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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원하는 우주가 내 이름으로 올 때까지
1부 무명의 존재들 날 ‘부르스’라 불러줘, 그러면 내가 돌아볼게 당신은 내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 소유격 전치사로 이름 붙여진 여자들 ‘그것’이 자라 이름표를 뺏어 달고 2부 호명하는 사랑 그 이름을 지어주고 스너프킨이 말했어 일일이 호명하던 날의 풍경 너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우리가 함께 울었던 모든 밤을 기억해줘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해주려고 3부 죽음 너머의 이름 몇 번의 죽음과 생을 건너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그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하고 마법 같은 생각을 한 한 해 4부 나의 이름, 나의 근원 마야 리 랑그바드 씨, 한국 이름 이춘복을 버려요 그에게 다른 이름을 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초의 서래와 동점 아리아가 이름 없는 자가 될 때가지 5부 그 이름으로 산다는 것 우리는 이름을 몇 개라도 새로 지을 수 있어 내 고통에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너에게 만은 내 진짜 이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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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확인하는 동작이 계속된다. 큰딸의 몸짓은 활기차고 힘이 있다. 돌아보는 얼굴에 정체성을 가진 자의 열기가 솟아오른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은 순간이다. 그 이름으로 불린 첫 순간이다. 큰딸은 지치지 않는다. 저 소리는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나를 부르면 얼른 돌아서서 마주 보면 된다. 큰딸은 자꾸 동생을 마주 본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는 걸 하염없이 반복하는 두 사람, 이름 없‘던’ 자매의 얼굴을 나는 거의 울면서 보았다.
---p.29 내 취향에 따라, 장소나 언어의 운율에 따라, 의미가 있든 없든 자유롭게 이름을 붙였다. 각종 커뮤니티에 가입할 때도 그때그때 마음에 잡힌 단어나 좋아하는 사물을 가져와 이름을 지어서 붙였다 떼곤 했다. 그건 오로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 나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경쾌했다. 스스로 이름을 지어 정체성을 바꿔보며 잠시 잠깐 살아보는 것이 설레고 좋았다. ---p.48 나는 하루에 한 편씩 시를 먹었다. 그날 아침의 시를 다 읽고 뒤를 돌아보면 영실이가, 진정 부서질 것 같은 도자기 같은 여자애가 정말 부서지는 파도의 입술처럼 짧게, 반짝 미소를 지었다. 혁란아, 네가 책상에 앉아 내가 써놓은 종이를 들고 시를 읽는 뒷모습을 보고 싶었어. (…) 영실이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게 작을 수가 없는데, 그게 그렇게 잘 들리는 것도 이상했었다. 영실이와 내가 주고받은 마음도 어쩌면 사랑 같은 거였을까. ---p.91 나는 마치 마일리 사일러스가 빙의된 것처럼 밤마다 천변에 나가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춤을 췄다. 뮤직비디오 속 마일리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격렬하게 춤을 추면서 나는 오래오래 차마 부르지 못했던 이름, 조용히 떠올렸다가 삼킨 이름, 왠지 서운하고 섭섭해서 원망처럼 불러보던 여러 사람의 이름들을 땀으로 밤공기 속의 하늘로 흘려보냈다. ---p.119 소월은 세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이라도 부르고 있을 것 같다. 부르다가, 부르다가 ‘내가 죽을’ 그 이름을. 돌연히, 나는 가노란 말도 없이 떠난 사람의 이름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전하지 못한 그 말이 설움에 겨워서. (…) 망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세 글자의 이름들을 집어넣어 호명해본다. 나는 선 채로 이대로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이, 어디 있기는 했던가. ---p.138 “너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다.” 마침내 스승이 말하던 그 순간, 정확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지을 수 있다. 수많은 얼굴을 통과한 뒤에야, 아리아는 처음으로 “나는 아리아 스타크야!” 소리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름과 존재가 완전히 일치한 사람이 된 것이다. ---p.208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자축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 세상에선 각자 나아질 때마다, 좋아질 때마다, 새 이름을 열 개라도 스무 개라도 만들어 붙일 수 있다. ---p.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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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부터 『시녀 이야기』 속 여성들까지
이름은 어떻게 인간을 만들고, 지우고, 연결하는가 1부 ‘무명의 존재들’에서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폭력적인 구조에 놓이고 인간성을 박탈당하는지 다룬다. 예컨대 저자는 영화 〈송곳니〉를 통해 이름의 부재가 독립적인 자아의 인식과 형성을 막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살아가는 영화 속 세 자녀는 아버지가 설계한 폐쇄적 질서 안에서 서로를 구별하는 이름도, 사회를 이해할 언어 체계도 없이 성장한다.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는 자신을 독립적인 ‘나’로 상상할 수 없고, 타인과 경계를 세워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거나 사회로 나아갈 좌표 역시 잃는다. 저자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큰딸이 우연한 계기로 ‘이름’의 부재를 자각하고 스스로 이름을 붙이는 장면에 주목한다. 자기 삶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저자는 이 장면을 통해 이름이 인간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아를 형성하며 자주적인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우선적인 토대임을 이야기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의 일,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 (…) 나는 환대는커녕 적대만 가득했던 크리처의 삶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_40쪽 이어 2부 ‘호명하는 사랑’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연결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에 담긴 의미를 한 겹씩 떼어본다. 