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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웅의 내포실록 : 가야산을 걷고 쓰다 1
이기웅
그림책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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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역사문화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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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발간사 - 가야산 연구 20년 - 발굴의 결실과 남겨진 과제(이기웅)…15

1. 열린 물길이 만든 다양성의 터전, 내포에 대하여…26
2. 저항의 땅, 충청도 그리고 덕산현…33
3. 가야산 도청봉과 국사단, 그리고 가야사의 성역성(聖域性)에 대하여…46
4. 가야사 금탑 운제의 석수, 침묵의 증인…61
5. 마곡사와 가야사 금탑의 풍마동에 대하여 문헌에서…91
6. 『일성록』이 전하는 십승지(十勝地)로서의 가야산…102
7. 1753년 이철환의 가야산 로드…117
8. 1845년, 가야사 금탑과 운제 철거… 남연군묘 조성의 직접적 증거 확인…140
9. 1870년 가야동 무과 향시, 남연군묘를 지킨 가야산 포수들…157
10. 1868년 오페르트 사건과 총리영 병력에 대하여…173
11. 18세기 가야구곡을 주유한 구봉 안세광(安世光, 1683~1765)에 대하여…191
12. 죽천 김진규를 중심으로 본 18세기 가야산 인적 네트워크…201
13. 가야산의 보석, 선유암과 와룡담의 재발견…214
14. 가야산의 암각문 우암 송시열의 흔적 : 역사와 문화의 교차점…218
15. 정자간(亭子間), 사라진 누정을 기억하다…223
16. 가야산의 잊혀진 흔적, ‘이미정(二美亭)’ 암각문 이야기…229
17. 선비의 눈으로 다시 보는 가야산의 무릉대(武陵臺)는 어디일까…232
18. 상가리 봇똘, 사라진 마을의 기억…252
19. 옥계저수지에 대하여…258
20. 옥계저수지 준공에 대하여…263
21. 일제강점기 덕산 가야산은 황새 번식지였다…267
22. 가야구곡 옥병계에 들어서며 - 병계 윤봉구의 자취를 따라…269
23. 옥병계 노거수가 기억하는 가야산 이야기…271
24. 가야사의 경관과 기억…274
25.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옥병계는 어떤 의미였을까?…279
26. 가로림만(加露林灣)의 지형과 지명 이야기…286
27. 가야사지 상가리 미륵불 앞에서…290
28. "가야산, 누구의 성지인가"…295
29. 가야산 벌목과 숯가마 운영에 대한 증언 기록…300

저자 소개 1

2017년 가야산역사문화총서를 기획하였다. 가야산역사문화총서 1 - 길보유고 가야산역사문화총서 2 - 가야산에서 한국사를 읽다 가야산역사문화총서 3 - 내포 가야산 한시 기행 가야산역사문화총서라는 이름으로 가야산 학술 아카이브를 구축하였고 그 이후의 후속 작업으로 가야산역사문화총서4 "이기웅의 내포실록 가야산을 걷고 쓰다"를 세상에 내놓는다. 1960년 가야산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 40년 객지에서 살았다. 2005년부터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를 열고 가야산 땅을 밟으며 그곳 풍경을 담아내고 연구하고 있다. 2010년 초반부터 가야산과 가야사(伽倻寺)의 창건
2017년 가야산역사문화총서를 기획하였다.

가야산역사문화총서 1 - 길보유고
가야산역사문화총서 2 - 가야산에서 한국사를 읽다
가야산역사문화총서 3 - 내포 가야산 한시 기행

가야산역사문화총서라는 이름으로 가야산 학술 아카이브를 구축하였고 그 이후의 후속 작업으로 가야산역사문화총서4 "이기웅의 내포실록 가야산을 걷고 쓰다"를 세상에 내놓는다.

1960년 가야산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 40년 객지에서 살았다. 2005년부터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를 열고 가야산 땅을 밟으며 그곳 풍경을 담아내고 연구하고 있다. 2010년 초반부터 가야산과 가야사(伽倻寺)의 창건과 폐사에 관한 구술을 채록하고 문헌을 찾아 오마이뉴스와 굿모닝충청 신문에 연재했다. 현재 가야산 역사문화 연구소는 가야산의 오늘을 기록하고 가야산의 내일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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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7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174*230*30mm
ISBN13
9788967064488

책 속으로

열린 물길이 만든 다양성의 터전, 내포에 대하여
19세기 아산만 삽교천 구만포구를 중심으로
대양으로 통하는 삽교천의 수로는 나라가 번영할 때에는 새로운 문물의 유입 창구가 되었고, 위기의 시기에는 외세의 침입로가 되었다.

