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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가을 선언 9
9월 1일 시 대화 15 9월 2일 에세이 가방 19 9월 3일 시 대화 25 9월 4일 에세이 선에 대하여 31 9월 5일 에세이 좋음과 싫음 37 9월 6일 에세이 우산 45 9월 7일 에세이 오기 이야기 53 9월 8일 에세이 아기 고양이의 울음소리 63 9월 9일 에세이 야구장과 롤러코스터 73 9월 10일 에세이 한밤중에 찬물 마시기 81 9월 11일 에세이 위통과 커피 89 9월 12일 인터뷰 오기와의 인터뷰 1 95 9월 13일 시 대화 105 9월 14일 에세이 오뚜기 삼분카레! 109 9월 15일 편지 지난겨울, 오기에게 보낸 편지 117 9월 16일 에세이 오기와 사진 125 9월 17일 희곡 오기의 희곡 137 9월 18일 시 대화 153 9월 19일 에세이 오기와 시 161 9월 20일 인터뷰 오기와의 인터뷰 2 169 9월 21일 편지 오기의 답장 177 9월 22일 에세이 오기와 밤에 걷기 185 9월 23일 시 대화 195 9월 24일 에세이 텔레비전 이야기 199 9월 25일 에세이 오기만 아는 이야기 207 9월 26일 에세이 오기의 혼자 217 9월 27일 시 오기의 시 227 9월 28일 에세이 오기에게만 하는 이야기 235 9월 29일 에세이 오기의 좋아함 241 9월 30일 시 대화 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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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젖은 커피잔을 엎어두고
젖은 손을 닦으려 하는데 엎어둔 건 커피잔이 아니었고 곤란하게도 젖은 내 손이었다 커피잔 대신 손을 엎어두었다고 곤란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젖은 내 손은 옛일과 무관하고 네가 꺼내 읽을 것도 아니다 성립하지 않는 변명처럼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 너는 책에 푹 빠져 있고 손은 금방 마를 것이며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은 어디 있을까 나는 체념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 p.17 「9월 1일- 대화」중에서 오기는 천천히 계단을 밟아 서점으로 올라온다. 무척 독특한 리듬이라, 나는 그가 첫 계단을 밟는 즉시 그가 왔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반가움을 애써 감추며 무심한 척 표정을 가장하는 동안 그는 올라온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예열하는 엔진처럼 잠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오기가 있는 동안, 서점의 빈 책상 하나는 오로지 오기의 것이다. 오기는 그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쓴다. 오기는 컴퓨터나 키보드로 글을 쓰지 않는다. 아무 펜, 아무 종이나 잡고 쓴다. 쓴 것을 아무렇게나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 사람처럼. 어쩌면 정말 오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쓴 글과 작별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쓰는 것은 여전히 희곡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희곡을 그는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이윽고 그는 일어나 내게로 온다. 와서 말을 건다. 그렇게 또 한번의 대화가 시작된다. --- pp.58-59 「9월 7일 - 오기 이야기」중에서 하긴 커피. 그러면 얼마나 많은 기억이 넘실대는가. 커피한 잔 혹은 두 잔을 놓고 쌓아왔던 모든 사연, 기다렸고 만났고 웃고 떠들었으며 이따금 엎드려 울었던, 너무나 진부하지만 그만큼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마치 성냥개비로 만든 탑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차근차근 다시 쌓여올라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언젠가의 자판기 앞 쌀쌀맞은 그애처럼 느닷없이 떠오르며 아픈 것도 쓰린 것도 아니고 하여간 설명하기 어렵게 아슬아슬한 감각을, 차마 통증이라 이를 수 없는 감각을 불러올 것이다. 오기, 커피를 끊는 건 그리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인터넷 창을 띄워 ‘위통에도 마실 수 있는 커피’라든가 ‘위통에 어울리는 커피’ 따위의 문장을 검색해보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 그런 커피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며칠 커피를 단절한 채 보내야겠지. 그로부터 며칠 뒤 명치의 통증이 가시고 나면 나는 오랜만에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볼 생각이다. 마침 근처에 구닥다리 자판기가 한 대 있다. 내가 커피를 뽑으려 할 적에 혹시 누가 동전을 넣어준다면, 나는 반환 레버를 돌리지 않고 한껏 그이를 사랑해줄 마음이다. --- pp.93-94 「9월 11일 - 위통과 커피」중에서 나는 새로이 사람을 만나 알고 싶어지면,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말이야, 그의 언덕을 상상해봐. 얼마나 높을지, 어떤 재질의 언덕일지, 그곳의 저녁은 어떤지. 나는 너의 언덕도 상상해본 적 있어. 너는 알면 알수록 가파르고 양옆에 숲을 키우고 있는 밤의 언덕을 가진 사람이야. 무섭겠지. 하지만 너는 용감해. 거침없이 달리고 있어. 그래서 나는 너를 존경해. 너를 알고 싶고 너의 언덕을 알고 싶어져. 물론 언덕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드러나는 거지. 그러니 너도 나의 언덕을 상상해봤으면 좋겠어. 한편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삶을, 어린 시절 어떤 저녁에 엄마의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기 위해서 내달리던 언덕에서의 꿈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해. 나는 내게서 마치 떨어져나갈 듯 길게 늘어진 나의 그림자를 봐. 언덕은 붉게 달아올랐고 나의 그림자는 까맣고 나는, 달려가 가게 앞까지. 두부 앞에 다다를 때까지. --- pp.102-103 「 9월 12일 - 오기와의 인터뷰」중에서 조그마한 무덤은 나무와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고 보라색 꽃은 사방에 피어 있고 우듬지로 돌아오는 바람과 새들 새들의 울음은 오지 않고 비가 내릴 모양이네 내일 다시 비석을 보러 가야겠어 오솔길을 기억해야지 의자에 앉아서 그러면 방은 넓어지고 조금의 기쁨과 조금의 슬픔 나는 듣고 있다 --- pp.252-253 「9월 30일 - 대화」중에서 |