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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 007
무장하는 날 035 정선 073 김춘영 107 그곳 143 이 모든 181 고별 211 해설|박혜진(문학평론가) 폭력의 가면을 쓴 슬픔의 미학 249 작가의 말 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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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은 열기와 더위로 자신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여진은 자신이 이런 온도일 때 눈이 집요하게 반짝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30 「상리」 중에서 드넓은 철판을 통과한 빗소리는 수십 배로 증폭돼 밤새 나를 두들겼다. 귀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통과 팔다리와 몸체 전체를 울리는 소리였다.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빗소리였고 뼛속까지 도달하는 듯한 빗소리였다. --- p.45 「무장하는 날」 중에서 경험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상황을 처음 겪고 있었지만 나는 나를 휘어감는 수치와 공포와 분노가 아주 오래된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내 것이 아니지만 나와 무관하지 않은 기억들이, 지층마다 축적되어온 그 숱한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 구릉에 머물러 있었다. --- p.64 「무장하는 날」 중에서 동창이 까만 봉지에 담아준 복숭아와 자두는 실온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들큼한 냄새를 풍겼다. 손으로 살짝만 쥐어도 물크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 있는 것들에선 무언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났다. --- p.90 「정선」 중에서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불안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나는 그것을 너무 일찍부터 알았다. --- p.96 「정선」 중에서 이 작업의 주체는 사건이 아니었다. 김춘영이었다. 나는 오직 김춘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김춘영이 말하는 김춘영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김춘영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한 개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갈 것이다. 다른 연구자가 아니라 나여서 가능한, 오직 나와 김춘영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김춘영과 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포착 가능한 어떤 진실에 접근해갈 것이다. --- pp.118-119 「김춘영」 중에서 대기가 차가워지면 사람들은 목을 가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목을 가리면 나는 안심이 된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들이 다시 목을 드러내면, 그때부턴 가슴이 뛴다. 여름이면 나는 매일 가슴이 뛴다. 사람들이 저렇게 쉽게 급소를 드러내고 다닌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낀다. --- p.147 「그곳」 중에서 나는 툭하면 누군가를 좋아해버리는 버릇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기간엔 기분이 내내 가라앉아 있을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내게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기꺼이, 기필코 좋아해버린다. --- p.166 「그곳」 중에서 나는 그 말이 나한테 내내 부담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다른 이의 고통과 상실을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건 부담을 동반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다. 더없이 부담스러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가져간다면 마음만 가져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p.203 「이 모든」 중에서 남편 친척들은 만날 때마다 새로웠다. 그래도 나는 내 친척보단 남편 친척들을 만날 때가 언제나 더 편했다. 나는 그들과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없었고 어떤 얘기를 나눠도 감정이 요동칠 일이라곤 없었다. --- p.220 「고별」 중에서 나는 내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허준기가 곤경에 빠지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어떤 이유로 곤경을 맞닥뜨려야 한다면 나는 그가 한 발만이 아니라 두 발 다 빠지길 원했다. 그는 좀 쉴 필요가 있었다. --- p.236 「고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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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면서 메슥거리고, 설레면서도 허전한 냄새.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냄새. 금세 망가질 것 같은 냄새. 어쩌면 여름 냄새가 대체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전형성에 갇히지 않는 고유성, ‘지방-공간 3부작’이라는 독자적 세계 이번 소설집에서 최은미의 인물들은 원래의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의 문을 열어젖힌다. 그 공간은 유년의 기억이 묻힌 곳이기도 하고, 누군가와 협상하기 위해 찾아가는 마을이기도 하며, 재난이 일어난 먼 나라이기도 하다. 작가 특유의 공력으로 생생하게 빚어진 그 공간에 발을 디딜 때, 우리는 뼛속까지 감정이 뒤흔들리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집 전반부에 배치된 세 단편 「무장하는 날」 「정선」 「김춘영」은 일종의 ‘지방-공간 3부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작품으로, 세 이야기의 중심부에 커다란 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산을 향해 점차 올라가는 이 상승의 구조에서 그 아래에 놓인 것은 땅이다. 매장문화재 발굴 현장 조사 일을 하는 「무장하는 날」의 연구원 ‘나’는 오래전 신입 연구원 시절 한 발굴 현장에 나갔다가 안전 점검을 위해 나온 군인 수현과 간질간질한 눈빛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감정은 ‘나’와 수현뿐만 아니라 발굴팀 연구원들과 군복을 입은 군인들 몇몇이 나눈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우연히 한 병사가 다른 병사를 혼내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순간 간질간질하던 공기는 사라지고 만다. 병사는 다른 병사를 ‘여자’로 취급하며,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해 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욕을 할 때, 폭력을 경험하는 이는 병사에서 그치지 않고 ‘나’로 확대된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 아래에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수치와 공포, 분노 같은 비물질적인 것도 묻혀 있음을. 