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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겹의 세상
나의 시신 도형의 닮음 별을 낳은 자 수레바퀴 아래서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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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저한 낙인(落人)이었다. 떨어진 인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떨어질 인간. 사실, 낙엽은 붙어 있기라도 했는데 우린 붙어 있었던 적도 없는 인간이었다.
--- p.1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은아는 이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일단 여기가 지옥이라면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하지만 은아는 그 칸에 천천히 적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이 망설임이 가치 있어질 것 같았다. 그래야 이 고통이 유효할 것 같았다. --- p.28 산다는 것은 작은 문제, 지금 이 단어를 외우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 삶과 죽음이라는 작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큰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문제를 푸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뿐 다른 것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문제를 풀면 문제가 끝날까? 문제를 맞혀야 문제가 끝날까. 문제를 틀리면 그건 진짜 문제가 된다. 문제를 맞히면 문제가 아니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나 쉽게 다른 문제가 되고 또 문제가 아닌 게 되면서. 삶은. 죽음은? --- pp.51-52 사실 존나 부러웠어. 너의 토로, 하물며 눈물 섞인 절규를 들었을 때도 난 네가 부러웠어. 내 어머니의 부재는 작은 문제, 네 어머니의 폭력은 큰 문제 같아서. (…) 어째서 사랑받는 아이도 불행할 수 있지. --- p.100 네 팔에 너무 깊은 우울을 남기지 말아줘. 고층에 가지 말고 그냥 올려만 봐. 약은 나으려고 먹는 거잖아. 잠들려고 먹지 말아. 내가 늘 말했지. 혼자 외롭게 죽지 말라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채로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죽음을 맞이하지 말라고. 수없이 머뭇거리다가 결국 결심한 것이 스스로의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고. 따뜻한 침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따스하게 눈감으라고. 그게 언제가 되었든. 우리 탓 아니야. 우린 잘못 없어. --- pp.104-105 “그년이랑 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 뭐, 걔가 임신이라도 했어? 애라도 가졌니? 걔는 이과면서 공부도 제대로 안 하는 게, 뭐가 되겠다고. 그럴 거면 그냥 둘이 같이 죽지 그래.” --- p.135 “난 너 없었으면 진작에 죽었어.” (…) “엄마, 난 엄마 때문에 죽고 싶었어.” --- p.138 무언가를 먹는 행위가 죄악 같다. 엄마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에게 투자한 걸 뽑아내라고.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내 가슴에 유독 깊게 박혔다. 투자 대비 적자인 삶을 살까 봐 겁이 났다. 오늘 엄마가 싸 준 도시락도 그랬다. 난 독서실에 와서 몇 시간째 제대로 해낸 게 없는데, 내가 과연 저걸 먹어도 될까. 무서웠다. 불안했다. 도시락을 먹지 않고 끼니를 걸렀다. 믹스커피 하나로 식사를 대신했다. 그러자 불안감이 사라졌다. 안심이 됐다. 나 자신에게 합당한 벌을 준 기분이었다. --- p.145 혜란은 좋은 어머니라기엔 폭력적이었다. 다시 말해 애매한 어머니였다. 좋다고 말하기엔 별로였고 또 막상 별로라고 하기엔 좋았다. 애매한 어머니 혜란은 애매하지 않게 은아를 사랑했다. 하지만 은아는 애매한 어머니 혜란으로부터 애매한 사랑을 받았다. 정말 사랑한다기엔 못되게 굴었고 정말 나쁘다기엔 지독히 위했다. 애매한 혜란은 애매한 돈으로 애매하게 은아를 대했다. 은아의 성적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애매한 것들 투성이인 은아는 ‘애매’라는 단어를 혀끝으로 굴려 보았다. 정말이지 애매한 단어였다. --- p.162 계단을 한 층씩 내려오며 생각했다. 내가 또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로 가는구나. 내가 또 쉬운 방법을 놓치고 굳이 어렵고 험한 방법을 택하는구나. 죽음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또 쉬워 보였다. 아끼는 이들이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려다가 말았다. --- p.163 별은 반짝이는 게 아니다. 그저 쳐다보는 동안 발밑을 보지 않게 만드는 것. --- p.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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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떨어질 일만 남은 낙인(落人)이었다.”
‘대치동과 우울증’ 소마의 강렬한 데뷔작 형광등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 별을 찾는 아이들 겉보기엔 성실하고 우수한 학생 은아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한여름에도 벗지 못하는 카디건 아래 손목에 새겨져 있다. 은아는 손목의 상처를 누군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과 몰라주길 바라는 마음을 동시에 느낀다. 은아 주변의 누군가는 그 상처를 구호 신호로 읽어 내고, 누군가는 모른 척하는 배려심을 발휘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어쩌다 전 과목 만점을 받아버린 은아는 집안의 희망이 된다. 부모와 형제가 모두 은아의 입시 뒷바라지에 매달린다. 은아는 학원비 영수증을 스터디 플래너 앞장에 붙여 놓고 집중력이 흩어질 때마다 영수증의 숫자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숫자는 의지를 강화하지 못하고, 성적은 빠르게 추락하며 깊은 죄책감과 우울증을 불러온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은아의 일기에는 다급한 문장들이 쌓인다. 옥상 난간 앞에서 추락을 상상하고, 엄마 몰래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그래도 살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애매한 엄마의 애매한 사랑, 그리고 내 애매한 성적 사랑과 폭력이 하나인 아이 혜란은 ‘친구 같은’ 딸 은아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다. 공부에 재능이 있는 은아를 위해 유치원 교사를 그만두고 대치동으로 이사를 왔다. 만점 성적표를 들고 오면 진심으로 안아 주지만, 성적이 떨어지면 같은 손으로 머리를 후려치고 폭언을 내뱉는다. 은아는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운다. 이야기는 사랑과 폭력이 뒤섞인 양육이 한 아이의 영혼을 어떻게 조각내는지 냉정하게 포착한다. 『대치동 아이들』은 은아, 어머니 혜란, 언니 은영, 친구 채연, 강사 현준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입시 시스템이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강요하는 폭력과 침묵을 드러낸다. 0.1점 단위로 배점을 나눠 등급을 가르는 시험, 무한정 늘어나는 시험 대비 암기 자료, 학생 이름을 워터마크로 찍어 유포를 막는 학원의 족보를 만드는 구조 등 소설은 대치동의 생태를 고발이 아닌 묘사로 보여 준다. “우리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어. 그치?” 살아 있으니 반드시 해피 엔드 수능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은아는 중압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린다. 옥상을 자꾸만 서성이던 은아는 건물 아래에 주차된 고급 스포츠카를 보며 주변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안식에 이르는 방법을 궁리한다. 일기장에 해소되지 않는 마음을 끄적이던 은아는 수능 디데이를 내 삶의 디데이로 전환하기로 결심한다. 수능 당일, 은아는 수험장행 대신 다른 선택을 한다. 스스로를 “긴 어둠의 밤을 통과한 생존자”라고 밝힌 작가 소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기력하고, 두렵고, 자신을 탓하는 청소년들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유튜브 영상 ‘우울증과 대치동’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처 다 풀어내지 못했던, 픽션의 형식을 빌려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이 자전적 이야기는 성공 서사가 아닌 생존 서사다. 지금도 일기장에만 절망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과 이를 묵시하는 우리 사회에 작가는 조용히 묻는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떻게 행복한 결말일 수 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