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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ㆍ 프롤로그_남령초인가, 요초인가 01 근심을 태우는 연기 한 번만 써도 신약임을 알리라 장유의 혜안, 담배 전매제 유배객의 작은 행복, 작은 위로 다산의 벗, 차 그리고 담배 | 애연가와 경세가 사이에서 나의 시름을 달래주는 것은 오직 담배뿐 호학 군주 정조, 골초 군주 정조 | 의례와 흡연 02 질서를 흐리는 불꽃 요망하고 간사한 존재, 담배 사회를 어그러뜨리는 독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풀 담배의 세 가지 이익은 실제로는 세 가지 해악이다 세상의 도리가 담배로 무너지네 하늘의 선물? 귀신의 풀!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초 ㆍ에필로그_금지하지 못했고, 끝내 금지할 수 없었던 담배 ㆍ주 ㆍ참고문헌 ㆍ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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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17세기 초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유입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담배는 처음 ‘담파괴痰破傀’ 또는 ‘담파고痰破古’라고 불렸는데, 가래를 깨뜨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 p.14 평안도에서 생산한 ‘서초西草’는…‘향초香草’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향이 매우 뛰어났으며 ‘금사연金絲煙’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금빛을 띤 가는 실처럼 잘게 썬 담배였다.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이 많아 고위관리가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없었다. --- p.19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해남 연동에 거주하면서 그 일대와 보길도, 죽도, 맹골도 등 주변 섬에 전장을 두고 노비를 부려 담배를 대규모로 재배하고 자제에게 시가에 맞춰 담배를 판매하라고 지시했다. --- p.20 장죽을 사용하는 양반들은 반드시 불을 붙여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사람은 기생이거나 양반에 딸린 담배 관리하는 노비, 연시였다. 양반들은 값비싼 재료로 만든 화려한 장죽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불을 붙여주고 담뱃대를 정성껏 관리하는 연시를 거느리고 다니며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했다. --- p.24 양반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담뱃대 길이를 달리하는 한편, 금·은·동·백동과 같 값비싼 재료들로 담뱃대의 표면을 장식했다. 특히, 금속 바탕에 은사銀絲를 두드려 박는 은입사 기술은 재료도 매우 비쌌지만,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기에 상류층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 p.26 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張維(1587~1638)는 담배를 칭송하며 〈남령초〉라는 시를 썼는데, 그는 담배를 두고 “누구나 한 번만 써도 신약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 p.30 내 생각에는, 앞으로 담배가 흡사 중국의 차처럼 세상에 널리 쓰일 것이다. 차는 위진魏晉 때 처음 세상에 드러나 당송 때에 성행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마침내 천하의 생민들이 날마다 쓰는 필수품이 되어 마치 물이나 곡식처럼 되었으므로 국가에서 전매하여 이익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담배로 말하면, 세상에 유행된 지 겨우 수십 년밖에 안 되는데도 벌써 이처럼 성행하고 있으니, 백 년쯤 지난 뒤에는 그 이익을 두고 차와 각축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 p.34 1908년 탁지부 임시재원조사국에서는 소금, 수산, 주류와 함께 담배 및 농산물에 관한 재원 조사를 시행하였고 이듬해 〈연초세법〉을 제정하였다.…1921년 〈조선연초전매령(조선총독부 제령 제11호)〉이 공포되면서 담배를 생산하던 민간 공장들은 모두 전매국에 귀속되어 운영되었다. --- p.37 18세기에 이르면 담배는 정서적 위안과 사교를 위한 수단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담배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인 ‘연다煙茶’는…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차 한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시는 차 한잔처럼 사용하는 담배를 표현하고 있다. --- p.41 담배는 기호품을 넘어서 전국적 인기를 누리는 고소득 작물이었다.…전라도의 진안초, 평안도의 서초, 경기도의 금광초 등이 지역의 특산물로 유명했다. 담배 재배법을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유중림柳重臨(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이다.