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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떠도는 사람들의 바다 제2부 돌아오는 사람들의 해변 에필로그 고요한 격정의 바다 작가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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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표류하는 사람에게 바다는 결코 닿을 수 없을 듯 무한히 펼쳐진 공간이라는 것, 하지만 어떻게든 언젠가는 해변에 닿게 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 해도 살아서 닿든 죽어서 닿든 정작에 바다는 아무 마음도 쓰지 않는다는 것.
(…) “왜 그래?” 나란히 걷고 있던 항만청 주사 박창익(朴昌翼)이 자신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지량을 올려다보았다. 의아한 눈이었으나 까닭 모를 안쓰러움이 배어 있었다. 저 형이 또 왜 저러나, 또 무슨 생각이 들었나, 싶었다. “응? 뭐?” 되묻는 지량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이 들은 말을 설령 창익이 들었다 해도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무슨 일이냐는 듯 괜히 어깨까지 으쓱해 보이며 입가에 좀 더 환한 미소를 그렸지만 어색함이 씻길 리 없었다. 지량은 창익에게 자신이 들은 말의 뜻을 옮겨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얼른 골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서둘러 골목 안으로 옮겨놓은 지량의 걸음이 납작 붙들렸다. 채 두어 발짝도 떼지 않았을 때였다. 재바르게 뒤따르던 창익이 지량을 향해 황급히 한쪽 팔을 뻗었다. 창익의 높다란 소리에 덜미라도 잡힌 듯 지량의 움직임이 멈췄고, 고개를 트는 그의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어줍은 미소조차 보이질 않았다. (…) “형한테 공산주의자냐고 그랬다고?” “징집영장 받기도 전에 게이샤츠(경찰)한테 먼저 잡혀갈까봐 겁나더라. 그래서 점잖게 얘기해줬지. 서양 철학자들은 이런 걸 암비바란스라고 그런다고.” “암비바……가 뭐요?” “보통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한 우리 똑똑이 아우님도 모르는 게 있구먼.” 지량의 말에 창익이 헛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지량은 와리바시 한 짝을 집어 끝에다 오뎅 국물을 찍은 뒤 술탁 위에 카타카나로 アンビバレンス라고 썼다. “암……비바……란스? 꼬부랑말?” 지량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의 젓가락이 이번엔 꼬부랑글자들을 써나갔다. 물기 머금은 영어 알파벳이 하나씩 나타날 때마다 창익이 옮겼다. “에이, 에무……브이……에르……시, 이.” 창익이 읊는 속도에 따라 술탁 위의 알파벳이 머금었던 물기가 마르며 하나씩 사라졌다. 지량이 능숙한 알파벳 필기체로 쓴 것은 AMBIVALENCE였다. 하지만 창익의 고개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좌우로 흔들렸다. 지량을 치어다보는 그의 두 눈에 의문으로 가득했다. “양가감정(兩價感情)이란 말은 알지 않나?” (…) “천황의 궁성에 폭탄을 던진 분, 그분이 누구인지 아시죠?” 낮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소년의 물음이 귓바퀴에 닿았을 때, 오오모리의 눈이 감겼다. 그의 입에서 신음같은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 신음이 만들어낸 이름과 김성학이 물었던 사람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건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를 타고……” 오오모리가 툭, 던지듯 내뱉은 그것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오사카를 왕복 운항하는 연락선의 이름이었다. 천황의 궁성을 폭파하려 했던 조선인은 그 배로 은밀히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걸 오오모리는 알고 있었다. “김항섭.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천황의 궁성을 지키던 경비들을 제압하고 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간 그는 모두 다섯 개의 폭탄을 던진다. 하지만 단 한 발도 제대로 터지지 못했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폭탄에 스며든 한여름의 습기로 불발탄이 되어버린 것이다. 둘 사이에 드리워진 침묵이 길어졌다. “삼촌이셨어요.” 김성학이 오오모리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뗐다. 오오모리의 입에서 진득한 숨이 빠져나왔다. (…) “너, 아직 내가 물은 거에 답하지 않은 게 있지?” 제정신이 들지 않아 벙벙한 상태로 창익은 뭔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인지 복기를 했다. 생각났다. “어르신 함자 말씀이지요?” “그래. 내 이름이 제대로 된 이유가 무엇이더냐?” “처음이랑 다릅니다.” “처음이랑, 다르다? 뭐가?” “처음엔 백성 민에 재주 술이니, 사람을 잘 부린다, 이런 거다 싶었는데……” “근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네.” “어떻게?” “사람을 부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를 부리도록 한다.” “하하하!” 부민술이 통쾌하게 웃으며 박창익의 머리를 쓸었다. 창익은 어떻게 응대를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여느 때 여느 사람이었다면 머리를 쓸어대는 손을 가만히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다. 그럴 계제가 아니다 싶었다. 그래, 맡겨두자. 여전히 불이 나고 감각이 없는 왼쪽 뺨과 조금 가라앉긴 했지만 여전히 욱신거리는 머리통을 달래려고 창익은 눈을 꾹 감았다. (…) 그 시각, 박창익은 어둠이 밀려드는 오사카 부두에서 지량을 싣고 떠났던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자주는커녕 이따금도 피우지 않던 담배를 몇 개비나 태워 없앴는지 목이 아릿했다. 기침을 하면 피라도 올라올 것 같았다. 닻줄걸이에 엉덩이를 걸친 채 부두 너머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창익은 문득 생각이라도 난 듯 양복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뭔가 가만히 집혀 나왔다. 