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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인천 섬과 섬사람들의 외침 1부 덕적군도의 재발견 덕적군도의 발견 덕적군도의 섬 주민 『덕적도사』 교주(校註) 덕적군도의 언어 덕적팔경 덕적도 시 「먕야음」과 「어명시」 덕적군도의 혼 2부 황금 어장과 안강망의 시대 조기의 신 임경업과 연평도 대청도 고래와 고래 파시 안강망의 황금시대 안강망의 어항, 북리 북리항의 마지막 배 목수 태풍과 어부 조난비 3부 섬사람들 서포 김만중과 소연평도 원(元) 순제와 대청도 하와이 이주민과 섬사람들 임용우와 섬에서의 만세 소리 훈맹정음의 창안자 박두성 섬사람 최분도 신부 기형도와 연평도 땅콩 농사로 한평생 서포리 직업 낚시꾼 4부 섬의 외침, 섬에서의 삶 안강망 어선 춘덕호와 납북 어민 굴업도에서 배우다 일본으로 팔려 간 굴업도 민어 굴업도 시 굴업도 지명 이야기 무인도를 찾아가다 목숨을 건 이동 5부 역사의 섬 교동도에 가다 교동도를 찾아가다 병자년의 환란 고구리 사람들 관미성을 찾아서 유배자의 적거지 물푸레나무를 기리다 청주벌을 보다 배를 기다리다 에필로그 다시 교동도를 가다 부록 참고 문헌/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들/덕적군도사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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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가마우지와 갈매기만 오롯이 사는 곳이 아니다. 우물이 있는 섬마다 마을이 있고 당산을 모시고, 대대로 세거(世居)한 집안에는 조상의 신주를 모신 감실(龕室)이 있다. 고유의 예절과 공동체의 섬 문화를 꽃피우며 살아왔다. 두레 굿이나 배치기 노래 등 섬마다 특색 있는 마을 대동계와 갯문화가 있다. 뒤란에서 정한수를 떠 놓고 비나리를 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사람이 사람의 길을 기원하고 우주의 뭇 생명을 소원하는 일만큼이나 종교적인 것은 없다. 나는 가끔씩 섬사람들에게서 영성을 발견한다. 미물조차 허투루 내쫓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진 고난의 삶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낳게 했을 터이다.
p.26: 고려가 해상무역으로 번성할 때에는 한강 하구 일대의 경기만(京畿灣)에 속한 섬인 교동도, 덕적도, 장봉도, 영종도가 덩달아 흥했다. 고려의 멸망은 곧 해상 세력의 쇠퇴를 의미한다. 해상의 주요 통로로 번성했던 교동도가 조선조에 이르러 왕가의 유배지로 전락하고 강화도에 행궁(行宮) 자리를 내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기만 일대의 섬들의 운명은 곧 왕조의 해상에 대한 태도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섬의 흥망성쇠가 육지 중심이냐 해상 중심이냐에 따라서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p.84: 인천 앞바다의 섬들을 다니다 보면 오랜 체취가 담겨 있는 자연경관과 섬 문화를 만난다. 섬마다 펼쳐진 해당화 피는 백사장, 덕적도의 송정과 밭지름, 서포리에 있는 소나무 밭, 백아도와 울도의 돌담집, 울도의 등대, 백아도 당산목, 이작도의 풀등, 승봉도의 이일레 해변, 자월도의 갯팃길, 굴업도의 목기미, 새들의 낙원 무인도인 서만도ㆍ동만도, 장봉동의 소사나무 당산목, 교동읍성과 계류석, 화개산성 등 무수히 많은 섬들의 자연문화유산과 마주한다. 이들 자연문화경관은 모두 섬사람의 생활과 어우러져 조화롭게 빛난다. p.119: 섬의 노인 분들은 덕적군도 일대가 황금 어장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해방 이전만 해도 정식 어장은 우리나라에는 단 두 곳뿐이었다. 동해와 울도어장이었다. 흔히 연평도어장을 들지만, 울도어장은 당시 우리나라의 최대 어장이었다. 그만큼 동해와 덕적군도는 황금 어장으로 전국 각지에서 조업 배들이 모여들었다. 멀리는 일본의 나가사키, 중국 단둥(丹東)이나 산둥(山東)에서도 왔다. 덕적군도 울도 근방의 뱅이어장에는 새우와 민어가 지천이었다.갯고랑이 발달해 새우와 민어의 먹이가 풍부한 이 어장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만큼 물고기가 많아서 갈고리로 고기를 퍼 올렸다고 한다. p.131: 안강망 어업의 쇠퇴는 인천 부두 경제의 쇠퇴로 이어졌다. 안강망 어선의 구조 조정으로 화수부두, 북성부두, 연안부두 등이 활기를 잃었다. 특히 안강망의 전진기지로 명성을 떨쳤던 연안부두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그물, 닻 등 배 관련 용품 등을 파는 선구업(船具業)은 물론이고, 안강망에 들어가는 부식 등의 거래와 선원 가족들의 소비도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았다. p.173: 인천의 섬은 개항과 함께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그곳에서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으로 외로이 떠났을 섬사람들의 고된 삶과 역사가 고스란히 숨결로 전해 온다. 그들이야말로 생존을 위해 다른 세상을 꿈꾸며 떠났던 개척자들인 셈이다. 인천 섬에 가면 이방인으로 외롭게 살면서 평생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을 이민자들이 떠오른다. p.197: 기형도(奇亨度, 1960~1989)는 연평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碧城郡)이었으나 6ㆍ25 때 연평도로 피난 왔다. 1964년 일가족이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했다. 