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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한용운·신채호
담대한 수행과 치열한 혁명 EPUB
창비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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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 한용운 ]

서문
‘님’을 기다리는 ‘새세상’의 이야기: 한용운 사상의 시대성과 변혁성
핵심저작
1장 불교사상의 시대성과 불교유신의 참뜻
2장 독립운동과 사회운동
3장 마음 수양과 문학의 사유

[ 신채호 ]

서문
희망과 혁명의 키워드로 다시 읽는 신채호
핵심저작
1장 절망에서 희망으로
2장 아와 비아의 투쟁
3장 혁명의 드래곤

한용운 연보
신채호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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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4

韓龍雲, 만해, 한유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한용운의 다른 상품

申采浩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한다. 1907년 신채호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1908년 신채호는 여성 계몽 잡지 『가정잡지』의 발행인이 됐고,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에 5월부터 8월까지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한다. 5월에는 『을지문덕』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다음해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출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신채호는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사상의 전파를 위해 『해조신문』를 발간한다. 1914년에 『조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신채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다음해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위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다. 또 박은식(朴殷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1919년 신채호는 임시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글을 썼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가 된다. 다음해, 보합단(普合團)의 내임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군 자금을 모집한다.

1921년 북경에서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다음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다음해 관음사(觀音寺)에서 역사 연구에 몰두한다. 1925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다음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에 그는 『조선일보』에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1936년 2월, 신채호의 나이 57세,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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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백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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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智延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등단했다. 현재 서울여대 국문학과 초빙강의교수 및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있다. 제18회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했다. 평론집으로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공저서로 《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페미니즘 문학비평》, 《한국문학과 민주주의》, 《전후 동아시아 여성서사는 어떻게 만날까》 공편서로 《20세기 한국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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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김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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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으며 전(前) 코어사업단 사무국장. 전통과 근대, 국학과 국문학의 관계가 주 관심사다. 주요 논문으로 「변영만의 『상이부안씨(傷李婦安氏)』에 나타난 근대적 비극과 문학적 진정성」 등이, 지은 책으로 『모던 한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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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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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5.3만자, 약 7.7만 단어, A4 약 159쪽 ?
ISBN13
9788936484507

출판사 리뷰

불교만이 아닌 민족 전체의 삶을 바꿔내기 위한 불교개혁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한용운(1879~1944)은 구한말 홀연히 집을 떠나 방랑하다가 27세에 백담사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 조동종과 결탁한 당대 조선불교에 반기를 들고 임제종을 부흥시켰고, 1913년에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냈다. 그 뒤 포교활동에 매진하여 『불교대전』을 편찬하고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행했으며, 전국 각지 순회강연을 열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에 불교계 대표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3·1운동을 거치며 한용운은 종교와 변혁운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또렷하게 깨우쳤다. 이에 불교 대중화를 위한 경전 편찬, 조선물산장려운동 등 종교와 민족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한용운은 1925년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와 『님의 침묵』을 탈고하면서 종교적이고 문학적인 깨달음을 국난 극복과 구세·평등의 사상에 연결하고자 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한용운이 20세기 초 세계사적 변화, 특히 서구철학의 복잡다단한 변화를 목도하면서 조선 불교가 그 혼돈의 사상계에서 ‘지혜의 종교’로서 책임을 다하기를 바라며 쓴 책이다. 한용운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眞我)’가 ‘각자 하나의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로서 진리를 깨닫는 데에 궁극의 목표를 두었고, 이것이 중국의 량치차오나 독일의 칸트가 말하는 ‘자아’ 개념보다 폭넓고 보편적이며 서구적 이분법의 사유를 넘어선다고 보았다. 이처럼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는 곧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는 평등 개념으로 이어진다. 한용운의 구세사상은 동학의 사상을 포함하여 한국 고유의 민중적 종교와 철학 속에서 이어져온 ’평등‘을 새롭게 일깨우면서, 근대 민주주의 이론의 평등 개념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20세기 초 물질문명이 거세게 밀려들어오는데, 그저 전통윤리를 복원한다고, 혹은 서구사상을 공부한다고 이 혼돈의 변혁기를 무사히 넘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용운은 자본주의 근대와 식민체제 아래 놓인 민중의 처지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오래 고민했다. 이에 불교의 혁신이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구해질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현실감을 갖추고 경제활동에 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생애 내내 승려들의 생계와 교육, 공동체 결성에 열의를 쏟은 것은 이 같은 통찰을 토대로 한다.

