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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출근 인사 퇴근 인사/ 조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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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첫날에는 청소를 하지요. 몰래 숨어드는 기분으로 서점에 들어와 샅샅, 낱낱이 걸레질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치우고 옮기고. 다를 것 없는 것들을 다르게 만들어보려고 애씁니다. 서점에 가장 오래 있을 한 해의 나를 위해서요. 그러다보면, 이렇게 많은 구석이 있었나 싶어지는 것입니다. 손도 발도 닿지 않는 이곳은 얼마나 쓸쓸하였길래 이토록 먼지 덮여 있는 것일까, 안쓰러운 한편 믿을 구석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방이 만나는 이 구석이라는 곳이 없으면 무엇도 견디지 못하겠다 싶어 미안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해 첫 청소란 구석과 눈 맞추는 일도 되겠습니다.
---p.12 「1월 2일」 중에서 삼일절이고, 정오에는 대한독립 만세삼창을 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라 슬쩍 웃는 추운 아침입니다. 손은 차갑고 메마른 가지 같고 3월인데도 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은 작년 이맘때에도, 실은 재작년, 그 전해, 전전해 이맘때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이어리 속 3월 첫날 빈자리에 그래도 봄,이라고 적습니다. 오늘은 대관 행사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서점의 구석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마른 꽃을 버리고 이제 그만 괴롭겠습니다. 갈수록 힘에 부치지만, 서점도 겨울을 떠나 봄에 이르러 녹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믿으면 그리됩니다. ---p.80 「3월 1일」 중에서 시간은 ‘아직’과 ‘이제’ 사이에서 드러나곤 합니다. 가만 느껴보면 심장의 물리적 박동은 아직과 이제 다음 아직, 세 번의 박자인 것입니다. 아직 있습니다. 이제 없다가 다시 아직으로. 지난 한 주는 이제 없음을 절감하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용했을 뿐이에요. 깊은 잠수 후에 머리를 물 밖으로 내어놓듯 오늘은 날씨가 참 좋습니다. 사랑할 구석이 남아 있다는 듯 도처가 환합니다. ---p.149 「5월 2일」 중에서 어젯밤 근사한 장맛비 내렸지요. 6월의 종결을 공식 선언합니다. ---p.214 「6월 30일」 중에서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데, 여름은 지금부터야. 장마가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전, 채 한 달이 되지 않는 지금 말이야. 우리가 기대하는 여름의 모든 마법은 이 사이 느닷없이 생겨나고 가뭇없이 사라져버리지. 청신한 돌발과 깨끗한 소멸. 그야말로 오직 우리만을 위한 계절. ---p.261 「8월 9일」 중에서 마음은 같을 수 없고 다르다는 점에서 이해는 가능해지곤 합니다. 이해는 영영 불구의 바람이라는 것도 지금쯤은 눈치채고 있습니다. 절망이나 희망이라는 명사들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갈구하고 뒤늦게 감동하는, 그만으로도 괜찮지 않은가 합니다. 그래서인가 요즘은 도통 쓰질 못합니다. 읽기만 합니다. 또 어느 날 궁리를 시작하겠지요. 나는 나를 내버려둡니다. 여전히 어두운 날씨입니다. 빛나는 것들이 잘 보입니다. ---p.335 「10월 15일」 중에서 기분. 그건 창문 같은 것. 맺히거나 사라지거나 머물거나 지워지거나 얼룩덜룩하거나 어쨌든 무언가 있는 그런 것. 혹은 어젯밤 불쑥 연락해 느닷없이 찾아온 후배와 닮은 것. 그랬다가 그렇지 않게 되었다가 남은 게 있고 지워진 마음이 있고 역시 혼자만의 어떤 것. ---p.372 「11월 15일」 중에서 출근길에 케이크를 한 조각 샀습니다.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나를 위한 케이크라니. 오늘은 그러고 싶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여서인지, 그런데도의 출근이 아쉬워서인지, 참 달고 맛있습니다. 하마터면 인사도 잊을 뻔했지요. 크리스마스 아침. 늦잠이 어울리는 한 해의 단 하루. ---p.423 「12월 25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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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일상에 도움이 된다는 증거