그 상황을 처음 겪고 있었지만 나는 나를 휘어감는 수치와 공포와 분노가 아주 오래된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내 것이 아니지만 나와 무관하지 않은 기억들이, 지층마다 축적되어온 그 숱한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 구릉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64쪽) 「정선」의 ‘나’를 사로잡는 감정도 과거와 관련이 있다.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오랜 시간이 흘러 정선을 다시 찾는다. 그곳에는 ‘나’가 아직 흘려보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상실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재회한 동창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사기를 쳤다가 거짓말이 들통나자 그에게 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그 순간 품속에 갖고 다니던 숟가락을 꺼내 그를 찌른다.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설명처럼 “유년의 상징이자 잃어버린 집의 표상이기도 한 숟가락이 무기가 되는 순간, 슬픔과 폭력은 하나의 사물 안에서 겹쳐”(256쪽)진다. ‘나’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찌르는 방식으로 과거와 대면하지만, 바로 그 방식을 통해 실루엣으로만 흐릿하게 남아 있던 과거의 실체를 온전히 그려낼 수 있게 된다. “소설가 최은미의 의미 있는 터닝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소설가 최윤)는 평과 함께 2025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김춘영」은 하나의 공간을 개인적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장소로서 조망함으로써 시야를 넓힌다. ‘지역과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연구팀에 소속된 ‘나’는 지역사회를 통째로 흔들었던 ‘화운령 사건’의 관련자인 김춘영과 1년간 면담해오며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탄광촌 여성을 주체”(115쪽)로 내세운 생애사 작업을 하고자 한다. 의욕적으로 이 일을 해내려는 ‘나’의 계획은 그러나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눈으로 인해, 그 눈을 피해 김춘영의 집으로 대피해 들어온 여행객 부부에 의해, 그리고 대민 지원을 나온 군인들에 의해 번번이 중단되고 만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는 김춘영 그녀의 의지에 의해. 김춘영은 화운령 사건의 피해자 그룹에도 가해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로, 달리 말하면 “전형적인 틀 안에서 맴돌”(114쪽)지 않는 여성이다. 전형성에 갇히지 않는 고유성을, 사건에 짓눌리지 않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이 이 야심만만한 연구원‘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제 앞에서 고요한 의지로 빛나는 연구원의 모습은 이 소설이 화자 김춘영의 이야기인 동시에 청자이자 화자인 ‘나’의 이야기임을 알게 한다. 다른 장소, 다른 공기, 다른 사람… 낯선 풍광 속에 들어서는 순간 휘청이며 열리는 감각의 문 뼛속까지 감정이 뒤흔들림으로써 가능해지는 깊은 접속의 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사회적인 공기를 지울 수 없음을 최은미의 이번 소설집이 선명하게 보여주기에 후반부에 놓인 「그곳」과 「이 모든」은 마치 재난-애도에 대한 짝패 소설처럼 다가온다. 「그곳」이 이미 재난으로 인해 한차례 죽음에 가까운 사고를 경험한 이가 또 한번 닥쳐온 재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라면, 「이 모든」은 아직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경험하지 않은 이가 재난으로 폐허가 된 장소에 방문해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끔하게 서로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연대와 구원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고통과 상실을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건 부담을 동반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이 모든」, 203쪽)음을 알기에 죽음에 육박하는 일종의 ‘가사(假死)’ 상태를 겪음으로써 가능해지는 이해의 몸짓. 구체적인 지시 대상을 가리키지 않고 어느 쪽으로든 열려 있는 두 작품의 제목 또한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는 재난의 불특정성을, 놀라고 무서워하고 도망치다가도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의 단일하지 않은 감정을 포괄해 보여주는 것이리라.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 최은미의 사랑은 이 역설을 향하는지도 모른다. 「고별」의 ‘나’는 오랫동안 병환을 앓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일간 장례식을 지키면서 두 가지를 결심한다. 하나는 어머니를 제대로 보내드릴 결심. 또하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질 결심. 소설의 제목이 ‘작별’이 아니라 ‘고별’인 까닭은 헤어짐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온전히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은미는 인물의 속내를 구구절절 말하지 않으면서도 ‘나’가 고별을 결심하기까지 어떠한 들끓는 감정 속을 오가다 이내 미련 없이 깨끗하게 차가워졌는지를 선명히 알 수 있게 한다. 온갖 감정이 요동치는 한 명의 개인, 온갖 사람의 기억이 층층이 쌓여 있는 하나의 장소, 『다른 사랑』은 그러한 개인과 장소가 얽히며 ‘기꺼이, 기필코’ 살아내는 사람들의 열기와 냉기로 넘실거리다 기어코 우리에게로 흘러넘친다. 그 뒤얽힘을 통해 끝내 우리를 인물들과 연루시키는 감각이 최은미가 말하는 사랑일 것이다. ★ 다시 묻을 것을 알면서도 끝내 파헤치던 집요한 마음들이 있었다. 지나치지 못했던 표정. 이해할 수 없는데도 계속 들여다보던 시간. 이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내 인물들에게 왔던 휘말림의 순간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_‘작가의 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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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는 인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투시하면서도 예술이 멈춰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아는 작가다. 문학의 목적과 문학의 목표를 간파하는 이 작가는 독자에게 구원을 말하는 대신 독자의 곁에 선다. 독자들을 각자의 진실 앞에 세워둔다. 혼돈 속에서 더 맹렬해지는 최은미의 사랑은 우리를 무해한 사랑에서 해방시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랑이라는 강박에서 풀려났다. -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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