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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을 위한 교과서 속 역사 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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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역사/인물 top20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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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어느 날 교과서 속 역사 인물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1부 교과서 속 역사 인물, 그때 왜 그랬을까?
이끎의 미덕을 보여준 장수왕_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영토 확장의 승부사 진흥왕_배신인가 선택인가?
전략가 서희_말만 잘했던 외교관이 아니다?
서경천도운동의 주도자 묘청_그는 왜 수도를 옮기고 싶어했을까?
준비성의 끝판왕 이순신_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비결은 무엇일까?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_식민지 청년이 변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2부 교과서 속 역사 인물, 고난 속에서도 지키려 한 신념은 무엇일까?
조선의 개혁을 디자인한 조광조_신념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용기
삼일천하를 이끈 김옥균_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평화주의자 안중근_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쏜 또 다른 이유는?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 김가진_74세의 노인이 국경을 넘은 이유는 무엇일까?
헤이그 특사가 된 20살의 이위종_화려한 삶 대신 독립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년에 일제에 맞선 강우규_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노동자 강주룡_그녀가 지붕 위에 올라간 이유는?
최초의 여성 광복군 지복영_진정한 삶의 가치란 무엇일까?
3부 교과서 속 역사 인물, 위대한 업적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동과 서를 아우른 알렉산드로스_나 혼자 만든 제국은 아니라고
칼끝에서 시작된 태평성대 당 태종_그는 위대한 성군인가, 비정한 야심가인가?
중세의 문을 연 카롤루스 대제_내 뜻은 아니었소! 그도 몰랐던 그의 대관식
중국 명나라의 1대 황제 홍무제_폭군인가, 명군인가?
프랑스의 가장 찬란한 별 루이 14세_그 눈부신 빛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독일 제국의 설계자 비스마르크_그는 시대를 이끈 영웅인가, 권위적인 통치자인가?
소련을 무너뜨린 고르바초프_나를 개혁가로 기억해주겠습니까?
4부 교과서 속 역사 인물, 같은 시대에 왜 다른 길을 걸었을까?
통일신라의 승려 원효와 의상_어떻게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었을까?
고려 무신정권을 이끈 최충헌과 그의 노비 만적_만적은 주인을 배신한 것일까?
조선의 통치 체제를 정비한 정도전과 태종_왕권을 강화할 것인가, 신권을 강화할 것인가?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두 지식인 윤동주와 이광수_갈림길에서 엇갈린 지식인들
다른 길을 걸은 두 독립투사 김구와 김원봉_독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합해야 하는 것일까?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대통령과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_경제와 노동자의 인권은 함께 성장할 수 없을까?
5부 교과서 속 역사 인물, 우리에게 알려진 모습이 과연 전부일까?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_그는 정말 폭군일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_그는 정말 사대주의자일까?
수원 화성 건설의 주역 정약용_그는 정말 평등한 세상을 꿈꿨을까?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_용감한 탐험가인가? 잔혹한 파괴자인가?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_영웅인가, 독재자인가?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_그는 정말 노예 해방론자인가?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추진한 흥선대원군_그는 조선의 자주성을 지켰을까, 근대화를 늦췄을까?
나치 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_민주주의의 승리?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_그는 과연 영웅인가?
에필로그: 교과서 속 역사 인물과의 대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
용어 풀이
교과 연계표

