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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이야기 할머니, 할머니 이야기 / 김윤영 유미는 시니어가 취향 / 김유미 어떤 내리사랑 / 김보람 쓸모의 문제 - 우정을 지속하게 하는 조건에 관하여 / 하라 나의 엄마의 엄마 / 이재임 순례 씨는 오늘도 살아간다 / 정인혜 과수원 과부들과 나 / 김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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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놓치고 있었던 한 조각은 할머니가 스스로를 짱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할머니를 할머니로만 여겼던 나의 시선이 특정 지점에서 그에 대한 이해를 굴절시켰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나니 몇 가지 새롭게 떠오른 사실이 있다. 내가 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작했을 때였다. 가족들과 함께 간 목욕탕에서 둘만 탕에 남았을 때 할머니가 물었다. “너는 취직은 했는데 돈은 못 번다며. 무슨 일이 그러냐.” 나를 염려하는 이모와 엄마의 말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대략 눈치챌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하는 활동을 설명하고, 많이 못 벌 뿐이지 대강 살 만큼은 번다는 이야기를 마치자 할머니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나쁜 구석이 없는 일이구나. 열심히 해라” 할머니의 윤허가 떨어지자 위축됐던 마음의 구김이 쭉 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애초에 마음에 위축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재가 아래 이렇게 어깨가 펴지고 당당해진다는 것은 역시 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 pp.22-23 「김윤영, 이야기 할머니, 할머니 이야기」 고모가 생일잔치를 열어주겠노라고 했을 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케치북에 나의 절친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윳집, 이대이꾸, 염니동.” 그들은 차례로 우유 대리점을 하던 인수덕의 친구, 이대입구역 근처에서 장사를 하던 인수덕의 친구, 마포구 염리동에 살던 인수덕의 친구였다. 나의 할머니, 인수덕 여사는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에 걸맞게 친구도, 모임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많던 모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쫓아다니던 할머니 껌딱지였다. 할머니들이 밥을 먹을 때도, 술을 마실 때도, 담배를 입에 물고 화투를 칠 때도, 남편과 자식새끼들을 욕할 때도 나는 항상 그들의 무릎이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때가 있다면 화투판이 끝날 때 개평으로 동전 몇 닢을 받아 문방구로 달려가는 순간이 다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붙어 있었으니 내가 생일을 맞아 잔치를 한다면 케이크를 썰고 김밥과 잡채를 나누어 먹어야 하는 이들은 인수덕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 pp.31-32 「김유미, 유미는 시니어가 취향」 산후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딱 하루 먹었는데 젖이 말라버렸다. 집 근처를 정처 없이 걷는데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아빠와 마주쳤다. 너 디프레션에 걸렸다며?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도 어렸을 때 밤마다 나한테 약국에 가서 신경안정제를 사 오라고 시켰다. 그땐 그걸 약국에서 팔았지. 엄마는 그 약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했어. 아빠는 내 등을 한 대 툭 치고는 다시 길을 갔다. 디프레션에 걸리다. 그 말이 웃겨서 출산을 하고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문득, 어쩌면 내 나이 정도였을 할머니가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을 밤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왠지 나는 할머니의 디프레션이 아빠라는 매개체를 거쳐 내게로 전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할머니와 나의 관계는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중간 단계는 없었다. --- pp.61-62 「김보람, 어떤 내리사랑」 나는 점진적으로 L의 쓸모를 따지기 시작했다. L이 나에게 도움이 되나? 아니면 최소한의 정서적 편안함이나 안전감을 얻고 있나? 취향이나 관심사가 비슷하기라도 한가? 어느 순간 나는 L이 나에게 별로 유익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 생각에 기름을 부은 건 노후 이야기였다. 그는 충분히 젊었지만 가끔 노년의 시간을 선취하는 태도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노화를 인지하는 단계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종종 내 앞에서 “독거노인 되면 어쩌지?” “나중에 요양원 가면 방문 많이 와줘.” 등의 농담을 했다. 난 당시 ‘돌봄, 연대, 연결, 상생’ 따위의 단어들에 매혹된 상태였지만 막상 내 앞에서 돌봄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실제로 마주하니 부담스러웠다. --- pp.78-79 「하라, 쓸모의 문제: 우정을 지속하게 하는 조건에 관하여」 60대에 사별로 혼자가 된 뒤, 할머니 곁은 동네 늙은 여자들의 동맹이 채웠다. 그중 가장 밀접하게 자리를 채워준 이는 단연 금복할머니였다. 여인숙 ’금복집‘을 운영해서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금복이‘라고 불리는 이다. 