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발간사 - 가야산 연구 20년 - 발굴의 결실과 남겨진 과제(이기웅)…16
1. 열린 물길이 만든 다양성의 터전, 내포에 대하여…26 2. 저항의 땅, 충청도 그리고 덕산현…33 3. 가야산 도청봉과 국사단, 그리고 가야사의 성역성(聖域性)에 대하여…46 4. 가야사 금탑 운제의 석수, 침묵의 증인…61 5. 마곡사와 가야사 금탑의 풍마동에 대하여 문헌에서…91 6. 『일성록』이 전하는 십승지(十勝地)로서의 가야산…102 7. 1753년 이철환의 가야산 로드…117 8. 1845년, 가야사 금탑과 운제 철거… 남연군묘 조성의 직접적 증거 확인…140 9. 1870년 가야동 무과 향시, 남연군묘를 지킨 가야산 포수들…157 10. 1868년 오페르트 사건과 총리영 병력에 대하여…173 11. 18세기 가야구곡을 주유한 구봉 안세광(安世光, 1683~1765)에 대하여…191 12. 죽천 김진규를 중심으로 본 18세기 가야산 인적 네트워크…201 13. 가야산의 보석, 선유암과 와룡담의 재발견…215 14. 가야산의 암각문 우암 송시열의 흔적 : 역사와 문화의 교차점…219 15. 보원사지 철불(鐵佛) 반출 과정에 관한 고찰…224 16. 정자간(亭子間), 사라진 누정을 기억하다…237 17. 가야산의 잊혀진 흔적, ‘이미정(二美亭)’ 암각문 이야기…243 18. 선비의 눈으로 다시 보는 가야산의 무릉대(武陵臺)는 어디일까…246 19. 상가리 봇똘, 사라진 마을의 기억…266 20. 옥계저수지에 대하여…272 21. 옥계저수지 준공에 대하여…278 22. 일제강점기 덕산 가야산은 황새 번식지였다…282 23. 가야구곡 옥병계에 들어서며 - 병계 윤봉구의 자취를 따라…284 24. 옥병계 노거수가 기억하는 가야산 이야기…287 25. 가야사의 경관과 기억…290 26.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옥병계는 어떤 의미였을까?…295 27. 가로림만(加露林灣)의 지형과 지명 이야기…303 28. 가야사지 상가리 미륵불 앞에서…307 29. "가야산, 누구의 성지인가"…312 30 가야산 벌목과 숯가마 운영에 대한 증언 기록…317 31. 보덕사와 관음암 ― 하나였던 절, 그리고 잊힌 이야기…322 32. 서울 봉원사에서 옛 가야사를 만난다 : 가야사의 범종이 전하는 천 년의 울림…335 33. 가야산의 이산표석(李山標石) : 그 정체와 역사적 의미…342 34.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지역의 이산 금표…346 35. 안영중 등 청원서(安永重 等 請願書)에 대하여…354 36. 가야산 ‘금표’와 강제 수용의 역사…359 37. 덕산 가동(伽洞) 남연군묘역 부동산의 국유화 과정 연대별 정리…364 38. 1918년, 가야동 역사의 중심에서 변방으로…369 39. 덕산읍성에 대한 단상 - 지적도와 옛 사진 한 장을 마주하며 …376 40. 내포 가야산, '걷는 길'의 왜곡과 종교화 시도에 대하여…381 41. 상가리에서 으름재까지 : 길 위에 새겨진 기억과 공존의 기록…384 42. 으름재 사람들의 이야기 :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기억…388 43. 단가(檀家)로 가야사와 옥병계 성수침(1493~1564)의 암각문에 대하여…397 44. 가야산 계곡에서 발견한 9엽 수막새 : 흙 속에서 깨어난 역사와 추억…404 45. 헌종 가봉태실의 조성 과정과 덕산군 승격…408 46. 왕실 권위 회복의 무대가 된 가야산, 1865년 흥선대원군의 행차와 그 여파…421 47. 흥선대원군의 행차와 가야동의 격쟁과 상소에 대하여…428 48. 남연군묘와 조선의 길 - 육로의 한계와 수운에 대하여…432 49. 1917년 흥친왕비 이희공비의 가야동 남연군묘 참배 여정…443 50. 1909년 흥친왕 이재면의 가야동 행차…448 51. 잊혀진 덕산군의 기억.?금석문에서 옛 덕산군의 기억을 되살린다(1)…452 52. 잊혀진 덕산군의 기억.?금석문에서 옛 덕산군의 기억을 되살린다(2)…459 53. 1865년, 흥선대원군의 37일간 가야동 행차에 대하여…462 54. 1868년 삽교천과 덕산현 구만포구, 증기선 ‘그레타호’를 만나다…476 55. 송시열의 〈송자대전〉 「덕산현 축민당기」를 중심으로…481 56. 덕산읍성에 대하여 - 윤봉오 석문집 축민당 중수기를 중심으로…494 57. 1781년 유만주의 덕산읍성 귀신 이야기…506 58. 허구 위의 안내판, 진실을 묻다…514 59. 경복궁 영건일기를 통해 읽는 덕산 상가리의 역사…519? 60. 구만포(九灣浦)는 물길과 지형이 만들어낸 지명이다…527 61. 흥선대원군의 미완의 꿈…532 62. 의천의 가야사 중창 : 내포의 중심, 가야사의 금탑 이야기…537 63. 가야사지 금탑 운제의 사자상에 대하여…541 64. 112년 전, 가야동으로 가는 길에 가로수가 있었을까? …544 65, 덕산 가야산 묵오 이명우의 정자 귀래정(歸來亭) 암각문을 고종하면서 …559 |
이기웅의 다른 상품
|
덕산 가야산 묵오 이명우의
