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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용동(龍洞)을 배회하던 무심한 청춘에게 1장 기생이란 기생의 유래 기생의 풍속 명기(名妓)의 요건 2장 권번의 성립과 용동권번 권번 성립 이전의 주루(酒樓) 풍경 권번의 성립과 용동권번 용동권번의 활동 영역 권번의 교육행정 권번의 교과 내용 권번의 일과 3장 용동권번의 기생들 『조선미인보감』 속의 용동권번 기생들 행적을 알 수 있는 용동권번 기생들 4장 기명(妓名)과 화대(花代) 전국에 등장하는 ‘화중선(花中仙)’ 기생 재상 혹은 기생 실업가 5장 일제하의 인천 화류계 인천 부도정 유곽 용동 카페와 바(bar)로 몰려드는 야유랑(冶遊郞) 화류병 6장 인천 화류계의 변용과 왜곡 미군정 및 휴전 이후: 기지촌과 유엔군 위안소 군사독재 및 산업화 시기: 옐로우하우스와 끽동 산업화 시기 이후: 재개발의 이름으로 에필로그 기예(技藝)는 간데없고 욕정(欲情)의 흔적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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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서 가무악(歌舞樂)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로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가무악을 구사하는 여자들이다. 잔치나 술자리의 흥이 가무악을 통해 고조되기에, 기생들의 행위는 ‘놀다(戱)’의 의미에 포괄된다. 기생이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는 것을 흔히 “놀음 나간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 p.5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기녀에게 미색은 부차적인 것(妓女以色爲副品)”이라 한다. 실제로 『북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남자들이 기녀들에게서 가장 중시했던 것은 ‘회해언담(?諧言談, 해학과 말주변)’이었고, 그다음이 음률(音律)이나 주거음식(住居飮食)의 순서였다. 단순히 말하는 꽃이 아니라 분별품류와 형척인물을 바탕으로 하는 해학과 말주변을 지녀야 진짜 해어화(解語花), 명기(名妓)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25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 기생조합(妓生組合)의 일본식 명칭으로, 직업적 기생을 길러 내던 교육기관이자 기생의 활동을 관리하던 조합이다. 당시의 기생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기에 모든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妓籍)을 두어야만 활동할 수 있었다. 권번은 기생들이 손님에게 받은 화대(花代)를 관리했고, 기생들의 세금을 정부에 바치는 중간 역할까지 맡았다. 권번은 그 직접적인 뿌리를 대한제국(1897~1910) 말기 한성기생조합소(漢城妓生組合所) 및 한일 병탄 직후의 다동조합(茶洞組合)과 광교조합(廣橋組合)에 두고 있다. --- p.37 “인천조합 예기 중에, 일등 명기 누가 될꼬 …… 조점홍이 첫째 되리, 그 색태로 볼지라도, 일등 미인 될 것이라, 아름답고 어여쁜데, 탈속함이 더 귀하고, 유창하다 일본말은, 동경 유학 갔다 온 듯, 솜씨 있는 매란국죽, 화사화백 합흠하네” --- p.72 기생은 기명(妓名)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기생이 되기 전에는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사용하다가 기생 수련을 받고 난 후에는 기명이 원래 이름을 대신한다. 기명은 해당 기생의 가무악을 비롯해 기생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가모(假母, 혹은 행수)에 의해 부여된다. 가모가 수련생들에게 기명을 부여함으로써 기생들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것을 인식하고 수련을 받았다. 흔히 모권적(母權的) 전통이 남아 있는 기생과 무녀 사회에서는 새로운 이름으로 활동하는 게 일반적이다. --- p.101 기생에게 사치는 기생 노릇을 온전히 하기 위한 방편이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그런 것도 일부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할 처지이기에 사치를 부려야만 했다. 기생의 사치는 일반인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 그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첫인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모든 기생이 같은 수준의 사치를 부린다 하더라도 타인들의 시선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치 이외에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무악(歌舞樂)의 수준에 따라 시선이 집중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였다. 사치스러운 겉모습보다는 기생 노릇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소양을 갖추는 게 중요했다. --- p.106 유곽(遊廓)은 매음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을 말한다. 돈이나 특정한 대가를 받고 성적(性的)으로 상대하는 행위를 매음이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유곽이다. 