저자 소개 13

답사, 수업 등 이것저것 기웃거린다. 그러나 혼자가 아닌 여러 선생님과 함께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해서 2002년부터 경남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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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고 쾌활한 선생님, 수업도 명쾌하게 잘하는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다. ‘명쾌한김선생’으로 활동하며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맛있게 떠먹는 역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경력] 고등 역사 교사 | 교사성장학교 운영진 | 명쾌한김선생 블로그, 유튜브, 티처빌 연수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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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는 더 나은 세상이기를 바란다.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수업을 고민하며 블로그 ‘묜짱의 생존 일기’를 통해 역사 교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발로 뛰는 공공역사가를 지향하는 역사 교사. 현장 답사 경험을 중시하며, 역사와 맞닿은 국내외 이슈와 미디어 콘텐츠를 수업에 담아 학생들과 소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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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싼 우물의 틀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우물 나온 개구리(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은, 저(低) 연차 역사 교사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역사 학습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답사 활동 등에 참여하고 있다.
역사 교사도 엄마 역할도 잘하고 싶은, 오늘도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위해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toori_hi_story 혀나쌤과역사졸up(네이버블로그)
‘이야기와 삶이 흐르는 역사 수업’을 지향하는 중등 역사 교사다. 더 많은 학생이 역사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 아 수업 연구 및 글쓰기를 하고 있다.
역사와 AI·에듀테크, 세계시민교육을 연구하는 역사 교사다. 연수 강의와 선도교사 활동, 집필을 통해 교육 현장의 경험을 나누며 배우고 성장하는 교육을 지향한다.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교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AI융합에듀테크전공 석사과정 교육부 찾아가는 학교 컨설팅 강사 교육청 AI, 메타버스 선도교사 및 직무연수 강사 비상교육/천재교육 AI, 에듀테크 직무연수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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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매력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끊임없이 고민하는 성장지향형 교사다. 고여 있지 않기 위해 매해 여러 다양한 연수와 활동을 찾아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성장형 주인공!’이라는 교직관을 가진 역사 교사다. 학생들이 자신이 성장하는 존재이고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믿고 전진하기를 희망한다.
역사에서 배우고 역사를 가르친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 을 위해 오늘도 읽고 쓰고 달리는 세 아이의 아빠다.

기획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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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전문가 봉사단체 ‘오늘과 내일의 학교’ 회장 · 교육부인가 비영리사단법인 ‘가르치는 사람들의 재능나눔 네트워크’ 초대회장 역임 · <EBS> 진로진학 대표강사 역임 · 베스트셀러 《나만 알고 싶은》, 《오답의 모든 것》 시리즈 등의 책 124권 기획 · ‘AI 진로진학 My Best 컨설팅 프로그램’, ‘AI 동화작가’ 기획과 자문 · 교원연수 티처빌 [과제탐구 마스터], 티셀파 [자존감 수업], [강의의 품격] 등 다양한 원격연수 총괄기획 · 진로, 진학, 공부, AI 관련 특강 2,000회, 캠프 950회 이상 진행한 전국구 인기 강사 ·
· 교육 전문가 봉사단체 ‘오늘과 내일의 학교’ 회장
· 교육부인가 비영리사단법인 ‘가르치는 사람들의 재능나눔 네트워크’ 초대회장 역임
· 진로진학 대표강사 역임
· 베스트셀러 《나만 알고 싶은》, 《오답의 모든 것》 시리즈 등의 책 124권 기획
· ‘AI 진로진학 My Best 컨설팅 프로그램’, ‘AI 동화작가’ 기획과 자문
· 교원연수 티처빌 [과제탐구 마스터], 티셀파 [자존감 수업], [강의의 품격] 등 다양한 원격연수 총괄기획
· 진로, 진학, 공부, AI 관련 특강 2,000회, 캠프 950회 이상 진행한 전국구 인기 강사
· 『슬기로운 중학생 돈 공부』 원고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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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4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148*210*30mm
ISBN13
9791176100212

책 속으로

『중학생을 위한 교과서 속 역사 인물 이야기』는 교과서를 보완하는 책이 아닙니다. 교과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소재로 하였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보다 깊고 입체적으로 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역사 인물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독자 여러분이 생생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 책이 학생들뿐만 아니라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역사에 대한 새로운 즐거움과 관점을 제공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이 책이 나올 때까지 12명의 역사 교사들은 지적 호기심을 나누며 신나게 원고를 썼습니다. 특히 인공지능을 이용한 삽화도 만들어보면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즐겁게 원고를 마무리했습니다. 또한, 독자들이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역사 용어는 본문에 굵게 표시하고, 책의 뒷부분에 상세한 용어 설명을 덧붙여 막힘없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바쁜 일과 중에도 매주 온라인 회의를 하며 서로의 글을 읽고 피드백했고, 우리가 쓴 초고가 좀 더 세련된 편집과 디자인으로 재탄생되길 바라며 푸른들녘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나는 매우 어려운 형편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가게나 약국에서 점원으로 일하거나 용산역에서 말단 임시직 등으로 일하기도 했죠. 서울에 살면서도 3·1 운동을 의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나에게는 먹고사는 일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에 나는 1920년대 중반 용산역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그나마 경제적 여유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이나 승진에서 항상 일본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인보다 더 일을 잘해도 마찬가지였어요. 나는 우리가 식민지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무 억울했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유흥과 도박에 빠져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직이나 월급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거의 얻지 못하고 부두 노동자나 석탄 짐꾼과 같은 잡일만 할 수 있었지요. 이런 차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내가 비록 조선인이지만 일본 왕의 충실한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려고 어느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까지 얻었죠.

