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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 가야산 연구 20년 - 발굴의 결실과 남겨진 과제(이기웅)…4
1. 보덕사와 관음암 - 하나였던 절, 그리고 잊힌 이야기…14 2. 서울 봉원사에서 옛 가야사를 만난다 : 가야사의 범종이 전하는 천 년의 울림…27 3. 가야산의 이산표석(李山標石) : 그 정체와 역사적 의미…34 4. 안영중 등 청원서(安永重 等 請願書)에 대하여…38 5. 가야산 ‘금표’와 강제 수용의 역사…43 6. 덕산 가동(伽洞) 남연군묘역 부동산의 국유화 과정 연대별 정리…48 7. 1865년 김응집 일기로 보는 흥완군 면례와 흥선대원군의 덕산 가야동·해미 행차…53 8. 1918년, 가야동 역사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60 9. 덕산읍성에 대한 단상 - 지적도와 옛 사진 한 장을 마주하며 …67 10. 내포 가야산, '걷는 길'의 왜곡과 종교화 시도에 대하여…72 11. 상가리에서 으름재까지 : 길 위에 새겨진 기억과 공존의 기록…75 12. 으름재 사람들의 이야기 :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기억…79 13. 단가(檀家)로 가야사와 옥병계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암각문에 대하여…88 14. 조극선의 글로 보는 태실의 조성과 …그 폐단에 대하여 …95 15. 헌종 가봉태실의 조성 과정과 덕산군 승격…100 16. 왕실 권위 회복의 무대가 된 가야산, 1865년 흥선대원군의 행차와 그 파장 …113 17. 흥선대원군의 행차와 가야동의 격쟁과 상소에 대하여 …120 18. 남연군묘와 조선의 길 - 육로의 한계와 수운에 대하여…124 19. 1917년 흥친왕비 이희공비의 가야동 남연군묘 참배 여정…139 20. 1909년 흥친왕 이재면의 가야동 행차…144 21. 잊혀진 덕산군의 기억. 금석문에서 옛 덕산군의 기억을 되살린다…148 22. 잊혀진 덕산군의 기억. 금석문에서 옛 덕산군의 기억을 되살린다(2)…155 23. 1865년, 흥선대원군의 37일간 가야동 행차에 대하여…158 24. 1868년 삽교천과 덕산현 구만포구, 증기선 ‘그레타호’를 만나다…172 25. 송시열의 〈송자대전〉 「덕산현 축민당기」를 중심으로…177 26. 덕산읍성에 대하여 - 윤봉오 석문집 축민당 중수기를 …중심으로 …189 27. 1781년 유만주의 덕산읍성 귀신 이야기…201 28. 허구의 안내판, 진실을 묻다…208 29. 경복궁 영건일기를 통해 읽는 덕산 상가리의 역사 …213 30. 구만포(九灣浦)는 물길과 지형이 만들어낸 지명이다…221 31. 흥선대원군의 미완의 꿈…226 32. 의천의 가야사 중창 : 내포의 중심, 가야사의 금탑 이야기…230 33. 가야사지 금탑 운제의 사자상에 대하여…234 34. 112년 전, 가야동으로 가는 길에 가로수가 있었을까…237 35, 덕산 가야산 묵오 이명우의 정자 귀래정(歸來亭) 암각문을 고증하면서 …252 36. 김려의「선부군유사」를 통한 18세기 덕산 향촌 권력 구조 분석 …261 37. 이재원의『입조록(立朝錄)』으로 본 1868년 조선왕실의 가야동에 대한 인식…285 38. 덕산 상가리의 역사, 편견 너머에서 다시 읽기…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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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사와 관음암 - 하나였던 절, 그리고 잊힌 이야기
덕산 가야산의 보덕사와 관음암은 별개의 절인 듯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사찰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보덕사 옆에는 작은 절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관음암이다. 일제강점기의 사찰 관련 기록에 따르면, 당시 관음암은 독립된 절이 아니라 보덕사에 속한 암자(庵子)였다.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와 현재 등기부 등본 등 행정 서류상으로도 관음암의 대지 소유권은 보덕사에 귀속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보덕사와 관음암은 하나의 사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간에 이 절에 대해 “흥선대원군의 애첩 초선이 머물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문헌적 근거나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문헌 자료와 불교계와 왕실 후손들의 구술에 따르면, 이곳은 사동궁에서 생활하던 궁녀들이 머물던 공간이었음을 시사하는 정황들이 확인된다. 1970~80년대 보덕사에서 세 차례 안거를 지낸 무구 스님(현 서산 옥천사 주지)의 증언에 따르면, 그 시기 보덕사와 관음암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으며, 사실상 하나의 사찰처럼 운영되었다. 특히 관음암에 주석하던 노스님이 거주하던 법당에는 공개되지 않은 큰 괴짝이 서너 개 있었고, 그 안에는 궁녀들의 옷가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0년 뒤 다시 방문했을 때는 문화재를 노린 도둑이 침입해 스님이 위협을 받았으며, 괴짝과 유물들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한다. 후일 노스님은 괴짝에는 궁녀들의 옷이 가득했는데 그 옷들이 너무 낡아 여러 날에 걸쳐 불태웠다고 전했다고 한다. 관음암의 궁녀들은 누구였을까?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서 생활하던 궁녀들이 왕이 승하하거나 일정 연령이 되면 퇴궁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운현궁과 사동궁에 머물던 궁녀들 가운데 일부는 덕산 수덕사에서 노후를 보냈으며, 이들 중 일부가 관음암에서도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865년부터 조선 왕실에서는 남연군묘를 참배하기 위한 가야동 행차가 빈번해졌고,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거주와 예배를 위한 공간의 필요성에 따라 보덕사가 창건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왕실의 행차를 맞이하여 시종을 들고 제례를 담당할 궁녀들이 관음암에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만공(宋晩空), 보덕사 주지가 되다 보덕사 창건 초기, 벽담도문(碧潭道門)이라는 승려가 수호 일품 대승(守護一品大僧)의 품계를 받아 주지로 임명되었다. 벽담은 한양 시절부터 고종과 인연이 깊었던 승려로, 서울 개운사에서 어린 시절의 고종과 함께 지냈던 인물로 전해진다. 이후 보덕사는 근대 선불교의 중흥을 이끈 대표적 승려 송만공(宋晩空) 스님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주지로 있었다. 송만공 스님은 이 시기 의친왕 등 왕실 인사들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의친왕 서거 이후 사동궁 출신 궁녀들이 보덕사 부속 암자인 관음암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결론적으로, 가야산 상가리의 보덕사와 관음암은 일제강점기까지도 제도적·생활적 측면에서 하나의 사찰로서 존속하였다. 비록 창건 연대는 비교적 짧지만, 이 두 절에는 조선 왕실과 사동궁, 궁녀들의 삶이 얽힌 풍부한 서사가 깃들어 있다. 그만큼 보덕사와 관음암은 내포 지역 불교사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사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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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연구 20년 - 발굴의 결실과 남겨진 과제