내포는 예로부터 열린 공간이었다. 육지와 바다, 내륙과 해안이 만나는 이 땅은 지리적 특성상 외부와의 활발한 접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백제 시기부터 불교가 이곳을 통해 전래되었고, 훗날에는 조선 후기 서학(西學)이라 불린 천주교도 이 물길을 따라 유입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내포 지역이 단지 변방이 아니라, 문명 교류의 관문으로서 기능했음을 입증한다.

특히 삽교천과 구만포구 일대는 내포의 개방성과 진취성을 상징하는 수로였다. 구만포는 서해를 향해 열린 바닷길의 거점이자,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내륙 수로의 종착점이었다. 이 수로를 따라 물산과 사상이 이동했고, 사람들의 왕래와 정보의 소통이 끊이지 않았다. 공세리 성당과 합덕 성당에 남아 있는 서양식 건축양식은 단지 종교의 전파에 그치지 않고, 서구 문명과 미학이 이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성당들은 벽돌 하나하나, 첨탑의 선 하나하나에 시대를 앞선 내포인의 개방성과 예술적 감수성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문화적 수용의 배경에는 내포가 지닌 관용과 다양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이 중앙의 유교적 질서 속에서 폐쇄적으로 흐를 때, 내포는 유·불·서학이 나란히 존재하며 사상과 신앙, 삶의 방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공간이었다. 지배층의 문화와 서민의 생활 문화가 뒤섞이고, 외래 문물이 정착하여 스스로의 것으로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은 내포만의 포용력과 다층적 사회 구조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개방성은 이면도 지니고 있었다. 수로가 열려 있다는 것은 곧 외세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내포 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곳이며,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외세는 때로는 문명을, 때로는 혼란을 함께 싣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포는 닫히지 않았다. 물길이 열려 있었기에 위기도 있었지만, 바로 그 통로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도 함께 들어올 수 있었다.

내포 지역은 지리적으로 생활 자원이 풍부하고 농업 생산력이 우수한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외부의 침입과 자연재해에 자주 시달려야 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부터 이 지역은 왜구의 침탈이 빈번하였고, 때때로 해일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도 겹쳐 지역 주민들의 삶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에는 군량미 생산과 조달의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면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층 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이와 같은 반복되는 재앙과 불안정한 사회적 환경은 주민들로 하여금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을 열망하게 만들었다. 내포 지역과 그 주변에서는 정감록을 비롯한 예언서 신앙이 유행하였고, 19세기 들어 동학과 서학(천주교)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전파되었다.

특히 천주교는 인간 평등과 내세 구원을 강조하며, 신분 질서와 성차별에 억눌려 있던 민중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외적의 침략과 자연재해로 누적된 심리적 불안감은 공동체적 결속과 초월적 구원을 제공하는 신앙 체계를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으며, 내포 지역 주민들에게 천주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삶의 돌파구로 다가갔다.

결국 내포는 천주교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으며, 이는 단지 교리의 전파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삶의 조건과 정서적 필요, 시대적 환경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형성된 결과였다.

삽교천 물길 따라 흐른 신앙과 개방의 역사 - 내포 공소문화의 형성과 전개
조선 후기, 대규모 간척이 시작되기 전의 삽교천 하류는 오늘날의 하천 개념으로 보기는 어렵다. ‘범근내포(犯斤乃浦)’ 또는 ‘유궁진(由宮浦)’으로 불렸던 이 지역은 마치 작은 만(灣)처럼 깊숙이 내륙으로 파고든 수역이었다. 삽교천은 하구부터 약 25km 상류의 구만포까지 수로가 연결되었고, 무한천은 20km 상류의 하평포까지, 곡교천은 성리까지 선박이 드나들 수 있었다. 백중사리에는 큰 해선들이 이들 포구 외에도 더 상류의 포구까지 드나들었다. 만조 시 조수가 깊숙이 밀려들어 수심이 깊어지고, 간조 시에는 광활한 간석지가 드러나 염생식물 군락이 무성하게 자라나곤 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내포를 ‘바다에 열린 내륙’으로 만들었고, 외부 문물의 수용과 종교 확산의 통로 역할을 하게 했다.
19세기 후반, 서해 특히 삽교천의 물길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집중적으로 유입되던 시기, 삽교천은 단순한 세곡선이나 어선이 드나드는 수로가 아니라 문명의 통로였다. 구만포구, 배나드리는 그러한 흐름의 핵심 거점이었으며, 종교·학문·예술·기술 등 다양한 서구 문화가 이 물길을 타고 내포 깊숙이 스며들었다. 특히 종교 분야에서는 천주교를 비롯하여 개신교 여러 종파, 중국의 민간 신앙, 일본 불교 및 시토 종파 등이 유입되었고, 천주교는 삽교천을 따라 집중적으로 전파되며 내포 전역에 뿌리를 내렸다.

