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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_나의 개경 공부
01 개성의 자연 02 고려 건국과 개경 천도 03 개경의 지리적 범위와 행정체제 1_개경의 지리적 범위(경기·4교·개경) 2_고려의 경기, 개성부 3_도성의 행정체제, 5부 방리제 4_4교의 범위와 기능 04 개경의 역사문화 경관 1_성곽 2_길 3_궁궐 4_태묘와 사직 5_관청과 학교 6_시장 7_집 8_절 9_왕릉 05 고려 후기의 개경 1_강화 천도 시기의 개경 2_고려 후기 개경의 변화 06 고려 말 조선 초의 개경 1_고려 말 개경의 변화 2_조선 건국과 개경의 위상 변화 07 개경의 특징과 위상 1_개경의 조영 과정과 특징 2_개경 경관의 특징 ㆍ맺음말_오늘의 개성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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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기본 요소인 사신사四神砂를 갖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신사란 풍수의 대상이 되는 땅의 동서남북에 있는 산을 말한다. 보통 개성 서쪽의 오공산, 남쪽의 용수산, 동쪽의 부흥산富興山을 북쪽의 송악산과 함께 개성의 사신사라고 한다.
--- p.15 개성은 신라 후기까지는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이었는데, 신라 때 송악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p.25 개성 지역이 우리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896년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하고 이어 898년 궁예가 송악군을 수도로 삼으면서부터이다.…898년 송악이 궁예가 세운 국가의 수도가 되면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여러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905년 궁예가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송악은 수도의 위상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지만, 이 기반 시설은 고려 건국 후 개경으로 이어졌다. --- p.26 태조 왕건은 918년 6월 태봉의 철원 도성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한 지 7개월 만인 919년 1월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 p.27 적현 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로 구성되었던 개성부는 1018년(현종 9)에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혁파되고 ‘개성현 지역’과 ‘장단현 지역’을 중심으로 특별 구역이 재편성되었다. 그것을 ‘경기京畿’라 부르게 되면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제도적으로 경기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 p.31 개경 도성 밖 사방에는 4교四郊가 설정되었다. 4교는 도성과 주변 ‘경기’에 속한 군현의 경계까지의 공간으로 조선 시기 한양의 성저십리城底十里와 비슷한 공간이었다.…성곽으로 둘러싸인 좁은 의미의 도성은 아니지만 도성의 배후지로서 개발과 보호라는 양 측면에서 지속적인 관심이 집중된 곳이었다. 또 4교는 도성 안에서 할 수 없는 국가행사를 했던 곳으로 도성에 못지않은 중요한 공간이었다. --- p.33 당나라 장안성이 황성·궁성과 민가 지역인 외성을 구분하고 방에 담장을 쌓아서 치안을 효과적으로 유지했다면, 개경에서는 장안성으로 대표되는 고대 도성의 폐쇄적인 방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 신라 경주에 사는 왕경민은 외방에 사는 사람들과 지위와 신분에 엄격한 구분이 있었지만 고려에서는 그런 점을 찾을 수 없다. --- p.46 개성과 그 주변에는 나성羅城, 황성皇城, 궁성宮城, 내성內城, 대흥산성大興山城, 영안성永安城이 있다. 이 중 고려 시기 개경의 운영과 방어에 관련된 성곽이 궁성, 황성, 나성이다. 궁성은 고려 본궐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고, 나성은 1029년(현종 20)에 완성한 개경의 도성이며, 황성은 나성이 축성되기 전 도성의 기능을 했던 성이다. --- p.53 1029년 나성이 완성되면서 개경은 비로소 온전한 도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개경으로 천도하고 110년이 지난 때이다.