정자 귀래정(歸來亭) 암각문을 고종하면서 가야산 암각문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지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현장’에서 시작된다. 가야산의 숲과 계곡을 스스로 걸어보지 않고는 그 지형이 품은 기억을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가야산을 오르내리며 문헌을 찾아보고, 사라진 지명과 사람들의 흔적을 복원해 왔다. 그 과정에서 가장 자주 마주한 주제가 바로 가야구곡 일원에 남아 있는 암각문이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곳만 30여 점에 이르지만, 죽천 김진규의 글씨가 문헌으로 확인되었을 뿐 그 외 글씨는 정작 누가 남겼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합의가 없다. 1865년 창건된 보덕사(報德寺) 현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수준 높은 필치와 구성미로 주목받지만, 낙관이나 관지가 없어 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1865년 가야동 전각 건립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이 당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였다는 점, 왕실 묘역 정비와 연계된 국가 사업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흥선대원군 친필설’은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 역시 정황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는다. 확정은 언제나 증거가 필요하다. 최근 가야산 관련 글과 연구가 늘고 있지만, 지역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서술도 적지 않다. 덕산군이 폐군되면서 남겨진 조선 후기·대한제국기의 행정 기록이 부족하고, 지역사 연구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탓이 크다. 가야산을 찾은 인물들의 교류망과 동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쓰인 글을 보면,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극선, 김진규, 윤봉오 일가, 김재칠과 김려 부자, 그리고 요즘 내가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운양 김윤식과 묵오 이명우의 기록을 찬찬히 읽다 보면, 그들이 보았던 가야산의 모습이 의외로 선명하게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과거에 내가 썼던 글에서도 수정할 지점이 발견된다. 연구는 늘 이러한 자정의 과정을 거친다. 현재의 결론은 명확하다. 가야산 암각문의 작성자는 아직 누구라고 단정할 수 없다. 문헌 기록이 없으니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최근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정작 연구나 고증보다는 사업 중심의 접근이 많아 보인다. 근거 없는 ‘추측’이 오히려 지역사 연구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필요한 것은 조용하지만 꾸준한 연구다. 새로운 사료의 발굴, 서체학적 검토, 과학적 분석, 가야산 인문 지도의 재구성 같은 작업이 차분히 이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보덕사 현판과 가야구곡 암각문을 남긴 사람이 누구인지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가야산의 암각문 논쟁은 글씨 하나의 주인을 밝히는 문제가 아니다. 가야산과 내포 지역의 근현대사가 지닌 공백을 메우는 일이자, 미래 세대에게 온전한 기록을 넘겨주는 과정이다. 나는 앞으로도 가야산을 걸으며, 이 오래된 질문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날을 기다려볼 생각이다. --- 본문 중에서 |
|
가야산 연구 20년 - 발굴의 결실과 남겨진 과제
지난 20여 년 동안 가야산을 직접 오르내리며 현장을 살피고, 고문헌을 검토하며, 지역 사회에 전승된 기억을 수집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인된 여러 기록과 유물은 오늘날 가야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임을 보여준다. 1787년에 간행된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덕산현감 최세경이 신축한 동헌 축민당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최세경은 송시열의 제자로서, 병오년(丙午, 1666년) 덕산현감으로 부임해 동헌 축민당(祝民堂)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겨진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 관아 건축과 행정 운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18세기 중반 윤봉오가 남긴 덕산현 축민당 「중건기(重建記)」는 