할머니는 금복할머니가 방에 오는 족족 로션이며 파스며 얼려 둔 생선이 없어진다고 불평했지만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들락거리니 다행“이라고 했다. 마치 가족처럼, 또는 자연재해처럼, 이웃 또한 할머니가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 듯했다. 어쨌거나 몇 년 전 금복할머니는 오랫동안 운영하던 여인숙을 헐고, 차곡차곡 모아둔 돈으로 아들 부부를 위한 집을 지었다. 그 뒤로 금복할머니는 매일 할머니의 방에 와 한 이불을 덮고 잤다. 금복할머니가 자고 간 어느 아침, 할머니는 누운 채로 내게 새끼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쎄깐도.” “그게 뭐야.” “두 번째라고.” “세컨드?” “그래.” 이상한 흡족함과 경멸이 동시에 묻어 있는 말투였다.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 pp.134-135 「이재임, 나의 엄마의 엄마」 순례 씨는 가만히 누워서 온갖 맛있는 것들을 상상하다가 보호자가 싸 온 김밥과 라면을 먹는다. 머릿속에서 여러 맛을 가늠해 보고 입맛에 맞는 김밥을 찾아낸 결과, 단무지는 빼고 맛살 반쪽과 우엉, 당근, 시금치가 조금씩 들어가면 딱 맞겠다고 했다. 과연 입맛에 맞았다. 얼큰한 새우탕면 라면도. 나이가 백 살인데 라면 좀 자주 먹으면 어떠냐고 한다. 나는 밀가루를 자주 먹으면 안 된다고 답한다. 이런 음식들은 그나마 내가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순례 씨가 고안해 낸 음식들이다. 하릴없이 누워있으면 어릴 적 엄마가 해주던 반찬들이 자꾸 생각난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그 맛을 찾아줄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알기에, 순례 씨는 오늘도 어느 정도까지 내가 해줄 수 있을까 가늠하며 어린 시절 속에서 노닌다. 잠들어 있는 순례 씨를 볼 때면 내 아이의 갓난 시절이 떠오른다. 아기를 토닥여 재우던 손으로 순례 씨 가슴 위에 놓인 손을 만져본다. 그가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갓난아기를 보며 느꼈던 먹먹함이 신기하게도 꼭 같은 느낌으로 아랫배에서부터 묵직하게 올라온다. 내 손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찬 편인데, 나보다도 몸이 더 차가운 순례 씨에게는 따뜻한 손이다. --- pp.134-135 「정인혜, 순례 씨는 오늘도 살아간다」 할머니는 오염에 익숙했다. 서랍에는 언제나 양말 몇 개가 삐져나와 있었으며 가구 뒤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샤워를 한 뒤에는 벌거벗은 채 집안을 돌아다녔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관능적으로 바디로션을 발랐다. 자기 전에는 바지를 훌훌 벗어버렸으며 잠결에 마스크팩을 떼어 던져버렸다. 마스크팩은 장롱에 척 하고 붙었다가 서서히 마르며 침대와 장롱 사이에 낙엽처럼 쌓여갔다. 할머니의 모든 기쁨은 여자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듯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한 번도 따로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젊은 시절, 명절에 온 가족이 모여 요를 펴고 잠을 잘 때에도 둘은 몰래 빠져나와 사랑을 나눴다. 할머니는 ’진짜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그를 닮은 자식을 낳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열렬히 설파했다. --- pp.148-149 「김연재, 과수원 과부들과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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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생각하며
다시 써내려간 여성의 시간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듯이 누구에게나 할머니가 있습니다. 할머니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혈연관계의 호칭을 넘어 노년기의 여성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일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할머니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면서도 꽤 전형적인 이미지로 떠오릅니다. 헌신적인 양육자로, 공동체의 지혜를 전하는 어른으로, 혹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과거의 여성으로 할머니는 기억됩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모습으로 상상됩니다. 우리는 어떤 할머니를 잘 알지만 어떤 할머니는 잘 모릅니다. 여성은 언젠가 할머니가 되거나, 이미 할머니이거나, 할머니가 되지 않은 채 삶을 마칩니다. 그래서 할머니라는 존재를 골똘히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시대와 다른 연령의 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모르는 할머니』는 현실 속 할머니를 온전히 대면하며 우리의 시선을 다각도로 비추어보는 책입니다. 일곱 명의 여성 필자들이 각자의 삶에서 ‘할머니’라는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때로는 유산이고 때로는 굴레인 가족 관계를 되짚어보고, 한때는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욕망과 삶의 다양한 형태, 나이 차를 가로지르는 우정과 사랑, 돌봄과 유대의 의미를 곱씹는 과정에서 할머니라는 존재는 하나의 인물을 넘어 현재의 삶과 만나는 여러 갈래의 질문이 됩니다. 여기 수록된 이야기들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기 어려운 할머니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다양한 유형을 모으거나 특정한 사례를 통해 일반화를 시도하기보다는, 하나의 삶이 다른 삶에 질문을 건네고 서로 귀 기울여 응답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려 했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출발점이 되어 우리가 모르는 할머니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