경기도 광명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탓에, 그가 섬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서해 5도 중에 하나인 연평도 태생으로 섬사람이다. 섬사람들의 풍습이 다 그렇듯이, 아마 기형도도 그가 태어난 연평도 땅 어딘가에 탯줄을 묻었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그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섬사람 특유의 영혼이 느껴진다. p.211: 웃음 짓는 늙수레한 입가에는 모진 풍파가 배어 있다. 땅콩 농사에 손마디는 갈퀴를 닮았다. 오로지 땅콩 농사가 전부였던 젊은 시절을 떠올릴 때면 절로 미소가 났다. 모진 땅콩 농사에 시커멓게 구들장처럼 타들어 간 세월이지만, 화전을 일구고 수확하고 동네 사람들 한데 모여 가마니 추렴을 하던 그때가 오히려 정겨웠다.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지, 고씨 민박 문설주에 걸린, 이 씨가 18세 때 찍었다는 흑백 사진에서는 다소곳한 섬 색시가 부끄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pp.227~228: 당시 연안부두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간첩을 때려잡는 기술자로 통하던 몇몇 정보과 형사들이 있었다. 어떤 경찰은 선원을 간첩으로 신고하고 특진에다가 보상금을 받고 출세했다고 했다. 그때는 연안부두 바닥이 형사들에게는 특진을 약속받는 곳이었다고 했다. 형사들은 납북되었다 귀환한 선원들을 동향을 파악해서 내사한 후, 고문하여 간첩으로 허위 조작해 처벌했다. 가족과 생계를 위해 안강망을 타고 조업을 하다가 납북된 것이 죄라면 죄였다. 법 없이 살아온 선량한 선원들이 순식간에 간첩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p.245: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과 골프장 건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섬 사유화가 가져올 공공성의 위기 때문이다. 굴업도 골프장 건설을 목적으로 섬의 98.5퍼센트가 사유화되었다. 이로 인한 문제의 심각성은 의외로 크다. 즉, 자본이 섬을 멋대로 파헤칠 수 있다는 위험성에 더하여, 섬의 출입이 막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주변 해역까지 사유화될 위험성마저 있다. 따라서 섬의 특수성에 맞게, 주민들 손에서 섬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그들과 섬을 공유하는 식의 비(非)사유화의 대상으로 섬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pp.280: 인천의 섬사람들은 선사시대 이래 대대로 생존을 위해 입도하거나 혹은 피난처, 유배지로 왔다가 정착해 섬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왔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새들이 물과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섬에 안착하듯이, 결국 사람도 생존을 위해 오지인 섬까지 들어오는 것이다. 새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무릅쓰고 이주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필시 생존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 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왜 새를 보는가? 이것은 곧 ‘우리는 왜 꿈을 꾸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p.288: 때는 엄동이라 창후리(倉後里) 수로에 살얼음이 끼었다. 유빙이 흐르는 염하(鹽河). 창후리 포구에서 조강(祖江)을 건너노라니 낯선 풍경이 을씨년스럽게 다가왔다. 추운 날씨 탓에 창후리 포구는 얼어붙은 부동항을 연상케 했다. 인기척 하나 없는 꽝꽝 언 조강 너머로 황해도의 개풍(開豊)이 가까웠다. 가슴에 왠지 모를 답답함이 스미어 왔다. p.298: 사실인즉 세거나 가업(家業)이나 가학(家學)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어딘지 모르게 조각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긴 본래 세거한 집안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주해 와 정착해서 살다 보면 그것이 세거이고, 세거하다 보면 토착민이 되는 것이 아닌가. 난민으로 정착해서 아직도 난민인 채로 남아 생계를 이어 가는 피난의 시대는 언제 끝날 것인가. p.326: 뱃길이 살아 있을 때 섬 문화는 꽃을 피운다. 뱃길이 끊기자 섬을 고립되었다. 교동도가 영화롭던 시절은 뱃길이 살아 있던 때였다. 해상무역이 번성했던 시절에 각종 해산물과 농산물의 집산지가 바로 교동도였다. 뱃길로 왕래가 빈번했던 전성기가 교동의 황금시대였던 것이다. 분단으로 인하여 황해는 죽음의 바다, 금단의 바다가 되었고 교동도를 비롯하여 경기만 일대의 섬 문화는 활기를 잃었다. 교동도와 경기만 일대의 섬이 부활하려면 뱃길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것만이 섬을 섬답게 살리는 길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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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관점에서 인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문화의 길] 총서 열 번째 책. 인천 출신 시인 이세기가 ‘섬’을 창으로 삼아 인천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본다.