지방 행정과 재건 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문헌으로, 18세기 덕산현과 가야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범죄 수사와 심문 절차를 정리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은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사회 사건을 배경으로, 가야산 일대 세력의 규모와 참여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덕산현이 점차 쇠락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록은 본 총서의 집필 과정에서도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1865년의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역시 주목할 만하다. 1845년 남연군묘가 가야산으로 이장된 이후, 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대규모 토목 사업이 가야동에서 전개되었으나 이를 전하는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일기는 중앙 왕실의 경복궁 중건 사업과 함께 덕산현의 명덕사(明德祠)와 보덕사(報德寺)가 동시에 추진된 사실을 보여주며, 자재와 인력 동원의 구체적 실상을 전한다. 근대기로 넘어오면, 1865년 해미현감 김응집의 일기, 대통회전 수묘군 관련 자료, 1868년 오페르트 사건 당시 수원 총리영 소속 병력 이동 기록은 조선이 서구 세력의 침투에 대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다. 이 기록은 수원에서 덕산에 이르는 행로와 각 고을의 대응 및 지원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1870년 가야산 포수들이 무과 향시에 선발된 사실은 왕실과 가야동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례이며, 1887년 덕산군수 이명우의 기록은 대한제국 성립 직전 지방 행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특히 그의 문집 ≪묵오유고≫는 근대 교육과 행정 개혁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온전한 번역과 소개가 요구된다. 또한 1896년 조중서 군수가 편찬한 《덕산현읍지(德山縣邑誌)》는 내포 지역의 지리·민속·행정을 집대성한 문헌이나 아직 번역되지 않아 대중적 접근에 제약이 있다는 점이 아쉽다. 현대사와 연속된 맥락에서는, 가야산 일대에서 전개된 빨치산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같은 연구 성과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개별 문집 또한 가야산 연구에서 핵심적 의미를 지닌다. 조극선의 일기, 윤봉구, 김진규, 이의숙, 오원, 안세광, 임방, 송인, 이철환(≪상산삼매≫), 이동윤, 김윤식 등의 문집은 문학적 성취를 넘어,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인문 지형과 교유 관계망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은 단순한 문학 텍스트가 아니라 지역과 시대를 연결하는 사회사적 기록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발굴되지 않은 자료, 혹은 이미 소실된 기록들이 적지 않다. 세월과 전란, 후손의 관리 소홀로 인해 사라진 기록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자료는 언젠가 다시 드러나 연구의 빛을 더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발간하는 《가야산 역사문화총서》 제4권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하나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앞으로 5권, 6권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굴될 때마다 가야산의 역사는 더욱 세밀한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야산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오랜 세월 사람과 사상, 문화가 교차해 온 역사 무대임을 다시금 보여줄 것이다. 지난 20년간의 연구 과정을 돌아보며, 앞으로는 후학들이 이 과제를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이 지역의 역사가 더 넓은 시각과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한층 깊이 있게 연구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 이 기 웅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