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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영화’가 아닌 ‘영화적인 어떤 것’
1. 오직, 아이큐 78의 저능아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 한 장 >> 로버트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와 엘 그레코의 「성 베로니카」 2. 제도로서의 미술을 볼 수 있는 영화 >> 존 맥티어난의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와 르네 마그리트의 「대전쟁」 3. 병사와 창녀가 결혼식을 올린 작고 허름한 성당 >>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지중해」와 비잔틴 벽화 4. 영혼의 손가락이 부서뜨린 과자 한 조각 >> 알랭 코르노의 「세상의 모든 아침」과 루뱅 보쟁의 정물화 「과자가 있는 후식」 5. 새처럼 날아가고 싶다. 사납고 구체적인 지상을 떠나고 싶다 >> 알란 파커의 「버디」와 르네 마그리트의 「대가족」 6. 뚱뚱한 여자와 둥근 여인을 혼동하지 마라 >> 퍼시 아들론의 「바그다드 카페」와 페르난도 보테로의 여인 7. 「파리의 미국인」, 센 강과 조지 거슈윈의 음악, 그리고 라울 뒤피의 그림 >> 빈센트 미넬리의 「파리의 미국인」과 라울 뒤피의 그림 8. 타이타닉 호의 금고 속에서 나온 누드화 한 장 >> 제임스 캐머런의 「타이타닉」과 누워 있는 누드 9. 금붕어가 자살하고 채소도 사랑하는 몽마르트르, 천사 아멜리가 사는 곳 >>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 풀랭의 기막힌 운명」과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뱃놀이 하는 사람들의 점심 식사」 10. 공포의 이미지, 몰려다니는 수천 마리의 새떼들 >>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와 르네 마그리트의 새 11. 낙서하는 빈민가의 악동에서 검은 피카소로 변한 바스키아 >> 줄리안 슈나벨의 영화 「바스키아」와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림세계 12. 김기덕의 오만과 아집 >>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미술 혹은 무의식의 움직임 13. 죽음을 보고 싶다 >> 제임스 캐머런의 「터미네이터」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14. 하녀가 집에 들어왔고, 빛이 아틀리에에 들어왔고, 그림이 완성되었다 >> 피터 웨버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얀 베르메르의 그림세계 15. 에이리언, 그녀는 고대 이집트의 여신이었다 >> 「에이리언」과 H. R. 기거의 에이리언 16. 그림을 훔친 ‘나쁜 남자’ >> 김기덕의 「나쁜 남자」와 디에고 로드리게스 실바 이 벨라스케스의 「화장하는 비너스」 17.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 아니다, 이놈” >> 임권택의 「취화선」과 장승업의 그림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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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미술, ‘장르’의 옷을 벗다
지은이는 영화를 미술과 관련지어 바라보면서 특이하게도 영화나 미술 그 자체보다는 “영화가 아닌, 영화적인 어떤 것”을 영화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적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이 책 전체를 지배하는 화두가 될 이 질문은 해석 대상이 된 영화를 지은이의 독자적인 관점을 따라가며 다시 봐야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같은 시각예술이라는 이유로 미술과 영화의 관련성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누구나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면, 이 책은 영화와 미술이 장르의 차이를 넘어 존재하는 곳에서 비로소 만난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가 영화 고유의 미학을 넘어, 문학·음악·미술과 같은 다른 장르들과 만나는 곳, 그곳은 다른 장르들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영화를 통해서만 표현 가능한 별도의 영역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순진한 일이다. 영화가 다른 장르들과 만나는 접점을 우린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부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반 고흐 같은 광인 화가의 삶이나 「모나리자」 같은 특정 작품을 다룬 영화를 읽는 대신, 미술과 영화가 서로 본질로서 만나는,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전달되는 감동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어떤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차례에 실린 특정 영화나 미술 작품에 대한 평범한 ‘해설’을 읽는 대신, 영화도 미술도 아닌 어떤 것, 혹은 영화와 미술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통해 담론 대상을 ‘재발견’해가는 식이다. 당신이 놓친, 2%를 위하여 『영화가 사랑한 미술』은 미술과 영화의 연관성을 살핀다는 취지 아래 쓰였지만, ‘예술영화’만을 다룬 책은 아니다. 오히려 명절이나 휴일, 안방극장의 단골손님으로 자리 잡은 이래 오랫동안 ‘오락영화’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영화들이 주를 이룬다. 너무 오래, 자주 봐서 식상하게 다가오는 영화들, 그래도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고 발목을 붙잡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역시 가장 큰 매력은 영화를 보는 지은이의 남다른 시선이다. 음악영화로 알려진 「세상의 모든 아침」을 미술영화로 보기도 하고,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살인자가 절간의 마룻바닥에 칼로 새기는 반야심경에서 김창렬의 ‘물방울 연작’을 찾아내며,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에 숨은 베로니카 성상화를 추적하기도 한다. 또한 대중영화의 대명사처럼 굳어진 「터미네이터」에서 죽음의 이미지와 마카브르(서양 중세의 ‘죽음의 무도’)를 읽어내고, 이를 수태고지가 반전되어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해석한다. 「타이타닉」을 살펴볼 때도 서양의 이른바 ‘누워 있는 누드(reclining nude)’의 전통을 대입해 감독이 어떻게 순수회화나 미술사에서 아이디어를 얻는지를 밝힌다. 한국영화 중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다룰 때도 지은이는 예의 예리한 분석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장승업과 동거하던 술집 여인이 화가와 헤어지며 의복을 갖춰 입고 그림을 그려 받는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도 그냥 스쳐 넘기는 법 없이 일일이 풀이를 단다. 