 빗방울 올드 송 가벼운, 나의 새는 나를 맴돌고 껌 씹는 여자 채식주의자 진실의 함수관계 횡단보도 앞의 봄 물 위에 쓴 글씨 그림자 고요는 흔들림이 없고, 밀랍인형같이 실안失眼 오직 하나뿐인 선택 동백자궁 천둥처럼 울고 천둥처럼 문고리들 제2부 하루살이 사라진 아침 해*는 어디로 갔을까 웃음도 흠집을 남긴다 지나가는 새 한 마리 슬쩍 곁눈질하는 찰나에 속도에 대한 변명 주머니가 없는 옷 떨켜 매미 소곡 사십 계단을 넘어가다 칼이 있는 부엌 따뜻한 정류장 맨드라미 일당 거실 일기 감쪽같이 무궁화 꽃이, 혼자 노랑선만 따라오세요 에피소드 짧아진다 제3부 꽃병과 약병 빗속의 노래 스무아흐레 나의 강변 두문로 구암길 이웃 고가도로 위의 오토바이 이력서 흰 달 사천강 도시의 거북이 햇볕 쬐기 노을 몽요일은 돌아오지 않는다 고향집 가지치기 레코드 인화印畵 제4부 이순의 귀 고라니 늙은 감자 옛날 사람 뻐꾸기 쿠쿠 치킨 오후 짐 붉은 신호등 속의 감꽃 엽서 전야 강 옷장을 정리하며 종합병원 웅덩이 거울 웃음도 장난도 없이 기어코 함께 |해설|바닥의 감각과 하강의 궤적-강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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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앞의 봄
노인의 걸음이 더디다 육중한 트럭 기사 아저씨가 빡빡 클랙션을 울리다 쌍욕을 한다 적목련 봉오리 도발적으로, 마개를 뽑기 직전의 수류탄처럼, 피어나고 있다 미세 먼지에 기도가 막힌 동백꽃이 봄을 버티고 선 건너편으로 사람들이 우르르르 검은 마스크를 하고 빠져나가고 있다 몸 한쪽을 놓친 노인이 아직도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하고 있다 -------------------------------------------------- 꽃병과 약병 들꽃 한 묶음을 꺾어 왔다 예쁜 것은 예쁘게 꽂아야 하는 것이 예의 이 가을 가기 전에 그 꽃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싶어 모시고 왔다 내 식탁에서 꽃병 치워진 지가 언제 적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찬장에도 책장에도 창고 안에도 꽃병은 없다 우리 집에서 떠나버렸다 내 푸른 시간 속으로 꽃을 꽂을 수 있는 용기면 무엇이든 찾다가 빈 약병에 꽃을 꽂는다 식탁을 차지한 약병들을 슬그머니 밀치고 꽃병을 들인다 꽃병이 된 약병 속에서 꽃이 웃는다 몸속 아린 슬픔 하나를 지우고 웃는다 ------------------------------------------------------------------- 동백 자궁 또 알을 낳고 알을 품습니다 둥지를 잃은 새 한 마리 알의 껍질을 들추면 식어 빠진 밥 한 덩이 나올까요? 아직 식지 않은 유골이 나올까요? 아득한 계단의 입구에서 절뚝절뚝 내려서던 햇살 절름발이 걸음을 멈추고 그늘은 점점 두꺼워 집니다 버림받은 자궁 같이 핏물이 번진 동백 한 송이 툭, 붉게 울었습니다 ----------------------------------------------------- 웃음도 흠집을 남긴다 선거 벽보가 붙었다 벽에 온통 웃음 꽃이 피었다 활짝 웃는 얼굴 미소 띤 얼굴 세상 구석구석 낙원으로 만들 것 같은 얼굴 쓰린 상처도 쓰다듬어 주고 처절한 절망도 감싸 안아 줄 것 같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비바람이 치거나 가래침을 뱉어도 웃음을 거둘 줄 모르는 얼굴들 좁힌 미간을 풀고 벽이 활짝 웃을 때 주민센터 사거리에서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의 