…그는 이 책에서 담배를 ‘자용기류資用器類’, 즉 살림에 보탬이 되는 긴요한 물자로 보았다. --- p.42 무릇 담배라는 것은 들이마시지만 배부름이 없고, 즐겨 피워도 살찌지 않아 사람들이 앞다투어 미혹되고 좋아하니 진실로 요초입니다.…심지어는 빈민이 흉년에 처와 자식이 저녁에 굶주리고 그조차 아침에 굶는데도 온갖 방법으로 구걸하여 어렵게 됫곡과 푼돈을 얻으면 오히려 또 그 절반을 나누어 담배를 삽니다. --- p.46 농업이 쇠퇴하는 까닭은 담배가 왕성하기 때문입니다.…좋은 밭이 모두 담배밭이 되면 이 또한 폐속弊俗입니다.…팔도의 담배 농사를 모두 산에 심도록 하고, 평야에 담배를 심는 자들은 모두 엄하게 금지하십시오. 오직 삼등현에서만 담배를 평야에 심는 것을 허락하여 그 담배를 진상한다면 사람의 기호는 끊길 일이 없고 농사의 이익은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 --- p.48 담배 상권은 담뱃잎을 판매하는 엽초전과 담뱃잎을 썰어서 판매하는 절초전, 보부상·경강상인·여각, 여기에 다양한 난전이 얽히고 얽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담배 상권을 둘러싼 이들의 싸움은 왕이 직접 도성의 공인과 시전상인을 불러 도성 상업의 폐단을 묻는 ‘공시인순막貢市人詢瘼’에서도 계속되었다. --- p.52 정조 또한 궁궐 내에서 담배를 재배할 정도의 애연가였다. 그의 담배 사랑은 정조 20년(1796) 규장각 초계 문신[37세 이하의 당하관]에게 행한 책문에 잘 드러난다. 이때 정조는 창덕궁 춘당대로 나아가 규장각 초계문신에게 자신이 작성한 주제를 공개했는데 그 제목이 ‘남령초’, 즉 담배였다. --- p.54 1701년(숙종 27)에는 제례를 지낼 동안 술과 담배를 금하라는 특명이 내린 지 하루도 안 되어 평시서 관원 2명이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되었고, 기우제를 지내는 동안 술을 마신 관원이 담배를 피우며 드나드는 일이 발생하여 논란이 되었다. --- p.63 대낮에 큰길 가에서 홑옷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선비라고 불리는 자가 온갖 패악한 짓을 하여 용서하기 어려운 죄과를 저질러도 묘당에 있는 자로서는 그것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야 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까. --- p.68 ‘맞담배’는 너그럽게 허용되는 행위는 아니었다.…성리학 이념이 사회 저변에 자리 잡은 조선에서는 흡연에도 성리학적 신분질서가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는 남들과 다르고 싶은, 특히 나보나 낮은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은 지배층의 욕망이 투영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 p.70 광해군 14년과 15년에 담뱃불에서 비롯된 화재가 동래 왜관의 대부분을 태웠으며 숙종 대에는 충주 전의현에서 담뱃불로 인해 발생한 화재가 주변의 석성·은진·덕산 등지로 퍼지며 식량과 의복을 태우고 덕산에서 보관하던 병부兵符를 태우기도 하였다. --- p.90 그는 담배를 피우는 자세가 건방지기에 젊은이가 자리를 피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려는 풍속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상하·노소·남녀가 구별 없이 함께 담배를 피우고, 길 가는 도중에도 담배를 구하려다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 p.90 임정주任靖周(1727~1796) 는 요즘의 폐단 중 담배에서 비롯된 것이 가장 크다면서 배고픔과 추위에 무익한 데도 비옥한 토지 천만여 경을 소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담배 경작에 소비되는 천만여 경에 곡식을 생산하면 천만의 백성을 살릴 수 있는데 조정에서 이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 p.93 우리나라 360개 고을 중에서 큰 고을은 빼고, 작은 고을은 꼽지 않더라도 하루 동안 한 고을 안에서 담뱃대를 입에 물고 연기를 뿜는 자가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피우는 데 한문의 돈이 든다 치면 360일로 누계하여 1,260만 냥이 된다. 대저 1,260만 냥이라면 온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구호하는 재물로 쓰고서도 남을 것이다. --- p.97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면서 친구와 노닐며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좀벌레를 뜻하는 ‘두蠧’에 빗대었다. 그가 두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선비, 종, 아내, 학동의 손과 입에 공통된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이 담배였다. 낮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담배를 찾는 선비, 주인의 호통과 매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뱃대를 손에 쥐고 노래만 흥얼거리는 종, 담뱃대를 피우며 벌레를 잡는 농부. 