인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빳빳한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는 희부옇게 비쳐드는 가스등의 잔광으로 사진을 돌려놓았다. 사진 속에는 두 남자가 있다. 조끼까지 갖추어 입고 유행하는 체크무늬 넥타이를 맨 근사한 양복 차림의 남자는 꼿꼿하게 서있고, 검정 학생복 차림의 남자는 가죽 윙체어 팔걸이에 오른팔을 올려놓은 채 얌전히 앉았다. 창익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가 서서히 지워졌다. 사진관에 비치되어 있던 학생복을 입어도 되냐고 사진사에게 묻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지량이, 보고 싶었다. 그리움을 전하듯 그의 손이 키 큰 남자의 얼굴을 살그머니 쓸었다. 그때, 부두 멀리 천 톤급 배 한 척이 느리게 물길을 헤쳐오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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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세 가지 관계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먼저 의리와 연대로 묶인 김지량과 박창익이 있다. 오사카 항만청 주사로 근무하며 기민하게 처신하는 창익과 금융조합에서 실력을 쌓으며 기회를 엿보는 지량의 관계는 이 작품의 가장 역동적인 서사를 형성한다. 특히 지량의 서사는 작가가 아버지의 유품으로 남긴 사진 속 ‘알 수 없는 인물’에 대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정체를 끝내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 기억의 공백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그 공백은 소설 속에서 김지량과 박창익이라는 두 인물로 재구성되며 사적인 흔적은 서사적 동력으로 전환된다.
이 관계의 이면에는 저항의 기억이 놓여 있다. 김성학, 곧 훗날의 김지량이 오오모리 소슈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삼촌 김항섭의 궁성 폭탄 투척 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항섭은 실제로 폭탄을 던졌으나 습기로 인해 모두 불발되고 만다. 이 사건은 지량이 직접 겪은 체험이 아니라 이후 그의 삶에 스며드는 기억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저항은 현장의 서사가 아니라 한 세대의 행위가 다음 세대의 내면으로 전이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다음으로는 엄순임과 오오모리 소슈 부부가 있다. 조선의 현실에 깊이 고뇌하는 일본인 지식인 오오모리와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지켜 가는 순임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사유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식민지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사유와 윤리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엄정임과 후지이 마키의 관계는 단절의 시간을 건너 이어지는 감정의 지속을 드러낸다. 이들의 재회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도 인간적 유대가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세 관계는 서로 병렬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김지량과 박창익의 서사는 결국 엄순임이 있는 공간을 향해 이동하며, 엄씨 자매의 관계는 그 이동을 받아 안는 중심으로 작용한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은 이동과 도착, 사건과 관계라는 방식으로 맞물리며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 작품의 첫 장면은 바다의 목소리로 열린다. 제주 방언으로 들려오는 그 말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공간이면서도 결국 어느 해변에 닿게 되는 운명을 예고한다. 이 목소리는 오직 김지량에게만 닿는, 설명되지 않는 감각의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바다는 낭만적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무심한 질서이며 떠도는 존재들이 기어이 통과해야 할 조건이다.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그 내부에 격정을 품고 있는 바다의 이중성은 식민지 현실을 살아내는 인물들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 언어 또한 이 작품에서 중요한 층위를 이룬다. 제주어와 조선어, 일본어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인물들의 위치와 정체성을 드러낸다. 발음 하나로 생사가 갈리는 장면들은 언어가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 생존의 조건이 되는 순간을 보여 준다. 이 소설은 언어의 층위를 통해 폭력의 구조를 드러낸다. QR코드를 이용해 들을 수 있는 OST라는 장치 역시 주목할 만하다. 네 곡의 테마곡은 텍스트를 설명하기보다 독서 이후 남는 정조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음악이 작가의 아들이자 뮤지션인 하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이 장치를 더욱 각별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원고를 먼저 읽고 곡으로 응답한 이 작업은 한 세대의 서사가 다른 세대의 감각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결국 『해방전』은 해방의 순간을 재현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직전의 시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상태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붙들고 견뎠는지를 묻는다. 거대한 역사보다 먼저 놓이는 것은 개인의 이름이고, 이념보다 오래 남는 것은 관계이며, 사건보다 깊이 스미는 것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바다에서 오고, 고향의 언어로 오고, 오래된 사진의 뒷면에서 오고, 끝내 음악으로 다시 돌아온다. 『해방전』은 그 흩어진 흔적들을 하나의 장편 서사로 묶어낸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