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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참고 지도 1부 연평도의 황금시대 수백억 조기 군단이 몰려오던 연평도 서해안을 바늘로 꿰라면 꿴다 조기가 마술을 부리나 보죠 햇빛과 바람, 밤이슬 맞으며 변신하던 굴비의 고장 한 배를 타면 천 배를 건너다녔다 사월 초파일은 연평도 조기 생일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세 목선에서 장작불로 밥해 먹고 바닷물로 세수하고 연평도 어업조합 전무 하지 황해도 도지사 안 한다 연평도 조기의 신 임경업 장군 기생놀음에 날 새는 줄 모르던 작사판 완전 무법이야, 무법천지 연평도와 하인천 어시장 연평도 항금시대의 종말 2부 인천 최고의 어장 덕적도 신선의 섬, 민어의 고장 능구렁이 울면 비가 오고 쟁기로 바다 밭을 갈던 어민들 민어떼가 몰려들면 바다가 온통 뻘갰다 1936년 8월, 민어의 어기로 덕적도 대혼잡 덕적도 선주들은 돈을 포대로 담아 놓고 썼다 굴업도 앞바다가 인천 항구 같았어 굴업도는 정거장이었어, 전국의 배들이 여기서 다 잡아 갔지 3부 저무는 소래포구에 새우젓 배 들어오면 도시의 섬, 추억을 파는 소래포구 새우젓 배 들어오면 파시가 서고 피난민들이 소래포구 어업 발달 이끌어 총각은 새우를 먹지 말라 목숨 걸고 새우를 잡던 시절 소래가 다 빨바탕이라 길바닥이 모두 뻘거덕 뻘거덕 했지 월동을 대비해 살이 오른 가을 꽃게도 일품 대동굿은 사라지고 교회에서 출어 예배 에필로그 참고 문헌 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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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의 시장, 파시(波市)는 본래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영광 ‘파시평(波市坪)’이 등장할 정도로 파시의 역사는 길다.
과거 성어기가 되면 고기잡이배들이 조업하는 어장에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어선들은 생선을 팔았고 상선들은 식량이나 땔감 따위를 팔았다. 어선과 상선들이 뒤엉켜 서로 사고파는 해상시장이 파시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어선과 상선이 많아지고 어획량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차츰 어장 근처의 섬이나 포구 등으로 옮겨갔다. 파시는 어판장과 선구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숙박시설, 각종 기관까지 갖추어진 성어기의 임시 촌락으로 발전했고 어업 전진기지 역할을 겸했다. ---「프롤로그」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다. 영광의 칠산 바다와 함께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 어장이었다. 그때는 동해의 명태만큼이나 황해에도 조기가 지천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바다에는 조기가 ‘버걱버걱’했다.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는 은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봄철 연평 바다는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어선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시장, 파시(波市).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고 어선을 쫓아온 ‘물새떼’가 어부들을 유혹했다. 전성기에는 색주가 100여 곳에 ‘물새’라 부르는 작부들이 500명도 넘었다. 파시 동안 작은 섬 연평도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밤낮 없이 흥청거렸다. ---「수백억 조기 군단이 몰려오던 연평도」 조기를 따는 작업장의 불빛으로 추자도의 가을밤은 환하다. 추자 어화가 부둣가에 피었다. 기관 돌아가는 소리, 수천 촉 백열등 아래 그물을 당겨가며 조기를 딴다. 밤 10시, 이제 추자도의 조기 따는 일도 끝이 났다. 일꾼들은 돌아가고 선주와 선원들이 남아 그물을 세척하고 다시 배 안으로 끌어올린다. 내일의 출어 준비를 마친 다음에야 선원들의 고단한 하루도 마감될 것이다. 이 조기잡이 풍경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연평도와 칠산 어장에서 조기가 멸족한 길을 흑산도와 추자도가 그대로 밟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미래에 눈감은 선주들의 욕심이 줄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세상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히 풍족한 곳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는 언제나 모자란 곳이다. ---「조기가 마술을 부리나 보죠」 오랜 세월 남획의 결과 조기의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던 시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69년부터 황해에 한랭전선이 깔려 칠산, 연평 어장의 수온이 올라가지 않았다. 물 온도가 섭씨 11~12도 이상이 돼야 조기가 회유하는데 수온이 차자 조기떼는 북상하지 않고 남해에 머물렀다. 유자망 어선들은 가거도나 홍도 근처에 그물을 내리고 조기를 잡아 올렸다. 조기떼가 연평 어장으로 올라갈 길이 아주 막혀 버린 것이다. 1969년에는 어로저지선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고 어선들의 입출항마저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연평도 근해에서는 어선이나 운반선의 단독 운항이 금지되고 여객선 출항 시에만 따라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수백 년을 이어오던 연평 어장의 조기잡이가 끝나고 파시도 종말을 고하였다. ---「연평도 황금시대의 종말」 5ㆍ16으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고도성장 정책을 수산업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과거 안강망 배들은 한 척당 한 틀의 그물만을 허가했다. 