…나성은 개경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북)·부흥산(동)·용수산(남)·오공산(서)의 능선을 따라 쌓아서 형태가 원형에 가깝다. --- p.58 개경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는 나성의 서문인 선의문과 동문인 숭인문으로 이어진 동서대로와 나성의 남문인 회빈문과 황성의 동문인 광화문으로 이어진 남북대로가 만나는 거리이다. 거리의 모습이 ‘열 십十’ 자와 같아서 십자가라 불렸다.…십자가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길이 남대가이다. 남대가는 황성의 정문이자 동문인 광화문 동쪽에 조성된 관도의 동쪽 끝에서 십자가까지 이어진 길로 고려 시기 개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번화한 길이었다. 이 길은 궁궐 및 주요 관청과 연결되었고, 시전 대시大市의 행랑이 설치된 경제의 중심지였다. --- p.64 지금 고려 궁궐터를 가리키는 만월대의 용례는 《고려사》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초기 개성 유람을 다녀온 문인들의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 만월대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책에서 고려 본궐 터를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했고, 이후 《조선왕조실록》 등 연대기와 개인의 시문에서도 고려 본궐 터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했다. --- p.70 광종은 960년(광종 11) 개경을 황도皇都로,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이름을 바꾸어 개경의 위상을 높였고, 그다음 해 수영궁궐도감을 설치하여 궁궐을 중수했다. 2년 정도 걸린 대대적인 공사였다. --- p.72 1029년 4월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고려 궁궐에서 가장 웅장한 전각으로 묘사한 회경전會慶殿이라는 전각 이름이 《고려사》에 처음 등장한다.…현종의 2차 궁궐 재건사업 때 이전 궁궐 구역(지금 만월대의 서부 건축군)의 동쪽(지금의 중심 건축군)에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경전이 창건되면서 이전 시기부터 있었던 건덕전과 국가의 주요 행사와 의례를 분담하게 되었다. --- p.73 고려 시기에 태묘와 사직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982년(성종 1) 6월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에서이다. 최승로는…종묘와 사직의 제도와 운영이 유교적 제사 기구로서의 위상을 갖추지 못했다며 그 위상에 맞는 종묘와 사직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종은 바로 종묘와 사직의 정비를 추진했다. --- p.90 궁성의 남문인 승평문과 황성의 동문으로 이어진 관도官道에 어사대, 중추원, 문하성, 중서성, 상서성이 있었고, 황성 동문이자 정문인 광화문 동쪽으로 이어진 관도의 북쪽에 상서호부·공부·고공사考功司·대악국大樂局[大樂署]·양온국良醞局[良醞署]이 있었고, 관도 남쪽에 병부·형부·이부가 있었으며, 형부 남쪽에 감옥(전옥서)이 있었다. 사천대와 팔관사도 궁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 p.101 성종 때 설립된 국자감이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으로 새롭게 중영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고려 전기 국자감이 있었던 곳으로 유력한 곳이 조선 시기에 ‘국자동國子洞’으로 불린 곳이다. --- p.105 개경의 시전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이 경시서京市署이다. 경시서는 시전의 관리뿐 아니라 물가를 조절하고 상품의 유통 질서를 바로잡는 일도 했다. 《고려도경》에는 경시사京市司 곧 경시서와 대시사大市司가 남대가에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면서 시장 관리를 맡았다고 소개했다. 개경을 대표하는 시전은 개경의 중심부인 십자가에서 광화문 동쪽까지 이어진 남대가南大街에 있었다. 고려 초 국가에서 설치한 시전의 규모는 1208년(희종 4) 고쳐 지은 대시의 좌우 장랑 기둥이 광화문에서 십자로까지 모두 1,008개였다고 한 기록에서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 p.107 조선 초 경시서京市署에서 각 상점 이름을 판자에 쓰고, 판매하는 물품을 그 아래에 그려서 각 상점에 걸게 하기 전까지 대시의 상점에는 파는 물건을 표시하는 간판이 없었다. 