문제는 물질문명의 속도에 상응하여 정신문명을 어떻게 고취할까였다. 한용운은 ‘마음이 곧 물질이요, 물질이 즉 마음이외다’라는 불교의 오래된 명제를 되새기며, 물질개벽의 시대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의 필요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승려를 가르칠 때에 마음 수양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단지 불경 공부뿐 아니라 기초적인 인문학 수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가 사찰령을 통해 조선 불교를 억압하고 세계적으로는 반종교 정서가 강해지던 분위기에 맞서 한용운은 조선 민족의 삶 전반을 개량하기 위한 불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보고 ‘불교사회주의’를 제시했다. 이는 불교의 구세사상이 사회주의 이상과 맞닿아 있다고 보았던 그가 평생 탐구해온 중도의 실천노선 속에서 다져온 생각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민족해방이라는 목표 아래에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이 연합하여 실천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라는 변혁의 시대에 한용운은 근대 물질문명의 폐해를 자각하는 동시에 그것의 극복을 꿈꾸었다. 한용운의 이 같은 사상적 응전은 한국 근현대의 사상사에서 대단히 값진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의 시기에 깨달음과 마음 수양을 통해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 그의 사유와 투쟁은 한반도 사상의 계보에 굵은 획을 그었다.

현대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통섭적 민족주의자’ 신채호

신채호(1880~1936)는 충청도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성균관에 입학한 뒤로 사회진화론에 심취하여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신채호는 만주와 블라지보스또끄, 상하이와 베이징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 신채호는 단군을 신격화한 민족주의 종교인 대종교에 가입하면서 고조선과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했다. 구한말에는 서구 제국을 따라잡아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사회진화론에 기울었다면, 식민지기에 들어선 뒤에는 고대 제국 고조선의 중흥기를 떠올리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로 전환한 것이다.

이 책의 공동 편자 김진균은 신채호의 이 같은 국수주의, 민족우월주의 역사관을 현대의 독자들이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난의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내부의 갈등, 턱없이 빈약한 자료 속에서 한반도 고대사를 정초한 신채호의 작업을, 21세기에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연구하는 후대 인문학자들이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라고 역설한다.

그의 과감한 결단과 단호한 성품은 유명하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에서 외교론자 이승만이 주도권을 잡자 수년간 그와 대립하다가 1922년 임시정부와 완전히 절연했다. 그 무렵 신채호는 무장투쟁론에 경도되었고 테러로써 일제강점기 투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으며 아나키스트 활동을 벌였다.

그가 급진적인 혁명을 바랐음에도, 동아시아 고전의 전통을 계승하는 작업을 부단히 이어갔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민족주의 문학에 근대의 사상을 가미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또한 여기에 조선시대 시가의 전통인 도덕성을 연계하고자 했다. 아나키즘이라는 계급적 인식을 철저히 갖추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적 각성을 통해 혁명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이 같은 종합과 중도의 사고는 무척 소중한 지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국제정세를 아우르며 조선이 생존할 방안을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의 정치 지형과 세계 평화의 관점에서 모색했다. 이 책의 엮은이는 “과연 이처럼 세계정세와 우리 공동체의 전망을 교차하여 모두에게 평화를 주는 지평을 우리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을까”(192면)라며 우리 후속 세대의 분발을 권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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