단순히 매음에 한정된 게 아니라 ‘술’과 ‘요리’ 등이 한데 묶여 있었다. 그래서 이런 곳을 ‘특별요리점’이라 불렀다. --- p.113 유곽의 설치는 일본 거류민의 성병 확산을 방지하고 주둔군의 안전한 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배후에는 해당 지역의 도시 기반을 구축하려는 일련의 의도, 즉 해안을 매립하고 도로를 개설하고 수도를 설치하는 등의 비용을 세금을 통해 확보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성병 관리와 세금 징수의 편의를 위해 유곽을 특정한 공간에 모아 두어야 했다. --- p.114 용동에 음식점이 증가하여 주민들이 불안을 느낀다는 《동아일보》 기사는 식당과 관련된 게 아니라 카페나 바(bar)라는 신흥 술집의 등장과 관련된 것이었다. 실제로 1932년 용동과 경동 주변에서는 50여 개의 카페에서 여급 2백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인천 기생 80명 중에 30명이 바와 카페 쪽으로 전향하였는데(《매일신보》 1942. 2. 17.), 이는 여급 수입이 기생 수입보다 나았을 정도로 바와 카페가 야유랑들에게 각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29 화류병(花柳病)은 성행위에 의해 감염되는 병이다. 주로 기생 따위의 ‘노는 계집’들이 활동하는 화류계(花柳界)를 매개로 감염되기에 화류병이라 한다. 화류병은 특정인의 문제로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기에 이에 대한 경계와 주의는 어느 때건 계속되었다. 하지만 화류병에 감염된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감염자는 공적(公的) 치료를 멀리하고 민간요법이나 사술(邪術)에 기대어 치료하려 했다. --- p.130 1945년 9월 8일, 인천에 도착한 미군은 군정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특히 그해 11월경 남한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이 7만여 명에 이르자 군정에서는 병사들의 성적 욕구에 관심을 두어야 했다. 병사들의 욕구를 무조건 억제할 수 없기에 매매춘을 단속하면서 동시에 묵인하는 이중 정책을 폈다. 예컨대 “전염 화류병을 가진 부녀가 주둔 군인에 대한 성관계의 유혹”(미군정 법령 제72호, 1946. 5. 4.)이란 조항은 화류병이 없는 부녀의 매매춘은 합법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항은 성병 검사를 기피하는 매춘 여성들을 걸러내고 주둔군의 안전한 매매춘을 방조하려는 의도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 p.141 박정희 정권은 윤락행위 방지법을 무시하고 기지촌 육성 정책을 펴기까지 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술집에는 면세 혜택을 주었으며 관광사업 진작이라는 명목으로 술집 주인들의 해외 연수도 시켜 주었다. 심지어 기지촌의 행정관리들이 윤락 여성을 강당에 모아 놓고 ‘당신들은 한국을 지켜 주러 온 미군을 위안하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칭송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동아일보》 1995. 2. 10.) --- p.144 군사독재 및 산업화 시기에 활황을 맞았던 옐로우하우스와 끽동은 한국은 모든 성매매 집결지들을 2007년까지 폐쇄한다는 ‘성매매 방지법’(2004. 3. 23.)이 제정되자 타격을 받았다. 2004년 9월부터 경찰의 특별 단속이 실시되자 업소는 영업을 중단하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한편 성매매 여성들을 주축으로 하는 인천 숭의동의 상조회와 부산 완월동 해어화라는 단체는 ‘여성단체연합’을 방문하여 탈성매매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자활 지원을 요구하여 지원 합의를 이끌어 냈다. 정부에서 여성발전기금 5억 3천만 원을 긴급 편성하여, 2004년 11월 인천 숭의동과 부산 완월동의 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자활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성매매를 위한 자활 지원 사업이 해결책이 될 수 없었기에 성매매 여성들은 영업을 포기하지 못했다. --- p.155 인천 화류계를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부제로 달았다. ‘기예(技藝)는 간데없고 욕정(欲情)의 흔적만이’는 용동권번 출신 기생의 관련 자료가 좀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 부도유곽에서 출발한 욕정의 흔적이 지나치게 또렷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붙여 본 것이다. 가혹한 수련을 통해 구사하는 기생의 기예는 창기의 욕정이 응축된 추파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명기의 기예는 간데없고 창기의 욕정의 흔적만 남았네그려’라고 해도 무방할 터이다. 명기의 기예가 사라진 상황에서 창기의 욕정은 창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인천 화류계를 일별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창기의 욕정으로 표현된 수사(修辭) 뒤에는 정조를 미덕으로 삼았던 분위기에서도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꽃순이의 좌절된 ‘별빛 꿈’이 웅크리고 있었다. --- p.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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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관점에서 인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문화의 길』 총서 열두 번째 책.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이영태가 ‘권번(券番)’을 창으로 삼아 인천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본다.
