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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식지 않은 열기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나온 후로 2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오스틴의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어 널리 읽히면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최근 10년간 줄줄이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1995년 〈오만과 편견〉이 BBC의 6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엠마〉는 세 편이나 제작되었다. 〈이성과 감성〉도 영화로 좋은 반응을 끌었으며, 〈오만과 편견〉에서 모티브를 얻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대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일생의 중대사인 결혼과 사랑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깊이 있고 섬세한 심리 묘사와 세련된 풍자, 행복한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로맨스의 완성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제인 오스틴에 대한 평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영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엇갈린다. 오스틴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조차도 많은 경우 오스틴의 문학 세계에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배제되어 있으며, 탈역사적이라고 본다. 오스틴이 습작을 시작한 1795년부터 19세기로 넘어가기까지 산업혁명(1760~1830)과 프랑스 대혁명(1789~99)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던 당시 영국 사회의 실정을 고려하면, 오스틴의 세계는 잔잔하고 평온하기만 하다. 오스틴은 영국 시골을 배경으로 젠트리 계급(신사 계급. 귀족과 향사 사이의 계급)의 몇몇 가정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적인 사건들과 풍속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2인치 크기의 상아에 새긴 섬세한 그림’이라는 오스틴 자신의 표현이 그녀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유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오스틴의 소설은 대개 가정 로맨스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은 혼기가 찬 매력 있고 재능 있는 여주인공들의 남편감 고르기이다. 이 과정에서 여주인공들은 도덕적 성장을 이루며, 그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행복한 결혼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오스틴의 소설이 흔히 폄하되었던 이유는 이처럼 여성들의 구애와 결혼을 주된 소재로 삼으면서 제한된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여주인공이 도덕적, 정신적 결함을 교정하게 됨으로써 일종의 보상처럼 보통 더 신분 높고 재산 있는 남성과 결혼에 이른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오스틴 문학의 특성은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보수주의적이라는 비난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을 비롯하여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당시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당시 여성의 위치는 매우 종속적이어서, 자립은 거의 불가능했다. 여성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으므로, 처녀일 때의 재산은 결혼을 하면 남편의 것이 되었다. 따라서 재산과 토지를 지닌 젠트리 계급(the gentry)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삼아 되도록 집안의 재산이 지참금으로 다른 집안에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가문의 자산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여성이 노동을 하거나 직업을 갖기도 어려웠다. 하층계급의 여성이라면 하녀라도 될 수 있었겠지만, 노동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젠트리 계급의 경우에는 선택의 폭이 더욱 좁았다. 결혼은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와 생활 수단을 마련해 줄 최적의 방안이었고, 이 기회를 잡지 못한 여성의 경우는 남자 형제들이나 친척들의 호의에 의지하거나, 교육을 받은 여성의 유일한 직업인 가정교사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인 에어〉(샬롯 브론테의 작품)를 비롯하여 가정교사가 등장하는 당대의 소설에서 그려진 바와 같이, 가정교사는 급여도 적고 하인들과 주인들 사이에 끼인 어중간한 위치에 있어 어느 쪽에서도 기꺼이 상대해 주지 않는 비참한 처지였다. 여성들에게 허용된 행동의 자유도 매우 제한적이어서, 보호자 없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인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에게 결혼은 낭만적인 로맨스의 결말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실적으로 최대의 소망이자 당면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의 영원한 중대사인 사랑과 결혼 그리고 분투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이 모두 사랑과 결혼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여주인공들이 현실적인 고난 속에서도 행복한 결혼을 성취하는 결말로 끝난다는 점 때문에, 오스틴의 작품은 낭만적인 사랑을 다룬 로맨스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오스틴의 시각은 냉정하고 현실적이다. 우리에게 <이성과 감성>으로 알려진 이 소설은 제인 오스틴 가문에 따르면 서간체 소설인 <엘리너와 매리앤 Elinor and Marianne>라는 제목이 붙은 서간체 소설을 개작한 것이다. <엘리너와 매리앤>은 1790년대에 씌여 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때는 작가가 나중에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된 <첫인상>이라는 소설을 썼던 무렵이다. 오스틴은 1809년 내지 1810년에 이 작품을 개작해서 1811년에 마침내 익명으로 출판했다. <이성과 감성>은 초턴에서 쓴 초기 스티븐턴 시기의 첫 소설이며 대중에게 빛을 발한 첫 소설이다. 〈이성과 감성〉에도 서로 정신적인 공감대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각기 배우자 이외의 다른 관심사에서 즐거움을 찾음으로써 간신히 결혼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미들턴 경 부부와 남편은 아내를 무시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아내는 무시당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아둔한 파머 씨 부부의 무미건조한 결혼이 등장한다. 젊은 여성에게는 결혼 이외의 출구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윌러비의 경우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재산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결혼이 당연시되던 시절인 만큼, 결혼에는 두 당사자의 애정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더 많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으니 피할 수 없는 결과였을 것이다. 오스틴은 그와 같이 결혼을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만 치부하는 사람들과 달리, 자존과 품위를 꿋꿋이 지키며 자신들의 방식으로 사랑과 결혼을 성취하는 여주인공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기를 잃지 않고 행복을 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치열한 싸움에 다름 아니며, 그 과정은 그들에게 인격적인 성숙과 도덕적인 성장을 가져다준다. 오스틴의 소설에서 행복한 결혼의 성취보다 본질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오스틴 소설 10배 즐기기 오스틴의 소설을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오스틴의 주인공들이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나가는가를 살펴보며 감동을 느낄 수도 있고, 엘리너와 매리앤이 각기 좋은 남편감을 얻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만족을 얻어도 좋다. 주변 인물들의 이기심, 탐욕, 오만, 어리석음, 무례함 등을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하게 야유하고 조롱하는 제인 오스틴의 풍자에 흠뻑 취해보는 것도 좋겠다. 오스틴의 정중하고 세련된 독설 속에 숨은 뼈있는 비판은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