이 가운데 천주교는 내포에서 가장 깊은 뿌리를 내렸다. 실제로 1865년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는 “전국 신자의 절반 이상이 충청도에 살고 있으며, 그 중 절반은 내포 지역 출신”이라고 적혀 있다. 이 시기 내포는 단지 새로운 문화와 신앙의 수용지가 아니라 ‘신앙의 요람지’라 불릴 만큼 종교적 밀도가 높았다. 당시 내포의 천주교 공소(公所)는 단순한 기도 공간이나 예배 처소에 그치지 않았다. 공소는 박해를 피해 흩어진 교우들이 함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던 생명의 거점이자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1883년부터 19세기 말까지, 내포 지역에는 무려 100개가 넘는 교우촌과 공소가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삽교천의 수로와 그 지류를 따라 분포된 이들 성지는 서해안 종교사의 결정적 흔적이자, 조선 후기를 살아낸 민중들의 믿음의 흔적이었다. 오늘날에도 가장 많은 천주교 성지가 이 지역에 위치해 있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내포라는 공간이 지닌 개방성과 종교적 열정, 그리고 외부에 열린 자연 조건이 겹쳐진 결과다.

삽교천의 여러 포구 가운데서도 구만포는 역사적 의미가 각별한 장소다. 1868년, 프랑스 선교사 오페르트는 덕산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의 협조를 받아 삽교천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 진입하여 이 포구에 상륙한 뒤, 덕산 가야동에 위치한 남연군 묘소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구만포는 조선 후기에서 개항기까지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던 실질적 항만이었으며, 사람과 물자, 정보는 물론 선교사와 신앙 서적, 교리 교육 등 새로운 문물의 유입 창구 역할을 했다. 아산만에서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는 단순한 교통 경로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와 신앙이 퍼져나가는 상징적 경로였다. 이 길을 따라 교우촌이 형성되고 공소가 세워졌으며,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삽교천을 중심으로 한 내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신앙 지도라 할 수 있다. 물길은 곧 생명의 길이었고, 그 위에 놓인 공소들은 시대의 파고를 버티며 신앙의 끈을 놓지 않은 민중들의 작은 성채였다. 지리적 특성과 교통의 편리성, 그리고 시대적 위기 속에서도 문을 닫지 않았던 내포인의 개방성과 다양성, 자립성과 관용은, 이 지역이 왜 신앙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를 말없이 증명해준다.

내포 문화는 하나의 가치로 수렴되기를 거부하는 문화다. 성리학적 질서가 주류를 이루던 조선에서도 내포는 다양성의 사유가 살아 있었고, 새로운 사상을 실험하며 자신만의 균형을 이루어 갔다. 다름을 존중하고 외부의 것을 포용하는 이 지역의 문화는, 오늘날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시대정신을 선도했던 선례로 평가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내포의 과거는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을 일깨운다. 개방과 관용, 다름의 공존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토대였다는 점이다. 오늘의 내포는 더 이상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하지 않지만, 그 안에 축적된 개방의 기억과 문화적 다양성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다.

불교와 천주교, 성리학과 동학, 민간 신앙, 그리고 고유의 토착 문화가 공존했던 내포는, 지금 이 시대를 향해 다시 묻는다. 진정한 선진성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우리는 이질성과 차이를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과거 내포의 경험은 말한다. 다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속에서 공존의 질서를 세워 나갈 때 비로소 공동체는 지속 가능해진다.