하루를 무사히 건너게 하는 시인의 고마운 인사 여느 날과 다름없이 버스를 타고 출근해 화분에 물을 주고, 장마 우산을 챙기고, 낙엽을 쓸고, 눈길을 걱정하며 일 년을 보내는 일을 열 번쯤 반복한 사람들의 마음을 유희경 시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매일을 다독여주는 그의 출근 인사 덕분에 우리는 일과를 마치고 하루의 끝에 무사히 닿을 수 있었다. 근사한 밤이 오면 안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의 출근을 더욱 소중히 여기기도 하면서. 어떤 날에는 출근 인사의 잔상과 더불어 하루 중에 문학적인 장면을 발견하기도 했을 것이다. 출근하면 내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 유희경 시인은 심상한 우리의 일상에 작은 활력을 불어넣어주며 오늘을, 내일을, 그렇게 일 년을, 십 년을 우리와 함께 걸어왔다. 유희경 시인은 출근을 위해서 “인사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서점지기로 살기 위해 “나의 언어로 솔직한 태도로 최선을 다해서, 당신에게 인사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8면) 그리고 그는 문학의 효용을 증명하듯 가장 문학적인 인사를 독자에게 건넸고, 출근 인사의 문장이 쌓일수록 그에 화답하는 독자도 늘어갔다. 당신에게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나는 출근을 사랑하게 되었다. 본말이 전도된 듯하지만, 결론은 다르지 않다. 사랑이다. 출근을 향한 나의 사랑은, 매일 아침 집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시작된다. 그날의 기온, 습도, 구름의 모양을 살피거나 버스정류장에 서서 보고 듣는 것을 세심하게 대하는 일도 사랑이다. 버스 차창으로 펼쳐지는 모든 우연의 풍경은 어떠한가. 이 역시 나에겐 사랑이다..(8면) 시집서점의 10년, 한국문학의 고마움이자 자랑 유희경 시인이 건네는 인사는 “한자리에서 몇 해를 보내고 있는 사람의 보람”(325면)을 넘어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기록자의 자리”(166면)에서 소명처럼 쓰인 책임과 애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올여름 10주년을 맞는 그의 ‘출근’을 돌아보면 한국문학의 지난 10년간의 장면도 함께 겹쳐진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시집서점을 이끄는 그가 그간 얼마나 많은 시인을 격려하고 독자들을 위로했는지 한국문학을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고, 시집을 펴낸 시인들을 축하해주고, 목소리가 필요한 작가들에게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장을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가만가만 말을 건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일 초에 불을 붙이듯 하나씩 하나씩”(349면) 정성스럽게 시의 자리를 기념하고 독자들을 맞이했다. 출근하기 위해선 인사가 필요했다! 절실한 마음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수행한 나와의 약속 “나에게 재주가 있다면 그것은 기다리는 것. 나는 정말 잘 기다립니다.” 혹은 “그것이 나의 기다림”(414면)이며 “기다림을 좋아”(366면)한다고 그는 말하지만 사실 그런 시간이 버겁거나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손이 적은 날이면 독자들이 시집을, 책을 멀리하고, 어느 날 서점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때일수록 그는 더더욱 서점의 루틴을 지키고 독자들에게 출근 인사를 써내려갔다. 그것은 어떤 간절함이기도,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다짐이기도, 다만 여기에 그가 일군 시집서점의 “모든 것이, 다시 말해 ‘우리’가 있었음을, 있음을 간신히 기어코 증거하려는 노력”(9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도 출근하면 출근 인사를 쓴다. 막 출근하셨나요? 인사를 건넵니다. 이 자리에 가장 오래 있을 당신을,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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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빠더너스 문상훈 추천!
시인은 어떤 하루를 보내길래 그 하루들이 시가 되어 나오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다. 인생의 달고 씀에 대해 손가락이 닳도록 토로해온 시인이 당신의 하루에 대해서도 상냥하고 자세하게 적어서 나눠준다. 맡겨놓은 것처럼 내민 두 손이 부끄러워진다. 시는 결과보다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이 쓰는 것. 산 정상의 순간보다 오르는 걸음걸음. 채점된 시험지보다 잠 쫓던 새벽의 버석함. 무대 위 박수갈채보다 쿰쿰한 연습실. 시집 속 검은 잉크보다 뭐라 형용할 수 없고 그저 익어지던 감정들. 그 과정들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온 시인의 출근길이 이 책에 소복하게 담겨 있다. 나는 입을 벌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아기 새처럼 또 손을 내민다. 그러면 위트 앤 시니컬의 유희경 시인은 오늘도 미소를 띠며 손을 맞잡는다. 그 손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늘 뭉근하다. - 문상훈 (빠더너스, 크리에이터,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