* 인천 섬들의 역사, 문화, 사람, 자연에 관한 종합 보고서 육지(본토) 사람들에게 섬은 멀다. 공간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상당하다. 평소에 섬은 육지 사람들의 시야와 사고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컨대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 선정’ 같은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잠깐 관심을 두기도 하지만, 쟁점이 해소되면 관심 또한 이내 사그라든다. 혹시 평소에 관심을 가진다면 ‘여행지’로서 바라볼 때 정도이다. 육지의 일상에 지쳤을 때 찾아가 삶의 고단함을 달랠 수 있는 비일상의 ‘낭만적’ 공간으로 섬을 보는 것이다. 저자는 육지 사람들의 이 통념에 대해 “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섬에도 사람이 산다 함은 섬에도 그 나름의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는 말이다. 인천의 문갑도 출신인 저자는 오랫동안 사료를 뒤지고, 섬사람들을 만나고, 섬들을 걸으면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바탕으로 인천의 섬들을 인문적 성찰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석기 시대에 인천 섬들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고, 지금은 누가 어떻게 살면서 고유의 섬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다면적으로 보여 준다. 인천 섬들에 관한 제대로 된 역사서는 고사하고 단순한 기행서마저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저자의 이러한 인문적 고찰 노력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저자가 보는 인천 섬들은 아름답고 슬프다. 원시의 숨결을 간직한 자연경관은 아름답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정 또한 아름답다. 그러나 그 삶은 슬프다. 자립 기반이 약하기에 생활환경은 척박하고, 나날의 삶은 고군분투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접경 지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분단의 아픔이 더해지고, 최근에는 개발 열풍이 불면서 섬이 팔리고 자연환경마저 파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 섬의 이 두 가지 모습은 육지와 한몸이면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떨어져 있다는 섬의 존재 조건을 떠올리게 한다. 둘의 관계 맺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자립성이 약한 섬의 운명은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섬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슬픔은 줄이는, 그리고 그것이 육지의 이해에도 부응하는 ‘상생(相生)의 길’은 무엇인가? 실은, 저자의 모든 노력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지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문화의 길’ 총서 인천문화재단과 한겨레출판이 손잡고 펴내는 새로운 역사/문화 총서. 인천은 ‘근대의 관문’이라는 도시 형성의 역사적 기원으로 인해 많은 이야깃거리를 안게 되었고, 이후의 성장 과정에서 다른 지역/문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특한 지역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문화의 길’은 오늘의 지역, 지역성, 지역문화를 이룬 그러한 역사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그려 가는 새로운 문화지도이다. 역사와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함은 지역사와 한국사의 맞물림, 특수성과 보편성의 연결 지점들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조명하는 기획을 통해 지역문화의 어제를 성찰하고 오늘을 점검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생활사의 근거지로서 지역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인천’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한국 근현대의 초상화가 바로 ‘문화의 길’ 총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