한때 외부 세계와 활발히 소통하던 삽교천의 물길은 이제 막혔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듯 내포의 중심에는 두 개의 철도 노선과 두 개의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물길은 멈췄으나,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교통망은 내포를 다시금 중부권의 심장부로 이끌고 있으며, 충청남도청의 이전은 이 흐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의 내포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갇힌 공간이 아니다. 오랜 침묵의 시간을 지나, 다시 사람과 활력이 모이는 땅으로 변모하고 있다. 폐쇄에서 개방으로, 정체에서 재도약으로 이어지는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영광만이 아니라, 내일의 가능성을 함께 본다.

다시 길이 열리고, 다시 젊은 세대가 모여드는 내포. 그 재부상은 단순한 도시의 확장이나 행정의 이동이 아니라, 이 땅에 스며든 삶의 방식과 문화의 가치가 새롭게 피어나는 증거다.

이번에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람과 뜻의 흐름이다. 내포는 이제, 또 한 번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가야산 연구 20년 - 발굴의 결실과 남겨진 과제

지난 20여 년 동안 가야산을 직접 오르내리며 현장을 살피고, 고문헌을 검토하며, 지역 사회에 전승된 기억을 수집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인된 여러 기록과 유물은 오늘날 가야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임을 보여준다.

1787년에 간행된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덕산현감 최세경이 신축한 동헌 축민당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최세경은 송시열의 제자로서, 병오년(丙午, 1666년) 덕산현감으로 부임해 동헌 축민당(祝民堂)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겨진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 관아 건축과 행정 운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18세기 중반 윤봉오가 남긴 덕산현 축민당 「중건기(重建記)」는 지방 행정과 재건 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문헌으로, 18세기 덕산현과 가야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범죄 수사와 심문 절차를 정리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은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사회 사건을 배경으로, 가야산 일대 세력의 규모와 참여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덕산현이 점차 쇠락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록은 본 총서의 집필 과정에서도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1865년의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역시 주목할 만하다. 1845년 남연군묘가 가야산으로 이장된 이후, 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대규모 토목 사업이 가야동에서 전개되었으나 이를 전하는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일기는 중앙 왕실의 경복궁 중건 사업과 함께 덕산현의 명덕사(明德祠)와 보덕사(報德寺)가 동시에 추진된 사실을 보여주며, 자재와 인력 동원의 구체적 실상을 전한다.

근대기로 넘어오면, 1865년 해미현감 김응집의 일기, 대통회전 수묘군 관련 자료, 1868년 오페르트 사건 당시 수원 총리영 소속 병력 이동 기록은 조선이 서구 세력의 침투에 대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다. 이 기록은 수원에서 덕산에 이르는 행로와 각 고을의 대응 및 지원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1870년 가야산 포수들이 무과 향시에 선발된 사실은 왕실과 가야동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례이며, 1887년 덕산군수 이명우의 기록은 대한제국 성립 직전 지방 행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특히 그의 문집 『묵오유고』는 근대 교육과 행정 개혁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온전한 번역과 소개가 요구된다. 또한 1896년 조종서(趙鍾緖) 군수가 편찬한 『덕산현읍지(德山縣邑誌)』는 내포 지역의 지리·민속·행정을 집대성한 문헌이나 아직 번역되지 않아 대중적 접근에 제약이 있다는 점이 아쉽다. 현대사와 연속된 맥락에서는, 가야산 일대에서 전개된 빨치산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같은 연구 성과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개별 문집 또한 가야산 연구에서 핵심적 의미를 지닌다. 조극선의 일기, 윤봉구, 김진규, 이의숙, 오원, 안세광, 임방, 송인, 이철환(『상산삼매』), 이동윤, 김윤식 등의 문집은 문학적 성취를 넘어,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인문 지형과 교유 관계망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은 단순한 문학 텍스트가 아니라 지역과 시대를 연결하는 사회사적 기록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발굴되지 않은 자료, 혹은 이미 소실된 기록들이 적지 않다. 세월과 전란, 후손의 관리 소홀로 인해 사라진 기록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자료는 언젠가 다시 드러나 연구의 빛을 더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발간하는 『가야산 역사문화총서』 4권 5권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하나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앞으로 6권, 7권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굴될 때마다 가야산의 역사는 더욱 세밀한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야산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오랜 세월 사람과 사상, 문화가 교차해 온 역사 무대임을 다시금 보여줄 것이다.

지난 20년간의 연구 과정을 돌아보며, 앞으로는 후학들이 이 과제를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이 지역의 역사가 더 넓은 시각과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한층 깊이 있게 연구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 이 기 웅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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