그런데 내 생각이 바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28년, 나는 교토에서 새로운 일본 왕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경찰의 검문에 걸려 체포된 거예요. 이유도 너무 어처구니없었어요. 내가 한글 편지를 소지하고 있어서 위험인물이라는 거였어요. 더 기가 막힌 것은 일본 경찰들이 편지 내용에는 관심을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아무리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 해도 일본인들은 나를 식민지 조선 사람으로만 여기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일었습니다. 생각이 바뀌자 비로소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어요. 조선인 차별에 대한 경험과 울분 속에서 독립운동의 열망이 싹튼 셈입니다.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_식민지 청년이 변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에서

그래서 나와 동료들은 더 좋은 노동 조건을 얻기 위해 여러 번 파업을 했어. 1930년에는 평양의 여러 고무공장 노동자 1,800명이 모여 큰 파업을 벌였어. 그때 참여한 사람의 대부분이 우리 같은 여성 노동자였어. 비록 그 파업은 실패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어. 그러던 1931년 5월, 우리 평원고무공장의 공장주가 갑자기 임금을 깎겠다고 선언했어. 우리는 매우 화가 났어. 임금 삭감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 그래서 공장 안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했어. 하지만 공장주는 경찰을 불러 우리를 공장 밖으로 쫓아냈어. 나는 크게 실망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 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어. 절박했던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어. 바로 평양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인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시위하는 방법이었어. 나는 을밀대 옥상에 올라 평원고무공장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고, 자본가들과 일제의 야만적인 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이렇게 외쳤어.

“우리 49명의 임금 삭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평양 전체 2,300명의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깎일 것이기 때문에,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올라왔습니다. 공장 주인이 임금 삭감을 철회할 때까지 절대로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생각했어. 내 월급은 깎일 수 있지만 우리 공장의 월급이 깎이면 평양의 다른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이 깎이는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그리고 임금 삭감은 단순히 돈을 조금 덜 받는 문제가 아니었어. 누군가는 그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고, 누군가에겐 하루하루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었지. 그런 임금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깎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어. 어쩌면 이 일은 우리가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더 쉽게 벌어진 일이었을지도 몰라. 공장주는 경찰을 불러 우리를 쫓아낼 수 있었고, 조선인 노동자의 목소리는 더 쉽게 묻혔거든.
---「노동자 강주룡_그녀가 지붕 위에 올라간 이유는?」 중에서

나는 독일 통일의 주역이라고 불린다네. 자네들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평가하든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을 테지. 독일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나는 전쟁을 선택했고, 덴마크, 오스트리아,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선포가 이루어졌을 때,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네. ‘가장 평화로운 길은 아니었을지라도, 가장 현실적인 길이었다.’ 나와 함께 따라다니는 단어들을 알지 않나? 현실주의자, 철혈 정책. 냉철한 지도자와 그만큼이나 냉정한 정책. 나는 결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네. 민족주의가 격랑하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독일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면 강력한 힘과 분명한 방향은 필수적이었지. 나는 그것을 설정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책임을 다해 과제를 완수한 것이라는 점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래. 그 당시 독일은 이념적으로 겹겹이 충돌하던 시기였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보게. 게르만족이라는 같은 뿌리를 둔 대상과도 싸우는 상황에서, 언론의 자유와 민권의 신장을 부르짖는 자유주의자들, 노동자의 권리 신장을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 끊임없는 불만과 요청들…. 어느 쪽을 골라 모든 충돌이 명쾌하게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국내외를 넘나드는 온갖 이념들의 중첩적 갈등은 그것을 불가하게 만들었지. 어느 쪽을 골라도 완벽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기분을 아는가?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 자유주의는 말일세, 이론상 옳을 수는 있었겠지만, 상황상으로는 옳을 수 없었네.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독일 통일이었으니 말일세. 나는 자유주의자들과 충돌했고, 언론을 제약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지. 민중의 목소리가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 국가는 균형추 구실을 해야 한다네. 그것이 내가 나선 이유였고, 때로는 강제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네.
---「독일 제국의 설계자 비스마르크_그는 시대를 이끈 영웅인가, 권위적인 통치자인가?」 중에서