즉 고려 시기 대시의 상점들은 고유의 판매 물품이 있었지만 상점 이름과 간판은 없었다. --- p.112 개경의 일반 사람들은 “벌집이나 개미구멍 같다”고 할 정도로 작은 집에 살았다.…1210년(희종 6) 최충헌은 활동리에 궁궐같이 크고 화려한 저택을 지으면서 민가 백여 채를 헐었고, 그의 아들 최이는 1229년(고종 16) 이웃집 백여 채를 빼앗아서 동서 수백 보에 이르는 바둑판처럼 평평한 격구장을 만들었다. --- p.114 방리제의 특징은 도성 주민들의 주거를 신분에 따라 특정 방리로 제한하는 것이다. 당나라 장안성에서 방에 담장을 쌓아서 다른 방과 구분한 것은 치안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최고관료 신분의 주택이나 일반 민의 주택이 같은 방은 물론, 같은 리에 있었던 것은 개경에서 실제로 신분에 따라 주거지를 차별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 p.115 권세가들의 집이 제일 많은 곳은 개경 중심부에 있는 자남산 기슭이었다. 이곳은 궁궐과 가깝고 경치도 좋았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진강후모정기晉康侯茅亭記〉에서 “(자남산) 산기슭에 잇달아 지은 천문千門·만호萬戶의 집들은 마치 고기 비늘이 겹친 듯 즐비했다”고 했다. --- p.116 개경은 불교도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절이 있었다.…조선 중기에 차천로車天輅는 개성 성안에 유명한 절이 300곳이 있었다고 했고, 지금 절 이름을 확인할수 있는 것도 100개가 넘는다. --- p.119 2013년 6월 23일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 고려 왕릉으로 태조 왕건 능(현릉顯陵), 공민왕 능(현릉玄陵과 정릉), 7릉군, 명릉군이 포함되었다. 태조 왕건과 왕비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인 현릉은 개성시 서쪽 만수산 남쪽에 있고,…공민왕 능은 만수산 서쪽의 봉명산 남쪽에 있다. 7릉군은 태조 현릉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능주가 확인되지 않은 7개의 능을 말한다. --- p.137 고려 시기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에서 맡았다.…또 고려 시기에는 왕릉에 능침전陵寢 田을 분급하여 왕릉의 유지와 관리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 p.140 몽골군이 회군한 직후인 2월부터 시작된 천도 논의 끝에 1232년 6월 16일 무인 집정자 최이崔怡의 의지에 따라 천도가 결정되었고, 최이는 바로 천도를 단행했다.…고려가 급히 강화로 천도하면서 개경은 수도의 지위를 잃었고 1270년(원종 11) 환도할 때까지 38년 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 p.147 최이가 강화에 저택을 지으며 주요 재목을 개경에서 실어 온 것이나 1238년 이규보가 〈붉은 오얏을 처음 먹으면서[初食朱李]〉라는 시에서 “모든 물건을 옛 서울에 의지하니[凡物仰舊京], 옛 서울을 갑자기 버리기는 어렵다[舊京難遽棄]”라고 할 정도로 강도 시절에도 개경은 여전히 국가 운영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 p.148 공민왕 초 승려 보우가 정국을 쇄신할 목적에서 남경 천도를 주장했고 이에 공민왕이 호응하여 1356년 6월 한양의 지세를 살펴 궁궐을 건축하게 했지만…1359년(공민왕 8) 말부터 홍건적이 침입하면서 중단되었다. --- p.160 고려 말 천도 대상지로 지목된 곳으로는 철원, 연주漣州(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강화, 충주, 기달산箕達山, 회암檜巖(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지) 등 다양했지만 실제 왕이 움직인 곳은 남경, 곧 한양(백악)뿐이었고, 그것도 천도라기보다는 몇 달 정도 왕이 거처를 옮긴 정도였다. --- p.161 수창궁은…1384년(우왕 10) 윤9월 낙성되어…수창궁에서 공양왕과 조선 태조가 즉위한 것은 고려 말 수창궁의 위상을 보여준다. 또 충혜왕 때부터 보이던 화원은 1373년(공민왕 22) 6월 2층 팔각전八角殿을 건설한 후 우왕 때 주요한 궁궐 공간이 되었다. 