각도와 기울기가 같아져서 굽힐 줄 모르는 벽도 순간적으로 잠깐 말랑말랑해진다 짧은 기간 벽을 가렸던 벽보판 웃음기 걷어 낸 벽엔 잠깐 쏟았던 선심이 핏자국처럼 말라붙어 있다 웃음에 긁힌 상처에는 처방이 없다 ------------------------------------------------------- 사십 계단을 넘어가다 계단 앞 간이무대에서 여인이 피범벅 된 가슴을 끌어안고 춤을 춘다 핏방울은 점점 뜨거운 불꽃으로 타올라 온몸으로 옮겨붙는다 불꽃 속에서 눈부신 날개 한 쌍이 태어난다 첨단을 사는 관중들이 퍼포먼스에 취해 손뼉을 치며 초기능 아이폰으로 동영상을 찍는다 사십 층을 가볍게 넘겨버린 41층 백화점 정수리 높은 곳에 앉아 스카이라운지가 지그시 계단을 내려다보고 여태 사십 계단을 다 넘어가지 못하고 사십을 넘긴 내 아우는 한 칸 한 칸 층계를 오르듯 글자를 찍고 시 한 줄로 끼니를 때우고 눈을 비벼도 자꾸만 흐려지는 문장들 흠집투성이 책상 밑으로 말없이 밀어 넣으며 하루를 마감할 때 활자 냄새를 풍기며 어두워지는 골목길을 돌아 오늘도 사십 계단을 넘어가고 있다 ------------------------------------------------------------- 이순의 귀 왼쪽 귀가 가렵다 흉을 보면 왼쪽 귀가 가렵다는데 누가 내 말을 하는가 보다 내가 뭘 잘못 했나 새벽 3시에 밤 도깨비처럼 일어나 앉아 귀를 세운다 세상은 잠들어 욕할 입도 없는데 이 나이 되면 천 리 밖 누군가 내 말 하는 것도 알아채는데 눈 귀 모두 어두워지면 멀리 간 영혼들이 나무라는 소리만 들리는 건지 왼쪽 귀를 긁다 말고 불이란 불 다 환히 밝혀 놓고 어둠이 와글와글 몰려와 들여다보는 창문에다 나는 비춰보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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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비평
시인은 외로워 죽고, 춤꾼은 고달파 죽는다했던가. 시인과 춤꾼으로 살아온 선생님이 어느 날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조끼(?)를 입고 나타났다. 모두들 멋지고 예쁘다고 만지고 들여다보고 관심을 보였다. 선생님은 가만 웃음을 지으며 사실은 염색 목도리였는데 바느질 몇 땀으로 뚝딱 개조한 거라고 하셨다. 좌우지간 선생님이 무언가를 고쳐 입으면 태가 났다. 저절로 맵시가 느껴졌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꽃병이 된 약병에 꽃을 꽂아야 하는 세수가 되었건만 드레스를 잘랐다/우아하게 바닥을 끌던 드레스는/종아리까지 깡총 올라갔다//이쁜 레이스에 때가 묻지 않을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시를 보여주시기도 했다. 한 편의 시는 수없이 오려내고, 붙이고, 덧대고, 덜어내는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것. 화려한 수사나 유희에 기대지 않고 마침내주머니가 없는 옷을 가지시게 된 걸 축하드린다. 이 명료하고 명징한 정중동의 시들이 사실은 오래 매만지고 궁리하고 개조한 리폼의 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유홍준(시인) ·시인의 말 읽을 줄 모르는 가사는 나를 외롭게 하네 들을 줄 모르는 노래는 나를 슬프게 하네 너는 시라고 쓰고 나는 사람이라 말하고 텅 빈 페이지만 남아서 나는 다시 닫힌 입, 닫힌 눈으로 막막해지네 2026. 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