하지만 5ㆍ16 이후 수산청에서 4틀까지 허용을 확대했다. 어선의 대형화와 기계화, 나일론 그물의 등장, 그물 틀수 증가로 단기간에 어획고가 올라가고 수산업은 발전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한정된 어족 자원을 단기간에 싹쓸이했으니 어장은 황폐화되고 어족은 씨가 말랐다. 황해 바다에서 조기가 사라지고 민어가 사라지고 홍어와 갈치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어선들은 동지나해까지 쫓아가며 잡기 시작했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무한정일 수 없는 수산업까지 고도성장 정책을 적용한 군사정권의 정책 실패가 가져온 결과였다. 한때 300여 척에 달하던 인천 안강망 수협 어선이 지금은 몇 척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인천 지역의 어업은 쇠퇴했다. ---「덕적도 선주들은 돈을 포대로 담아 놓고 썼다」 산란을 끝내고 연안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은 꽃게들은 늦가을이면 다시 깊은 바다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수면으로 뜨는 봄 꽃게와 달리 가을 꽃게가 가라앉으려는 성향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살이 오른 꽃게는 11월 말이면 연안에서 자취를 감춘다. 월동을 위해 깊은 바닷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더러 꽃게 풍년인 해도 있지만 황해 바다에서 꽃게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계속되는 대량 포획과 바닷모래 채취로 산란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꽃게와 물고기들의 집을 헐어다 사람의 집을 짓는다. 바다 생태계의 파괴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소래포구에서도 꽃게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아파트 벽 속에는 얼마나 많은 물고기 알들이 화석처럼 굳어져 있는 것일까. 오늘 소래포구를 포위한 저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사람의 집인 동시에 물고기들의 무덤이다. ---「월동을 대비해 살이 오른 가을 꽃게도 일품」 한국 바다와 섬에는 사라진 어업의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파시는 그대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하지만 파시의 소멸과 함께 파시의 이야기와 역사도 잊히고 소멸되어 가고 있다. 마지막 남은 파시의 흔적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 연평도 어업조합 건물처럼 사라져 버린 파시의 유물들이 얼마일까? 파시를 경험했던 세대의 죽음과 함께 묻혀 버린 이야기들은 또 얼마일까? 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 어디 파시뿐이랴마는, 섬을 기록하는 나그네는 파시의 역사가 아주 소멸해 버릴 것이 안타깝다. 더 늦기 전에 전국의 섬과 포구에 남아 있는 파시 유물들의 보존 방안이 마련되고 그 소중한 기억들이 기록으로 온전히 복원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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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오아시스 파시(波市)
파시(波市)는 고기잡이철에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 시장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영광 '파시평'이 등장하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사는 길다. 파시는 보통 한두 달 정도 계속되었다. 섬마을에 파시가 서면 수백, 수천 척의 어선과 상선이 드나들고, 작고 한가롭던 섬은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짧은 시간, 작은 공간에서 온갖 인간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해안 3대 파시로 유명한 흑산도, 위도, 연평도 파시 외에도 성어기가 되면 전국 각지의 섬과 포구에 파시가 형성됐다.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바다의 신기루 파시 그러나 이제 파시는 없다. 어선들이 들어오는 시간에 항구와 포구에서 잠깐씩 시장이 설 뿐이다. 회유하던 어류의 소멸과 무분별한 남획에 따른 어획량 감소, 어업 기술의 발달로 더 이상 중간 기항지가 필요 없게 된 것 등이 임시 이동 촌락, 파시가 사라진 주된 이유다. 이제 파시란 말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일상어가 아니다. 한때 그토록 융성했던 어업문화의 흔적들도 세월의 풍파 속에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다. 섬에 가면 간간이 노인들의 기억 속에 편린으로만 남은 파시의 추억담을 엿들을 수 있을 뿐이다. 발로 꼼꼼히 복원한 파시의 기억 파시는 우리나라 어로 활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현상 중 하나였다. 그대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이 책은 그런 파시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저자는 파시의 실체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연평도, 덕적도, 굴업도, 소래 등 인천 지역뿐 아니라 추자도와 법성포, 안마도, 송이도, 임자도, 재원도 등 과거에 파시가 번성했던 다른 지역들까지 찾아다녔다. 남은 기록은 많지 않고 얼마 되지 않는 파시 경험자들은 늙어 기억이 희미했지만, 끈질기게 발품을 팔고 귀동냥을 해서 단 한 줄이라도 더 기록을 남기려 애썼다. 저자의 그런 끈질긴 노력 덕분에, 우리는 미흡하나마 우리 어업사의 주요했던 한 장면에 대한 밑그림을 얻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