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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를 가르는 새 역사를 창조하리라
사도세자의 아들, 왕위에 오르다 새 역사 새 바람 정조의 숨은 뜻은 수령과 암행어사 언론 개방 2. 사람 노릇 좀 합시다 인재의 절반을 버릴 것인가 종의 멍애를 풀어 주리라 형벌을 가볍게 하라 가문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조선사회를 분열로 이끈 지역차별정책 경기 · 충청도가 집권세력의 중심지 3. 세계는 달라지고 있다 청나라는 선진국이다 바다를 찾는 사람들 자생적으로 뿌리는 내리는 천주교 4. 왜 실학인가 사상과 학문의 토대가 흔들리다 실제로 사람에게 소용되는 학문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자 낡은 것을 뜯어고치자 산업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5. 문예부흥과 직업예술가의 등장 대중문학 유행 문학은 교훈이 아니라 예술이다 우리 노래에 우리 정서를 붓끝에서 살아나는 시대의 자화상 찾아보기 연표 참고문헌 |
Lee E-Hwa,李離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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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영조가 격쟁을 금지한 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하면서 격쟁을 부활시켰으나 단서를 두었다. 지금까지는 백성들이 임금이 행차할 때 행렬 안으로 뛰어들어 격렬하게 격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행렬 안은 대궐 안과 마찬가지로 일반 사람의 출입 금지구역에 해당한다. 정조는 이제부터 꼭 행렬 바깥에서 격쟁하라고 분부하였다. 또 예전처럼 사안을 접수하면 3일 안에 처리하라고 엄하게 일렀다. 정조는 나들이를 나가면 수령을 시켜 백성들을 불러들여 폐단을 묻기도 했다.
1781년 4월, 정조가 동부 숭교방에 있는 경모궁 보수공사 현장을 돌아보고 창덕궁으로 돌아올 때였다. 능주에 사는 한무리의 백성들이 징을 치며 대가를 막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목사를 너무 자주 갈아치우는 통에 고을의 힘이 원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로 거덜나고 백성은 적은데 환자 곡식이 많아서 온갖 폐단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형조에 붙들려 와서 조사를 받았는데 24년 동안 20명의 원이 갈렸으며, 백성의 호수는 겨우 4천 호인데 환자 곡식 10만 석을 배당하여 강제로 나누어 주고 이자를 거두어들인다는 사실을 호소했다. 그들을 신문한 지 3일 만에 임금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 pp. 9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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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전쟁 이후 청나라와의 갈등과 이본과의 선린우호 관계 속에서 존명배청 사상이 등장하고 북벌론이 대두하였는데, 결국 이것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으나 정치적 책략으로 이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당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주자학의 교조성이 강화되었음을 추적하였다.
극대화한 모순을 청산하려고 지배세력과 관인사회, 그리고 재야의 지식인들이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추진한 과정을 상세히 담았다. 곧 영조와 정조의 개혁정치와 이를 뒷받침한 벼슬아치들과 실학파로 일컬어지는 재야파에 의해 사회개조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족의 독점현상을 타파하고 양반을 없애야 하다는 등의 내정개혁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주자학이 아닌 서학(西學) 등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고 역사적으로는 '조선의 것'을 추구한 민족주체의 확립 등을 부각시켰다. 사회경제사적으로도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는 점이다. 화폐를 전면적으로 통용하고 이에 따라 초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개되었다. 국가통제를 벗어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업자본을 축적한 상인세력이 정치적 힘을 얻었다. 또 농법의 개량, 농기구의 개발을 통해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토지의 독점현상이 가속화되어 새로운 경제질서로 재편되었다. 국가정책도 이에 발맞추어 개선을 도모하였다. 민중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중인, 서자, 노비 등 소외되거나 학대받던 세력들은 자신들에게 씌어진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민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처지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하거나 물리적으로 저항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영조와 정조는 이들의 고통을 들어 그 개선을 도모하였다. 서민문화가 활발하게 싹트기 시작하였다. 문학에서는 중인들이 벌인 여항문학과 서민들이 벌인 춘향전, 심청전 등 국문소설이 유행을 타고 독자를 확보하였으며, 음악에서는 직업적 가객이 등장하고 판소리가 최초로 생성하였고, 그림에서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서민문화를 유교 교양을 중심으로 이룩된 고답적인 귀족문화와 쌍벽을 이루었다. 놀이와 풍속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전통적 생활습관에서 차츰 다양한 놀이문화를 전개시켰다. 트레머리 등 사치를 금지하는 영조와 정조의 검소·절약정책에 힘입어 서민들의 세시풍속이 절제되어 나타났다. 통과의례도 간소화를 표방하였으며, 세시풍속도 농경문화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오늘날 전통적 풍속과 놀이는 이 무렵 정리되어 계승되거나 재현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