-박정희 대통령: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서 소모적 논쟁을 할 여유가 없었소. 1960년대 경제성장률 9.5%, 1970년대 9.3%는 내 정책의 성과요. 수출 100억 달러 돌파 때 노동자들도 자부심을 느꼈을 거요.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으로 100만 명이 해외 진출한 것도 국부 창출의 길이었지.

-전태일 열사: 숫자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희생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대부분은 환기도 되지 않는 좁디좁은 작업장 안에서 몸조차도 제대로 펴지 못하며 일하였습니다. 심지어 이곳 공장 여성들은 섬유 먼지로 폐질환에 걸려도 치료비 한 푼 받지 못한 채 해고당해야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어린아이들에게도 일을 더 많이 시키기 위해 각성제를 먹였죠. 이런 일들이 대한민국의 자랑이 될 수 있을까요?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만들었던 ‘바보회’는 해산되었고, 저는 결국 회사에 밉보여 해고되었습니다. 이 시기쯤에 저는 ‘태일피복’이라는 회사를 구상하며 노동자의 인권과 기업 이윤을 모두 아우르는 회사를 만들고자 시도했지만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이마저도 쉽지는 않았죠.

-박정희 대통령: 국가 생존을 위해선 노동자들의 희생이 필요했소. 1960년대 식량 원조로 연명하던 나라가 1976년 원조 중단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강력한 통제 정책 덕분이요. 1979년 1인당 GDP 1,700달러 달성은 내 정책의 합리성을 증명하지.

-전태일 열사: 무엇이 합리적이었던 걸까요? 1970년 10월 6일 노동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이후 ‘문제 해결’이라는 거짓 답변만 받았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요. 따라서 11월 13일의 시위는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던 저에게 절박한 선택이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는 저의 외침이 정부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저는 제 몸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대통령과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_경제와 노동자의 인권은 함께 성장할 수 없을까?」 중에서

1863년 1월 1일, 마침내 노예 해방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조치를 넘어, “현재 미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의 노예들은 1863년 1월 1일 이후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라고 명시했습니다. 이는 남부의 노동력을 약화시키고 북부의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며, 영국의 남부 지원 가능성을 낮추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부는 거대한 도박수를 던졌습니다. (…) 이윽고 북부군과 남부군은 게티즈버그라는 작은 마을에서 격돌했습니다.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탁 트인 벌판을 가로질러 돌격하던 남부군은 북부군의 강력한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남부는 약 2만 8천 명의 병력을 잃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고, 이후 다시는 북부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도 남부를 돕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의 거대한 물줄기를 북부의 승리로 돌려놓았고, 무너질 뻔한 연방을 유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의 이러한 결정이 순전히 노예 해방이라는 이상만을 따른 결과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의 복잡하고 위태로웠던 정치적, 군사적 상황 속에서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고뇌와 전략적인 판단이 함께 작용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예 해방령이 남부의 흑인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이후 미국의 사회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제가 강조했던 “모든 사람은 자유 속에서 잉태되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이상은, 비록 그 과정이 험난했을지라도, 제가 꿈꾸었던 미국의 미래였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갔습니다. 남부는 더 이상 노예 노동에만 의존하는 농업 지역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노예 대신 계약을 통해 농사를 짓는 새로운 노동 방식이 도입되었고, 목화 농장 옆에는 거대한 방직 공장과 철강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철도는 남부의 풍부한 자원을 도시로 실어 날랐고, 이는 남부가 현대적인 산업 사회로 탈바꿈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물론 인종차별과 불평등은 여전히 남았지만, 이러한 경제적·제도적 변화를 통해 미국은 진정한 의미의 통합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해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_그는 정말 노예 해방론자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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