지난 20여 년 동안 가야산을 직접 오르내리며 현장을 살피고, 고문헌을 검토하며, 지역 사회에 전승된 기억을 수집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인된 여러 기록과 유물은 오늘날 가야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임을 보여준다. 1787년에 간행된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덕산현감 최세경이 신축한 동헌 축민당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최세경은 송시열의 제자로서, 병오년(丙午, 1666년) 덕산현감으로 부임해 동헌 축민당(祝民堂)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겨진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 관아 건축과 행정 운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18세기 중반 윤봉오가 남긴 덕산현 축민당 「중건기(重建記)」는 지방 행정과 재건 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문헌으로, 18세기 덕산현과 가야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범죄 수사와 심문 절차를 정리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은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사회 사건을 배경으로, 가야산 일대 세력의 규모와 참여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덕산현이 점차 쇠락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록은 본 총서의 집필 과정에서도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1865년의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역시 주목할 만하다. 1845년 남연군묘가 가야산으로 이장된 이후, 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대규모 토목 사업이 가야동에서 전개되었으나 이를 전하는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일기는 중앙 왕실의 경복궁 중건 사업과 함께 덕산현의 명덕사(明德祠)와 보덕사(報德寺)가 동시에 추진된 사실을 보여주며, 자재와 인력 동원의 구체적 실상을 전한다. 근대기로 넘어오면, 1865년 해미현감 김응집의 일기, 대통회전 수묘군 관련 자료, 1868년 오페르트 사건 당시 수원 총리영 소속 병력 이동 기록은 조선이 서구 세력의 침투에 대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다. 이 기록은 수원에서 덕산에 이르는 행로와 각 고을의 대응 및 지원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1870년 가야산 포수들이 무과 향시에 선발된 사실은 왕실과 가야동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례이며, 1887년 덕산군수 이명우의 기록은 대한제국 성립 직전 지방 행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특히 그의 문집 『묵오유고』는 근대 교육과 행정 개혁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온전한 번역과 소개가 요구된다. 또한 1896년 조종서(趙鍾緖) 군수가 편찬한 『덕산현읍지(德山縣邑誌)』는 내포 지역의 지리·민속·행정을 집대성한 문헌이나 아직 번역되지 않아 대중적 접근에 제약이 있다는 점이 아쉽다. 현대사와 연속된 맥락에서는, 가야산 일대에서 전개된 빨치산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같은 연구 성과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개별 문집 또한 가야산 연구에서 핵심적 의미를 지닌다. 조극선의 일기, 윤봉구, 김진규, 이의숙, 오원, 안세광, 임방, 송인, 이철환(『상산삼매』), 이동윤, 김윤식 등의 문집은 문학적 성취를 넘어,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인문 지형과 교유 관계망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은 단순한 문학 텍스트가 아니라 지역과 시대를 연결하는 사회사적 기록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발굴되지 않은 자료, 혹은 이미 소실된 기록들이 적지 않다. 세월과 전란, 후손의 관리 소홀로 인해 사라진 기록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자료는 언젠가 다시 드러나 연구의 빛을 더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발간하는 『가야산 역사문화총서』 4권 5권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하나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앞으로 6권, 7권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굴될 때마다 가야산의 역사는 더욱 세밀한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야산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오랜 세월 사람과 사상, 문화가 교차해 온 역사 무대임을 다시금 보여줄 것이다. 지난 20년간의 연구 과정을 돌아보며, 앞으로는 후학들이 이 과제를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이 지역의 역사가 더 넓은 시각과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한층 깊이 있게 연구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 이 기 웅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