윤기에게 담배는 게으름의 표상이었다. --- p.100 18세기 후반 이후 전국의 장시 중 담배를 판매하지 않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저술한 《임원경제지》를 통해 전국에서 담배가 판매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1895년에 간행된 《통영지》에 나온 남초전은 총 20곳으로 미전 35곳, 포목전 23곳에 이은 규모였다. --- p.104 서울의 연초전에서는 부민富民과 잡류들이 중도아中都兒[중간상인]와 손을 잡고 여러 지역과 결탁하여 담배를 빼돌려 난매하는 폐단이 심해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다며 난매와 잠상을 금해달라는 호소를 여러 차례 제기하였다. --- p.105 1797년(정조 21), 담배 금지가 조정의 화제로 올라왔을 때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정조에게 “담배를 금지하는 것은 술을 금지하는 것과는 다르니, 만일 금지하려 하면 어려운 바가 없을 듯합니다만, 신은 삼가 기수氣數와 상관이 있다고 여깁니다. 청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돌아갈 적에 군중軍中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처음에는 금지했으나, 군사의 마음이 변함이 있음을 보고서는 드디어 그 명령을 철회하였다 합니다. 지금 천하에 통행하니, 어찌 기수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 p.109 영조가 삼남 지방의 비옥한 토지에서 담배 재배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했으나, 이는 금지의 실효성을 기대했다기보다는 빗발치는 상소에 억지로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선언한 미봉책에 가까웠다. --- p.111 두 차례의 호란 이후 수많은 조선 백성이 청으로 끌려갔고 돈을 주고 이들을 찾아오는 ‘속환贖還’이 성행했다. 멀고 낯선 타국에서 고통받는 가족을 위해 속환에 나선 이들의 짐보따리에는 은화뿐만 아니라 그만큼 귀한 담배가 반드시 들어있었다. 그들에게 담배는 가족을 되찾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 담긴 부적이었다. --- p.113 1682년(숙종 8) 전라도에 재해가 닥쳤을 때, 조정에서는 훈련도감과 수어청, 사복시의 둔전에서 거둔 담배와 소금, 미역, 물고기를 본청으로 올리지 말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쓰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즉, 담배는 당장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언제든 곡식과 바꿀 수 있는 현물 자산이었다. --- p.117 영조는…유간채의 의견대로 담뱃대를 수거하여 동전을 주조하면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지 되물었다. 그러자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청에서도 강력한 금지령을 내려 담배 피우는 자를 사형으로 다스렸지만 결국 담배를 완전히 근절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 p.119 17세기, 명과 청, 일본이 앞다투어 금연령을 내릴 때 조선은 침묵했다. 그것은 결단의 부재가 아니라 외교와 생존 사이에서의 오래된 망설임이었다. 조선에서 담배는 단순한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닫힌 국경을 여는 외교의 끈이자 굶주린 백성의 위안이었다. --- p.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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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고치고 근심을 태우는 ‘영초’
책의 1부는 담배 긍정론을 다뤘다. 가래를 없애준다는 의미에서 ‘담파괴’ 또는 ‘담파고’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담배는 처음에 ‘남쪽 나라에서 온 신령한 풀(남령초)’로 인식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조선 문학의 4대가’로 꼽히는 장유가 “한 번만 써도 신약임을 알게 될 것”이라 노래했다든가 애연가 정조는 궁궐 내에서 담배를 재배했을 정도로 담배는 시름을 잊게 해주는 인기 기호품이었다는 등의 에피소드도 곳곳에서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담배는 권력과 부의 상징물이기도 했단다. 불을 붙여주는 시동 ‘연시(燃侍)’가 필요한 길고 화려한 담뱃대가 그런 소도구였다. 배를 곯게 하고 도리를 흔드는 ‘요초’ 2부는 담배 망국론이다. 훈련도감의 무관이 대열에서 담뱃대를 차고 다니며 업무 중에도 피웠다는 이야기는 약소하다. 담배 농사가 급격히 늘어 곡물을 생산할 논밭까지 줄어들자 실학자 이덕리가 온 백성이 금연하면 연간 1,260만 냥이 절약되며 이는 흉년에 온 나라를 구호할 수 있으리라 주장할 정도로 담배의 폐해는 막심했다. 이 같은 금전적 손실만이 금연론의 근거가 아니었다. 상하ㆍ노소ㆍ남녀가 구별 없이 함께 담배를 피우고, 선비에서 노비까지 담뱃대를 손에 쥐고 본업을 등한히 하는 등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질 판이었으니 담배는 나라를 망치는 요망한 존재라 비판받기도 했다. 끝내 금하지 못한 ‘환금작물’ 그래도 조선은 명청이나 일본과 달리 담배 재배 금지령이나 금연령을 내리지 못했다. 영조가 비옥한 토지에 담배 재배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했으나 실효는 없었다. 담배 농사가 쌀농사보다 훨씬 수익이 많기도 했고, 담배 자체가 요즘 반도체나 미사일처럼 대청(對淸) 외교에서 긴용한 재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1895년 간행된 《통영지》를 보면 미전 35곳, 포목전 23곳에 이어 남초전이 29곳일 만큼 담배 판매업이 흥했을까. 그러니 담배에 관한 조선 조정의 ‘침묵’은 결단의 부재가 아니라 외교의 끈이자 굶주린 백성을 위한 위안에 대한 오랜 망설임의 결과라는 것이 지은이의 결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