우왕 14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압박하자 수세에 몰렸던 우왕과 최영이 머문 곳이 화원이었다. --- p.164 태조가 1394년(조선 태조 3) 10월 한양으로…천도한 다음 해인 1395년(조선 태조 4) 6월에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바꾼 데 이어 개성부를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로 개편해 수도인 신도의 행정은 한성부에서 맡고 개성유후사는 옛 수도의 행정을 맡게 되었다. --- p.171 1438년 (조선 세종 20) 10월에 개성유후사가 개성부로 개편되고, 유후·부유후 대신 유수留守·부유수副留守가 설치되면서 개성부의 지위는 수도 한성부를 보필하는 지방 도시 유수부留守府로 정착되었다. 개성부로 개편된 다음 해인 1439년(세종 21) 6월에 개성부 사람들은 서울에서 취재取才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 눈에 띈다. 이전에 개성에 사는 사람들도 한양에 와서 과거에 응시 하던 관행을 금지하고 --- p.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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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ㆍ성을 넘어 고려판 ‘강남’까지
지리가 중요한 축이긴 하지만 궁궐과 성, 주택 등 인간의 건조물도 놓치지 않는다. 현종이 거란군 침공 이후 대대적인 궁궐 재건 사업을 벌이면서 세운 수창궁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했다든가 위화도 회군으로 수세에 몰렸던 우왕과 최영이 머물렀던 이궁(離宮) 화원(花園)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여기에 권세가들의 집이 개경 중심부의 자남산 기슭에 몰려 있었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그곳엔 대저택이 “마치 고기 비늘이 겹친 듯 즐비했다”든가 무인정권의 최고권력자 최충헌이 “벌집이나 개미구멍 같은” 민가 백여 채를 헐어 궁궐 같은 저택을 지었다니 말이다. 이처럼 공간을 넘어 삶과 문화까지 포섭하는 대목이 책 곳곳에 깃들어 있다. ‘경기’의 탄생에서 방리제까지 공간에 대한 단순한 탐색을 넘어 제도의 변화와 특성을 살핀 점도 이 책의 의미를 더한다. 1018년 개성부가 혁파되고 ‘개성현 지역’과 ‘장단현 지역’을 중심으로 특별 구역을 편성해 ‘경기(京畿)’가 제도적으로 처음 ‘경기’가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그런 예다. 또한 신분에 따라 도성 주민의 주거를 제한하고 왕래를 제한했던 당나라의 방리제를 도입했지만 개경에선 최고관료나 일반 민의 주택이 같은 방은 물론 같은 리에 있었다는 사실도 전한다. 더불어 공민왕 때 정국을 쇄신하기 위해 천도 논의가 시작되어 한양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든가 철원, 연천, 충주, 황해도 신계군 등이 고려 말 천도 대상지로 거론되었다는 대목도 신선하다. 고종이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직후 어사대의 하인 이통이 초적과 노예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북한 측 연구성과까지 반영 전룡철을 비롯한 북한 측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점도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지은이가 2004년 창립되어 남북의 역사학 교류를 주관해온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활동해온 덕이 크다. 이 협회는 2005년 ‘개성역사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남북 공동학술토론회와 유적답사’, 2007~2018년의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발굴’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에 적극 참여했던 지은이는 그간의 남북한 개경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 학계의 연구성과와 전체 흐름을 정리해냈다. 그러기에 고려사를 이해하기 위해, 또 앞으로 중세 도시 개경에 관한 연구를 진전시키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책이라 하겠다. 이 책은 한국사의 대중화를 꾀하는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의 13번째 책이다. 비록 문고판인 만큼 작과 얇은 책이지만 그 의미와 무게를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시리즈의 여느 책이 다 그렇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