저자는 『늦가을 무민 골짜기』 속 스너프킨이 이름 없는 존재에게 이름을 건네는 장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윤희에게〉 속 인물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거듭 부르는 순간들에 주목한다. 상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수많은 타인 중 한 존재를 특별한 ‘너’로 구별해 자신의 세계 곁으로 들이는 일이며, 애정과 욕망, 그리움과 소유의 감각을 건네는 가장 오래된 인간적 방식이다. 저자는 그 섬세한 순간들을 따라가며, 인간이 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끝없이 불러보고 싶어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안에 담긴 상대를 향한 깊은 애정과 투명한 욕망을 건져 올린다. 내 존재를 일컫는 고유명사인 이름을 서로 바꿔 불러준다는 것은 어떤 걸까. (…) 한 존재를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엄청난 일, 나를 한 존재의 속으로 온전히 들이미는 일. _99~100쪽 3부 ‘죽음 너머의 이름’에서 저자는 무(無)로 돌아가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는 망자의 이름을 하나씩 줍는다. 이름은 살아 있는 동안 한 존재를 세상에 붙들어두는 표식이지만, 누군가 떠난 뒤에는 남겨진 사람들이 상실을 견디는 마지막 언어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김소월의 시 〈초혼〉 속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시구와 마을의 장례식에서 상여소리를 처음 들은 자신의 어린시절 경험을 겹쳐 보며 죽은 자의 이름을 그저 부르며 살 수밖에 없는 애달픈 마음을 떠올린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이름을 통해 관계를 지속한다. 어느새 나는 곳집이다. (…) 애달픈 곡소리가 들려온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극을 두고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발걸음 사이로 흩어지고 메운다. 산 자는 죽은 이의 이름을 ‘설움에 겹도록 부를’ 뿐이다. 부르다가 죽을 이름을, 어쩌면 부르다가, 부르다가 내가 살 이름을. _138~139쪽 내가 떠나온 이름, 선택한 이름, 돌아온 이름… 스스로 규명하며 ‘나’의 자리를 찾는다는 것 4부 ‘나의 이름, 나의 근원’에서는 이름에 깃든 나의 정체성과 뿌리에 초점을 맞춘다. 덴마크의 한국계 입양인으로서 자전적 경험을 풀어낸 마야 리 랑그바드의 에세이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모든 문장의 주어가 ‘여자는’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애정 없이 지어진 자신의 한국 이름과 무심하게 자신을 버린 친부모에 대한 마야 리 랑그바드의 분노, 주어진 이름을 기꺼이 스스로 떠난 그녀의 마음과 공명한다. 이름의 근원을 찾는 그녀의 여정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근원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 또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서 아버지가 애정을 담아 아들에게 이름을 물려주지만 정작 아들은 그 이름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누군가의 이름을 지어주던 순간에 담겼을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헤아리며 한평생 크게 애정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타인이 건네준 이름의 맥락을 이해하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질문을 확장해나간다. 이름을 바꾼다면 개명이, 운명을 바꿔줄까? 맺거나 끊거나 이어온 관계들이 새롭게 바뀔까? 누가 바뀐 이름으로 불러줄까? 옛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고 새 이름으로 나를 알게 될 사람들이 혼재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전의 지나간 날과 남은 인생의 나는 어떻게 살다가 가게 되려는지. _185쪽 확장된 주제의식은 마지막 5부 ‘그 이름으로 산다는 것’로 이어진다. 영화 〈허공에의 질주〉에서 저자는 정치적 도피 생활 속에서 가명으로 삶을 이어온 주인공이 끝내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는 장면에 주목한다. 이름과 존재가 일치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자기 정체성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책임과 사랑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름과 존재가 일치한 ‘나’로 살아갈 때 나 자신과도, 내가 사랑하고 나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과도 진정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발붙이게 하는, 이름의 점성” 우리를 구하는 호명의 관계학 외로움과 고립이 사회적 화두가 된 시대, 인간은 왜 여전히 누군가에게 불리고 싶어 하고, 누군가의 응답을 필요로 할까. 분열과 단절, 혼란이 심해지는 만큼 거꾸로 진정한 소통과 이해를 갈구하게 된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주 인공지능이 자신을 분석해주는 콘텐츠에 열광하며, 인공지능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와 응답을 구한다. 저자는 호명되고 스스로 규정하며 ‘나’를 찾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오래된 갈망을 비춘다. 누군가에게 불리고, 기억되고, 이 세계에 속해 있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태어나며 이름을 얻지만, 어쩌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이름에 가까워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름은 존재를 확인하는 자리이자, 인간을 만들고 지우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자리다. 『이름의 빈자리에』는 이름 뒤에 붙은 다양한 욕망과 감정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사람과 사람을 닿게 만들까?’ ‘우리는 어떻게 삶을 붙들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결국 한 존재를 그 자신과 세상에 붙들어두는 “이름의 점성”을 보여준다. 책장을 덮은 당신이 당신의 이름을 호명해본다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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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이름에 붙은 것들이 스쳐갔다. 뭐라도 붙잡으려던 날들과 어떻게든 붙잡히고 싶던 날들, 그 무엇도 나를 붙잡지 않길 바랐던 날들이 떠올랐다. 뱉어지거나 삼켜진 숱한 이름들로 목구멍이 뜨거워오는 채, 《이름의 빈자리에》가 끝내 품어온 질문들을 따라가본다. 무엇이 사람과 사람을 닿게 만들까? 우리는 어떻게 삶을 붙들 수 있을까? 귀를 기울이면 지상 어딘가에서 허공으로 교신을 보내듯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긴 시간 이름들을 만지작거려온 권혁란 작가가 발견한 것처럼,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발붙이게 하는 건 이름의 점성인지 모른다. - 임지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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