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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 5
1부 내가 만드는 아침 | 13 시간의 비등점 | 14 시간의 집 1 | 16 시간의 집 2 | 18 모래시계 | 20 발굴 일지 | 22 약도 속의 하루 | 24 복도 | 26 양을 향해 | 27 소묘 밖으로 | 29 저녁 6시의 그림자 | 31 카페 만월경 | 33 덮어쓰기를 하시겠습니까? | 35 2부 빈터 | 41 어두워지고 있다 | 42 단추로 수프를 끓이는 저녁 | 43 독거 | 45 봄, 무사 | 46 결별의 물결 | 48 불면 | 49 호텔 아르테미스 | 51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 53 시페루스가 있는 밤 | 55 수련, 모네의 우울 | 57 시간의 눈 | 58 성 베드로 교회 | 60 황룡사를 꿈꾸다 | 62 3부 만어사에서 돌을 보다 | 67 Homo Elysia Chlorotica | 69 아수르바니팔 | 71 역청의 밭 | 75 부론의 해 아래 | 77 고딕, 그 높이 | 79 캔터베리 | 81 아코디언 맨 | 83 몽유병의 노래 | 85 쓰지 못한 글 | 87 터미널 | 89 글라스 빌딩 | 91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 광장 | 93 4부 출구, 막다른 | 97 밤의 골목길 | 99 어둠을 적는다 | 101 반닫이가 있는 자리 | 103 꿈이 이루어지다니 | 105 그러나 지금은 | 107 추모미사 | 109 기도는 어디에 있나? | 111 혼잣말이 소금 위를 | 113 3D 바이오 프린터가 필요해 | 115 사다리 | 116 가뭄 | 118 분홍빛 담 속으로 | 120 뒷모습 | 121 해설 | 시간의 발굴과 내면의 깊은 확장 | 최현식 | 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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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내가 통과했던 모든 아침을 소환한다 옷을 입고 밖으로 걸어 나가면 너 아니면 나를 고발하는 핸드마이크 소리가 귀를 때린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찬 아침을 들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건너온다 사건 사고와 분쟁으로 거침없이 타오르는 사람들이 교차로에서 들끓는 아침을 내게 건네준다 이제 내가 만드는 아침을 전할 차례이다
- 「내가 만드는 아침」 부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텅 빈 복도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 놓는다 방으로 들어가 정해진 역할을 입기 전 나의 일부를 벗어두는 곳 복도엔 서둘러 가는 시간의 나사를 조금 풀어주는 느슨함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서 잠시 길을 잃거나 순간 벽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나를 받아주기도 한다 (…중략…) 복도는 계속된다 복도의 끝에서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내 발길이 먼 곳을 향하고 있다 내 꿈이 복도를 서성이는 동안 창밖 여윈 라일락 나무의 봉우리가 환해지고 가늘게 가늘게 벼린 시간들을 보랏빛으로 꽃피우는 복도의 마음이 있다 - 「복도」 부분 닫힌 내 마음이 한 장의 느티나무 잎사귀로 내려앉는 간밤의 꿈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내 가계의 유전자를 씻어내고 나는 바닷가 바위에 눕는다 철썩이는 바닷물에 손을 내려뜨린다 세포 안에 살아있는 너의 엽록체로 내 살이 햇빛을 받아 비치도록 투명해진다 심장 속에 푸른 불꽃이 점화된다 - 「Homo Elysia Chlorotica」 부분 저녁이 일으키는 물결에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밀어내고 어스름이 빈손을 턴다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화분에서 파랗게 올라오는 겨울파의 숨소리를 듣는다 하아 하아 나도 입을 벌리고 숨을 쉰다 낡은 니트를 걸치고 냄비에 물을 끓여 천장으로 수증기를 올려보낸다 끓어오르는 물방울들이 분주하게 기포를 열어 함께 섞여 맛을 우려낼 채소들을 기다린다 아이에게 읽어주던 동화 단추로 끓인 수프를 떠올리고 냄비 속에 단추 하나를 떨어뜨리며 빈속에 따뜻한 수프를 흘려 넣을 생각을 한다 거실을 건너가는 마음 한 줌을 국물 속에 넣는다 대파 한 줄기, 수레국화 꽃잎 몇 장 도마 위에서 송송 파 썰리는 소리가 하루를 덮어준다 - 「단추로 수프를 끓이는 저녁」 전문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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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의 「단추로 수프를 끓이는 저녁」은 애달퍼서 유쾌한 모험의 언어와 서정으로 읽힌다. 시인은 짐멜의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란 동시에 무엇을 하겠다는 자유이다”란 구절을 빌려 사라지고 부서지는 것에 대해 어떤 고뇌와 성찰도 없는 삶(≒자유)의 공허함과 가벼움을 저격 중이다. 시인은 이를 위해 과거 발굴과 현재로의 가치화라는 ‘시간 발굴’의 고고학을 새 시집의 사유 방법과 언어 전략으로 뽑아 들었다.
백현의 ‘시간의 고고학’은 과거 자체의 탐구나 발굴을 지상의 과제로 삼지는 않는다. 대신 과거의 시공간을 현재로 불러들여 미래로 물꼬를 트는 ‘가치화된 시간’의 창조, 다시 말해 “한 꿈이 생시로 건너가는 시간”을 확보하는 일에 표적지를 달았다. 시인의 “발굴 일지”를 참조한다면 “검은 흙으로 묻혀있는 너의 타버린 꿈을 발굴”하여 “너무 늦게 돌아온 자의 비망록을 적는” 과제가 그것이다. 백현은 비망록의 일절을 “분홍빛 시간이 열리는 소리”와 “가슴에” 단 “연초록 잎 몇 장”의 대립과 결속에 바쳤다. 이 홍록의 보색에서 붉음은 생명과 미의 솟구침을, 연두는 삶과 지속의 무한 확장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그러니 생시生時로 건너간 ‘한 꿈의 시간’을 사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상실과 파괴의 비극을 넘어 ‘연두의 지평’에 ‘생의 붉은 정점’을 올려두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 최현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