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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89. 대한민국 건국 후 첫 현안은 친일청산 위한 ‘반민법’ 제정이었다 90. 북한·프랑스가 과거사 청산을 잘했다고? 무식하면 용감한 주장 91. 노획한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가 기록한 남로당 지령과 4·3폭동 92. 2003년 정부 보고서 책임자 양조훈, 12년 시차로 박갑동 인터뷰 두 번? 93. 1948년 제주 4·3 사건은 폭동이자 반란, 결코 봉기 아냐 94.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 대한민국 국시(國是)를 반공으로 만들어 95. 김창룡, 여순반란 발생 한 달도 안 된 1948년 11월 11일 박정희 검거 96. 주한 미군 철수와 같은 시기 북은 대한민국 국회에 ‘프락치’ 심어 97. 1949년 6월 청년 장교 안두희, 김일성 추종한 김구를 쏘다 98. 국군 전신 조선경비대, ‘빨갱이 소굴’ vs ‘일본놈 앞잡이’ 알력 99. 1950년 3월 이승만의 ‘개정 농지개혁법’은 대한민국 발전 초석 100. 이승만, 미군정 정책 보완한 귀속재산 불하로 시장경제 활성화 성과 101. 1949년 신생 대한민국을 덮친 5가지 복합위기와 이승만의 선택 102. 6·25 발발 원인은 북·중·소 3국이 공유한 ‘미국 불개입’에 대한 오판 103. 1950년 6월 27일 밤 10시 이승만 대통령 육성 방송 연설 전문 104. 1950년 한강 인도교 폭파로 희생된 민간인? 없다 105. 전쟁 중 보도연맹 요시찰 인물 제거 사건, 전쟁 일으킨 김일성 책임 106. 1950년 8월 칠곡 다부동 전투, 한미연합작전으로 남침 저지 성공 107. 이승만, 9월 29일 서울환도식 및 10월 29일 평양입성환영대회 108. 맥아더가 오판한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참전과 장진호 전투 109. 조갑제, 정일권·미 전문가 증언 근거로 맥아더 오판은 ‘의도적’ 110. 우리가 잘 모르는 1951년 1월 휴전 제의, 미국 이승만 무시 111. 트루먼 대통령 1951년 4월, 반격에 성공하던 맥아더를 전격 해임 112. 1951년 상반기 ‘국민방위군사건’ 정치적 배후는 이승만 아닌 신성모 113. 휴전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한 이승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얻어내 114. 6·25 전쟁, 한미상호방위조약·국가 자율성·국민 정체성 확립 기여 115. 전쟁 중 이승만, 평화선 선포하고 인하공대·한국외대 추진 116. 1952년 통계국, ‘6·25 사변 중 피살자, 피납치자, 월북자’ 명부 작성 117. 1952 여름 부산정치파동, 직선제 개헌과 미국의 내정간섭이 핵심 쟁점 118. 정전 3주 후 이승만 ‘혼자라도 자유 위해 싸우는 이유’ 밝혀 119. 1952년 직선제 개헌부터 1954년 자유경제 개헌까지, 이승만 질주 120. 1954년 이승만, 미 의회 연설에서 ‘중공 자유화 전쟁’ 불사 호소 121. 이승만, 1954년부터 1955년까지 7차례 유시로 불교 정화 122. 1956년 1월 김창룡 암살, 이승만 집권기 권력 생태계 변곡점 123. 1956년 김창룡 암살 배후, 단순한 원한 관계 vs 군내 파벌 갈등 124. 타공(打共)에 헌신하며 이승만 도운 김창룡이 비난받는 까닭은… 125. 김창룡 사후 현실정치 역관계, 이기붕·박마리아 중심으로 재편 126, 건국 헌법의 기형적 권력 배치 아래 후계 경쟁이 이기붕 띄워 127. 1959년 12월 14일 재일 한인 북송, 이승만 외교의 뼈아픈 실패 128. 3·15 부정선거 불러온 이승만의 노쇠: 판단력·인내심·기억력 감퇴 129. 4·19 전후 정국 전개와 이승만 부처의 하와이 여행 그리고 영면 130. 1965년 7월 19일 서거 이승만 유해, 23일 박정희 대통령 공항 영접 131. “우리 국민, 이승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아 재평가 시급” 부록 북한 친일(親日) 청산론의 허구와 진실-류석춘·김광동 이승만 연보(年譜) 색인(Ind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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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친일청산이 완전히 엉터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대한민국 현대사를 흠집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요즘 들고나오는 포인트를 바꿨다. 북한 대신 프랑스를 예로 들면서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부역하던 사람들을 전후 프랑스는 제대로 청산했는데, 일제 치하 조선에서 부역하던 사람들을 대한민국은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사실 이 주장도 ‘북한이 했다는 철저한 친일청산 주장’ 못지않게 황당한 주장이다. 비교의 기준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반면에 나치 치하 프랑스는 독일의 ‘점령지’였다. 식민지와 점령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범주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는 식민지와 비교해야 하고, 점령지는 점령지와 비교해야 한다. 그래야 의미 있는 비교가 된다. --- p.18 그렇다면 4·3은 무엇인가? 폭동인가? 반란인가? 봉기인가? ‘폭동’은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목적 없이 폭력적 집단행동을 벌이는 사건을 지칭한다. 정부 역할을 하던 미군정을 타도 대상으로까지 삼지는 않았지만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벌인 4·3의 초기 무장투쟁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나서부터 4·3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을 ‘처단’하겠다는 즉 반역을 목표로 한 무장투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8·15 이후 4·3은 ‘반란’이다. 즉 ‘4·3은 폭동으로 시작해 반란으로 끝난 사건’이다. --- p.41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 표현을 따르면 농지개혁은 이른바 ‘포용적 제도’ 즉 ‘중산층을 확대하는 제도’를 만들어 안착시킨 대표적 성공 사례다(아세모글루·로빈슨 저, 최완규 역, 2012,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 시공사). 농민들은 환호했고, 지주들은 징징댔다. 