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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기독교는 정말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진리인가? 묵은 땅 갈기 이렇게 좋은 위인들도 절대진리의 요건 구원의 내용은 같아도 동일한 목적, 다양한 방식 하나님을 알 만한 것 공정한 판단 기준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공통된 복음적 혜택 유의미한 접촉점 존재론적 믿음 이방인 성인들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들 당사자인 하나님만 아시는 것 교회를 잘 다닌다고 해서만 추정의 단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경건한 불가지론 선민과 만민의 하나님 중대한 예표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믿어? 사람 눈에는 괜찮아 보여도 심판의 대상은 대중이 아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신라에 전해진 경교 서학에서 시작된 조선 기독교 예슈쓰 크리슈도스의 복음 저분 누구야? 복음 시대에만 누리는 특혜 모든 시대의 유일한 구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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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각자만의 의문이나 질문이 있다. 각 사람의 기질이나 경험, 자라온 환경에 따라 그 주된 의문은 다른 경우가 많다. 복음 이전 시대 사람들의 구원 문제는 특히 동양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진리가 된다는 걸 수긍하지 못하게 만든 주된 걸림돌의 하나다. 각 종교에서 ‘내가 옳다’는 나름의 ‘배타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 문제로 인해 기독교에는 ‘나만 옳다’는 ‘배타주의’ 분위기가 자주 덧씌워지곤 했다.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여러 의문이나 오해, 선입견과 같은 걸림돌들이 제거되어야 마음밭에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뿌려진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렘 4:3). --- p.8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신학자나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이 명시적으로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만(롬 10:9)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욥이나 멜기세덱 같은 구약시대 사람들, 지금도 낙태되는 태아들이나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 등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의 진술은 복음이 명확히 선포된 이후 시대에 그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일반적이고도 규범적인 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각 상황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을 다루시는 유일한 구원의 방식을 단정한 내용은 아니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께는 구원의 내용은 같아도 각자에게 그 내용을 적용하는 방법에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 --- p.14 참된 구원은 인간의 특정 사상이나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역사적 개입, 곧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과 은혜로 이뤄진다. 이 복음을 접하게 되기까지 사람들이 신봉한 여러 종교에서도 도덕적 책임, 자기 초월의 추구, 절대자에 대한 경외와 같은 긍정적 가치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가치들은 각 종교의 독자적 진리라기보다 하나님이 자연세계와 양심에 심어두신 일반계시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여러 종교에 속한 다양한 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사실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세계와 양심이라는 공통의 출발점은 그들의 가치관과 영적 갈망을 존중하는 바탕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에 공감하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해주는 유의미한 접촉점이 된다. --- p.26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 하나님께서 일반계시에 올바로 반응할 사람들을 미리 아시고 복음이 전해지는 시공간에 태어나 살게 하셨다는 ‘섭리적 구원론’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며, 하나님께서만 온전히 아신다는 ‘경건한 불가지론’이 대부분의 신자들이 견지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 역시 책임 있는 침묵이면서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려는 신앙적 겸손이 밴 정당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성경적 기준도 필요 없거나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완벽한 설명보다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도 성경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이 문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하게 다루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도록 돕는 것이 합리적인 차선책이다. --- p.42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창조와 구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를 지나 복음이 전해진 이후에는 누구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책임이 있는데, 하나님은 알게 해주신 지식만큼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의 각자에게 복잡미묘한 ‘이제는 어디든지’의 시공간 전환점도 하나님만은 온전히 다 아신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10)라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어느 시대에나 각 지역에 맞게 적용되지 않은 적이 없다. 복음을 들어도 무관심이나 고의적인 거부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믿어?”라는 말로 하나님 믿기를 내내 미루는 이들이 많은데, 처음부터 다 믿어져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복음을 소개받고 그 진정성에 감화받은 영혼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음을 결단하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지식을 구하는 가운데 점점 더 진실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그것이 진짜 믿음이다. 그 믿음의 순종 위에 믿어지는 신앙이 점점 더 넓고 깊어지는데, 문제는 지금 당장 하나님께 간섭받는 삶이 싫어 시작조차 안 하려고 계속 딴전을 피우는 것이다. --- p.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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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정말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진리인가?
“예수 몰랐던 우리 조상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나?” 아마도 전도현장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일 것이다. 단순히 논리적인 답변을 구하기 이전에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상당한 정서적 거부감과 불편한 심기를 저변에 깔고 있는 공격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물론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살았던 세종 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훌륭한 우리 조상들이 단지 때를 잘못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라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 진리의 혜택을 입을 기회가 주어졌어야 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대전제는 오히려 이 시대에 오만하고 배타주의적인 독선처럼 여겨져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를 미덕으로 삼는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분위기로 인해 지금은 이 문제가 합리성과 공정성을 중시하는 교회 안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도 기독교 신앙에 회의감을 갖고 교회를 이탈하게 만드는 주된 걸림돌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질문을 정직하게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각자가 지닌 믿음의 문제’라는 식의 말로 어중간하게 덮어두거나 침묵으로만 대응해온 교회의 태도 역시 이러한 혼란을 키워온 측면이 있다. 만약 복음이 특정 시대나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기독교를 절대진리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 문제에 올바로 답하는 것은 기독교가 지금과 같은 상대주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여전히 우주적 진리일 수 있는지를 증명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진리의 절대성은 발견된 시점이나 전파된 속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인류가 이 사실을 증명해내기 훨씬 전부터 지구상에 발 딛고 살아가던 모든 사람의 발밑에 흐르던 진실이었다. 이 작은 책은 기독교의 구원 또한 바로 그렇게 시공을 초월한 절대진리의 특질을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경적 근거와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오래 묵은 딜레마를 풀어보고자 한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시지 않고, 그분의 구원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정교하며, 무엇보다 시공을 초월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왔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