해어화(解語花)에서 매춘부(賣春婦)까지 전통 시기에 기생은 예인(藝人)이었다. 가무악(歌舞樂)을 비롯해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기생들에게서 이런 면을 확인할 수 있다. 기생의 별칭은 해어화(解語花), ‘말하는 꽃’이다. 이때 무게중심은 화(花)보다는 해어(解語) 쪽에 있었다. 명기(名妓)에게 미색보다 중요한 것은 전문 예인의 소양이었다. 즉, 분별품류(分別品流)와 형척인물(衡尺人物)이었다. ‘분별품류’는 잔치나 술자리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고, ‘형척인물’은 손님의 성향 등을 간파하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는 꽃이 아니라 분별품류와 형척인물을 바탕으로 하는 해학과 말주변을 지녀야 진짜 해어화일 수 있었고, 그런 명기들을 상대편 남자들은 존중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 기생은 이제 없다. “일본 관광객 기생파티 물의” 운운하는 기사에서 가끔 부정적 수사(修辭)로나 등장할 따름이다. 그들을 부르는 오늘의 이름은 매춘부, 성매매 여성, 에둘러 ‘직업여성’이다. 원래 기생은 가곡, 가사, 서예, 정재무 이외에는 구사하지 않는 일패 기생과 은근히 몸을 팔고 첩 노릇을 하는 이패 기생, 매춘을 목적으로 하는 삼패 기생으로 구분했는데, 지금은 일패 기생은 고사하고 이패 기생조차 없고 삼패 기생만 남은 셈이다.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기능으로 보는 세태에 부합하는 형국이라 할까. 이 큰 낙차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지은이는 그 출발점을 권번(券番) 시스템의 성립에서 찾는다. ‘권번’은 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이른바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이 공포되자 전문 예인들은 조합이나 권번 소속이 아니면 어떠한 예능도 구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전문 예인이든 창기(娼妓)든 권번을 매개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둘 사이의 구분은 흐려졌다. 매음을 목적으로 하는 유곽의 번창으로 일제강점기에 기생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이 경향은 여전하였다. 권번의 등장과 더불어 명기가 각광을 받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명기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던 기생들이 있었다. 명기의 기본 요건인 분별품류와 형척인물을 자기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인천 용동권번 출신의 기생들이다. 흩어진 자료들을 이리저리 모아 용동권번 기생들의 삶을 어렵사리 복원하려 애쓰는 지은이의 노력은 그래서 소중하다. 우리 전통 예인의 잊힌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되살려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용동 칼국수거리 어름에 옛 용동권번 자리를 알려 주는 돌계단이 있다. ‘龍洞券番’이라는 한자가 음각된 맨 위 계단에 선 지은이의 눈에, 싸고 맛난 술집을 찾아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주변에 용동권번이 있었으며 그 흔적이 돌계단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용동을 배회하는 무심한 청춘들이다. 용동권번 기생들의 기억은 그렇게 희미하고, 부도유곽에서 출발한 욕정의 흔적은 지나치게 또렷하다. 하긴 변하고 잊혀 가는 것이 어찌 기생뿐이라. 이 책의 부제는 그래서 ‘기예(技藝)는 간데없고 욕정(欲情)의 흔적만이’다. 지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문화의 길’ 총서 인천문화재단과 한겨레출판이 손잡고 펴내는 새로운 역사/문화 총서. 인천은 ‘근대의 관문’이라는 도시 형성의 역사적 기원으로 인해 많은 이야깃거리를 안게 되었고, 이후의 성장 과정에서 다른 지역/문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특한 지역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문화의 길’은 오늘의 지역, 지역성, 지역문화를 이룬 그러한 역사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그려 가는 새로운 문화지도이다. 역사와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함은 지역사와 한국사의 맞물림, 특수성과 보편성의 연결 지점들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조명하는 기획을 통해 지역문화의 어제를 성찰하고 오늘을 점검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생활사의 근거지로서 지역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인천’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한국 근현대의 초상화가 바로 ‘문화의 길’ 총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