지주를 달래기 위해 이승만은 지주가 기업가로 변신하기 위한 전업을 알선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도 지원하는 길을 열었다. 이 배려와 함께 1949년 12월 공포된 ‘귀속재산처리법’은 지주가 자본가로 넘어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과정을 이끌며 이승만은 완성된 법이 공포되기도 전에 긴급명령 등의 행정조치로 농지개혁에 필요한 기초 작업을 모두 준비했다. 그리하여 개정된 법 공포 직후인 1950년 3월 중하순에 정부는 ‘농가별분배농지일람표’를 공람시킬 수 있었다. 같은 해 4월 15일 정부는 ‘농지개혁 완료’를 선언했다. 6·25 발발 2달 전이었다. 이승만은 정녕 ‘시간을 달린 지도자’였다. --- p.82 마침내 회담 시작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10시 양측은 판문점에서 휴전에 서명했다. 서명은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어서 같은 날 오후 문산에서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그리고 개성과 평양에서는 인민군 사령관 김일성과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가 각각 서명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그날 밤 10시 모든 전선의 포성이 멎었고 1,129일 간의 전쟁은 마침내 중지됐다. 또한 그로부터 2주가 채 안 된 8월 8일 경무대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가(假)조인이 있었다. --- p.189 1956년 1월 40세의 나이에 흉탄으로 쓰러진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의 죽음은 잘 나가던 이승만 정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서막이었다. 개인적 원한과 비리 그리고 권력 내부의 갈등이 얽히고설켜 빚어진 사건은 80대 나이로 접어든 고령의 대통령 이승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구사하던 분할지배(divide and rule) 전략에 엄청난 구멍을 냈다.이때부터 권력의 누수를 겪으며 이승만 정권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길래 그의 죽음이 그렇게나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하게 되었는가? --- p.256 이승만 시대가 저물어 가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한 사람의 삶이 끝나가는 모습과 유사했다. 새 나라를 세우고 지킨 불굴의 투지와 안목이 사그라지는 과정을 관찰하는 고통은 마치 부모의 임종을 지키는 자식이 마주하는 감정의 기복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판단력과 기억력이 흐려지는 모습은 지금도 너무 아프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또한 가슴을 후빈다. 1960년 4월 23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부상 학생을 찾아 이승만이 한 말이다. “장하다… 장하다… 젊은이들이 불의를 보고 일어서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가 있어? 내가 그만두면 사람들이 더 안 다치겠지…”(김정렬, 2010, 『항공의 경종』 대희: 233-234).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의 여전한 아부를 뒤로하고 스스로 사퇴 성명서를 작성한 이승만은 마침내 1960년 4월 26일 하야했다. --- p.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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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업의 몇 가지 큰 방향과 특징을 독자들께 보고한다.
첫째, 연재물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자료와 새로운 연구 성과가 있는 경우 이를 최대한 반영했다. 대표적인 예가 3권 104번 꼭지에 실린 ‘한강 인도교 폭파로 희생된 민간인? 없다’라는 글이다. 영화 ‘건국전쟁’ 상영과 함께 자유일보의 필자 글이 방아쇠를 당긴 이후 이 문제는 관련 전문가들이 대거 등장해 추가적인 사실과 자료 그리고 해석을 쏟아내며 논쟁을 거쳤다. 이번 기회에 이를 모두 소화해 책에 반영했다. 다행히 필자의 최초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방식으로 이런 과정을 거친 글들이 무수히 많지만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최선을 다했다고만 말씀드린다. 둘째, 1권, 2권, 3권 모두에서 한 꼭지로 소화하기 어려운 주제지만 해당 시기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전문성을 가진 필자의 기존 논문을 각각의 책 부록으로 추가했다. 1권 부록은 “만주국과 이승만·박정희 그리고 김일성”이라는 글이다. 2권 부록은 “이승만의 건국헌법과 정치제도”라는 글이다. 3권 부록은 “북한 친일(親日) 청산론의 허구와 진실”이라는 글이다. 각각의 논의 주제와 범위가 시간적 또 공간적으로 퍼져 있고 관련된 인물이나 사건이 우리 현대사의 가장 무겁고 굵직한 주제들이기 때문에 짧은 글로 다루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부록 덕분에 책 내용이 더욱 풍성하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셋째, 이미 출판한 1권과 2권의 오탈자 및 편집 과정의 실수를 최대한 바로 잡았다. 이에 더해 각각의 책 표지에 등장하는 부제 또한 세 권의 책이 일관된 표현을 가지도록 다듬었다. 물론 이번에 처음 내는 3권에서는 앞의 두 책이 범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도 각별히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결과란 있을 수 없다. 기회가 닿으면 또 고칠 것이란 당연한 말씀을 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이승만이라는 ‘시간을 달린 지도자’가 우리 현대사에 크나큰 봉우리로 존재하고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자유를 지키고 번영을 지속해야 하는 오늘날의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승만을 통해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베트남처럼 공산당이 통일한 나라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