또 진경산수와 서양 현대회화의 문을 연 선구자로 알려진 세잔의 풍경화를 비교하는 다소 대담한 대목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거울과 얼음을 분석틀로 사용한 ‘김기덕의 오만과 아집’은 감독의 욕망의 시선에 대한 분석이 가차 없이 행해져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단순한 예찬 혹은 깎아내리기 식 영화·감독평의 전형에서 벗어난 정신분석의 심오한 사유와 예리한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또다른 눈 영화와 미술에 대한 지은이의 진중한 태도와 신념에 기초해 쓰인 이 책은 영화를 단순한 오락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책이다. 그러나 영화를 문학이나 예술과 동등한 표현매체로 받아들이고 뭔가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시사점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영화와 함께 살아야만 하는 우리 시대에 영화를 이렇게 깊고 진지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펴본 책은 사실 그동안 많이 출간되지 못했고, 이 책은 그런 점에서도 주목에 값 한다고 볼 수 있다. 지은이는 책에서 “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화란 어떤 영화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영화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하는 장르가 아니다. 또 소설 역시 잘 쓴 소설은 단어와 문장의 단위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원근법이 파괴된 지금, 시간과 공간 자체도 질서정연한 것들이 아니다. 진정한 영화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카메라를 들이대야 할 것이다. 사과와 오렌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과와 오렌지를 찍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잔의 정물화인 「사과와 오렌지」를 예로 들어 지은이가 하고자 한 말은 “눈으로 보는 것, 기억할 수 있는 것, 마음이 보는 것 그리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들이 공존하는 순간, 그 교집합의 언저리에서 명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주장도 상상력도 없는 ‘영화 이야기’ 유의 피상성을 벗어난 지은이의 ‘영화 깊이 읽기’는 따라서 그 자체로 하나의 미덕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를 정말 그것이 무엇이든 꼭 ‘사과’와 ‘오렌지’만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영화 읽기 전반에 대한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화만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에 대한 에세이로 읽어도 무방할 책이다. 지은이의 말대로, 두 장르는 본질로서 만나고 그 본질은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예술로만 알고 있는 회화를 시간예술인 영화를 통해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이다. 현대미술이 캔버스를 떠난 지는 이미 오랜 전의 일이다. 영상미술까지 나온 마당에 영화와 미술의 관계를 캔버스와 스크린의 차이로 묶어두는 것이 오히려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영화와 미술, ‘예술’답게 읽기 지은이는 이 책에서 영화를 쉽게 만들고, 또 쉽게 보는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전세계 영화가 거의 동시 개봉되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영화가 하루에만도 수십 편씩 쏟아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영화는 너무 많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래서 형편없는 영화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화상은 갈수록 덜 진지해지는 경쟁을 마치 영화의 본질에 충실한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와 미술을 읽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오직 영화의 관점으로, 미술은 오직 미술의 관점으로 읽는 편의주의에 빠지니, 남들이 남긴 족적만 되짚게 될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영화와 미술을 곁다리로라도 다루지 않는 매체를 찾기 어렵고 전문 매체들의 경쟁이 치열해도, 일단 활자화 하고나면 단발성 기사로 사장되기 십상이다. 이 책에 나타난 영화의 새로운 발견들은 단순히 미술의 개입 때문이 아니다. 남들이 뱉은 말을 되새김질 하는 편의주의를, 무엇보다 ‘영화는 무엇, 미술은 무엇’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영화적인 어떤 것’, ‘미술적인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백치의 인생역전을 그린 할리우드식 휴먼드라마가 거룩한 기독교 영화가 될 수 있고, 음악가의 생애를 다룬 음악영화가 소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정물화 한 점으로 미술영화로 돌변할 수 있으며, 쫓고 쫓기는 인간과 로봇의 지난한 추격전이 전부인 줄 알았던 스릴러물도 죽음이 화두였던 미술사의 한 부분을 살필 수 있게 한다. 하늘은 꼭 파랗지 않고,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는 꼭 사과와 오렌지가 아니어도 된다. 그것이 예술이다. 이제 영화도, 미술도 ‘예술’답게 읽어보자. 사랑엔 ‘장르’도 없다, ‘마이 러브 아트’ 시리즈 인간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 최초의 표현매체가 그림이었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사람들은 문자를 인류 문명의 상징처럼 떠받들면서도 시간이나 영역 면에서 몇 배는 더 앞선 미술의 ‘내공’은 가볍게 생각하기 일쑤다. 미술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기에 앞서 문화예술 전반에 무한한 영감을 제공해왔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하지만 장르의 벽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 ‘예술’이라는 틀 안에 놓인 것치고 미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는 없다. 그것이 형식이든, 내용이든, 아주 근본적인 영감이든 모든 문화예술의 밑바닥에는 미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마이 러브 아트’ 시리즈는 이렇게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 안에 똬리를 튼 미술의 자리를 찾아보자는 취지 아래 마련된 아트북스의 첫 시리즈물이다. 장르의 견고한 벽 안에 숨은 미술의 흔적을 찾는 가운데 독자들은 미처 보지 못한 각 문화예술 장르의 매력을 발견할 뿐 아니라 미술의 또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엔 국경도, 인종도, 나이도 필요 없다고 했던가? 이제 마이 러브 아트 시리즈가 ‘장르’를 뛰어넘은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